00110 새로운 세력가들 =========================================================================
※연참분으로, 몇 분 간격으로 올린 전편이 있습니다. 이어보시는 경우 참고해 주세요.
연회장으로 나오니 한쪽에서 악단이 경쾌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폴짝폴짝 신발 끝을 튕기며 왈츠를 추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었던 음악 소리는 실제로 밖에서 들려온 것이었던 듯했다.
라르슨 영애는 저만치 자리를 옮겨, 영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로 슬쩍 발렌틴을 밀며 걸었다. 유려한 덩굴꽃 음각 장식이 된 커다란 기둥 뒤에 기대어 서서 음악을 들으며 숨을 돌리고 있다가 속삭였다.
“느린 곡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게. 그랬더라면 춤을 핑계로 당신 허리를 끌어안고 붙어 있을 수 있었을 테지.”
“여보, 그게 아니라 제가 몸이 둔해서 빠른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아드리아나가 가볍게 눈을 흘기자, 발렌틴이 코웃음을 치고 나서 속삭였다.
“그럼 바쉬에서 당신이랑 춤출 때마다 여기저기를 희롱당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내 착각이란 말인가?”
물론 반박할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가 먼저 시작한 게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발렌틴의 과감한 애정행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마치 춤을 출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아드리아나의 뺨이며 목덜미에 키스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미 자신의 남편의 된 그에게 몇 번이고 다시 반할 수 있을 듯했다.
남몰래 그의 손가락을 잡고 미소 짓고 있는 동안, 금세 곡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드리아나는 지휘자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곡이 멈추었을 때, 느린 곡을 연주해줄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지휘자는 기꺼이 그리 해드리겠노라고 미소 짓고, 다시 지휘봉을 들어올렸다.
새로운 곡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파트너를 바꾸며 인사를 나눴다.
아드리아나는 수줍음과 짓궂음이 섞인 미소를 지은 채로 발렌틴에게 돌아갔다. 그의 손을 잡고 왈츠를 시작할 자세를 잡으며, 표정을 새침하게 바꾸었다. 발렌틴 쪽은 오늘 사람들 앞에서 내내 점잔을 빼고 있었다.
“우린 결혼한 지 반년이나 지난 부부이니, 같이 춤은 출망정 서로 히히덕거리면 안 되겠죠?”
아드리아나가 조그맣게 말했다. 발렌틴은 알만하다는 듯 한쪽 입술 끝을 끌어올렸을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군중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천천히 홀 안을 미끄러지듯 누볐다. 한동안은 서로에게 닿은 손도 얌전하기만 했다. 다만 마주보는 눈길만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뒤통수가 따갑군. 내가 부인을 독차지 하는 데에 불만 있는 남자들이 많은 모양이오.”
발렌틴이 나직이 속삭였다. 아드리아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전 딱히 시샘어린 눈길을 못 느끼겠는데요, 발렌틴. 대체 숙녀들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다니셨기에 인기가 이 지경이신가요?”
“이상하군. 여자들한테 크게 못되게 굴고 다닌 기억은 없는데.”
그가 말하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드리아나는 어쩐지 헤벌쭉 웃어버릴 것만 같아서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며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실제로도 발렌틴에 대한 여성들의 평가는 엉망이었다. 그의 사회적인 평판이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사위감으로서 눈독 들였다는 가문도 부지기수였지만, 적어도 테스카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런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발렌틴의 부인인 아드리아나에게 그의 흠을 폭로할 인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분은 너무 무뚝뚝하시지 않나요’고 말하는 부인이 한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펜은, 발렌틴을 아주 나쁘게 말하는 여성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일러주었다. '전형적이고 노골적인 남성 우월주의자로 그 중에서도 아주 질이 나빠 여성을 철저히 무시하며 배려할 줄 모르는 거만하고 까칠한 인간'이더라고.
아드리아나는 그 인상 깊었던 표현을 빌렸다.
“아무래도 경께서 확고한 남성 우월주의자인 만큼, 설사 여성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스스로 자각하기란 어려웠을 거예요.”
그 속삭임을 듣고 발렌틴이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얼마나 여성을 무서워하는 순한 남자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오. 지금도 부인께 엉덩이를 잡혀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 좀 봐요.”
“엉덩이라뇨, 여보? 허리를 좀 쓰다듬은 것뿐이잖아요.”
“거의 닿을 뻔했다니까.”
아드리아나는 그의 말대로 해줄까,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으며 소리죽여 웃었다.
은근하게 그의 허리를 더듬던 손을 어깨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가, 이내 아래로 미끄러뜨리며 두툼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얌전히 내리깔고 있던 그의 시선에 은근한 열기가 배어들었다.
“그만 부추겨. 여기서 내가 당신 목덜미를 물어 쓰러뜨려도 화내지 않을 게 아니라면.”
