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새로운 세력가들 =========================================================================
“어머나 세상에, 웨버 부인이 남작 가