아드리아나는 더듬기를 그만두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
멀리 할트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한쪽에서 다과를 들며 자기 딸이라도 바라보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곁에 있는 교회 부인네들은 대개 부끄러워하거나 흐뭇해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오른쪽 벽을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는 민스터도 보였다. 그녀는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남편과 춤을 추고 있지도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당혹감이 선연한 얼굴로 술렁이는 여자들을 보았다. 아마 아드리아나가 남편과 달콤한 연애를 즐기고 있는 장면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건, 그녀들에게 자못 충격적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라르슨 영애의 눈빛을 보고서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경멸하는 그 시선에 명백한 적개심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끝나고, 아드리아나는 이만 식구들을 챙겨서 돌아가기로 했다. 땀이 난 손을 씻기 위해 잠시 여성용 휴게실에 들렀다.
비어 있을 것 같은 위치의 방을 찾아서 노크했지만, 먼저 들른 손님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방을 찾으며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서 ‘실례합니다.’하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끄러미 불청객을 바라보는 민스터가 있었다. 아드리아나 역시 당황했다. 하지만 자신은 하녀를 데리고 있었고 민스터는 혼자였다. 아드리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세면대 앞으로 다가갔다.
약간 굳은 얼굴로 손에 비누칠을 하고 있자, 민스터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눈엣가시로 보이시겠죠.”
“부인께서 절 그렇게 여기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드리아나는 나직이 대답하고서 물을 틀었다. 민스터는 물소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부인이 정말 부러워요. 전에는 부인의 남편을 선망하여 부러웠지만, 지금은 부인께서 시댁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신다는 점이 가장 부럽네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짙어지는 당혹감을 감추며, 아드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발렌틴이 청혼하러 슈하스나 헤밀에 다녀간 일 때문에 여자들이 떠들썩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시골 영지에서 보기 드문 도시의 부유한 남자였으니 있을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댁 식구들과 떨어져 있는 점이 부럽다니. 아드리아나가 시댁이 있는 투스미아에 가서 살게 될 날을 꿈꾸고 있다고 하면 그녀가 믿을까. 라르슨 영애 밑에 있는 민스터의 처지를 추측해보건대, 속절없이 신경만 긁는 일이 될 터였다.
“아까는 무슨 낯 뜨거운 불륜 연인을 보는 것 같았어요. 두 분 사이에 정열이 넘쳐 보이시던걸요.”
민스터가 벽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밤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서로 안고 잠드시겠죠? 두 분은 피임을 하시나요?”
아드리아나는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조용히 민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말을 계속했다.
“전 결혼한 지 두 달인데 벌써 아기가 생겼어요. 우린 잠자리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죠. 식을 올린 날 밤에 생긴 모양이에요.”
그녀는 별 감흥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감정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민스터의 눈동자 안에는 아드리아나가 알고 있는 우울함과 슬픔이 비치고 있었다.
“...축하해요. 아기가 부인을 닮으면 무척 예쁘겠네요.”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웃는 얼굴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왜곡하여 해석될 정도는 아닐 터였다. 자신이 민스터의 임신 사실을 듣고 부러워하는 마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래요. 제 피붙이라고 생각하고 정을 붙이고 있죠. 라르슨 씨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를 낳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결코 못할 일이에요.”
민스터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아드리아나를 보았다.
“사실 아까 부인을 뵈었을 때 임신하신 줄 알았어요. 살이 많이 쪄 보이시기에.”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민스터가 말한 의미가 뚱뚱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민망해졌다.
“전 사실 원래 늘 이 정도를 유지했었어요, 부인. 과거 몇 년 동안에 좀 야위어 있었던 거죠.”
“그렇군요. 원래 마른 분인 줄 알았는데.”
민스터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순수하게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권태로운 표정으로 돌아가 세면대 앞으로 갔다.
아드리아나는 조금 서글퍼지는 의문을 느꼈다. 민스터는 왜 하녀 한 명 데리고 다니지 않을까. 남편이 변변치 않은 살림의 남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라르슨 영애를 따라다닐 정도면 하녀 한 명 정도, 하다못해 친척이나 친구 한 명 정도는 동행해서 다니는 게 좋을 텐데.
아드리아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말했다.
“...기운 내세요, 부인. 뱃속의 아이가 엄마를 사랑하고 기쁘게 해주는 아이로 자란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웬디와 헤이즐, 조엘이 생각나서 한 말이었다.
민스터도 자신처럼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걸로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자신과는 달리 기댈 곳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그녀도 누군가에게서든 위로를 받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그녀를 그다지 미워해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자신도 이미 엄마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민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눗기를 헹구며 두 손을 비비고 문지르던 손동작은 멈춰 있었지만, 수도꼭지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쏴아아, 물소리가 이어지고 있었지고 있었음에도 마치 정적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레버를 돌려 잠갔다. 그러고는 씻어서 젖은 손 그대로 얼굴을 닦았다. 눈과 코가 빨갰다.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손으로 얼굴에 묻힌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엔딩 분위기 파괴하는 발언이지만, 전 남주가 엉덩이에 인색하게 구는 것에 모에라도 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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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uu
+너무 늦을 듯해 하루 뒤에 오겠습니다ㅜㅜ 빵빵히 가져올게요. 좋은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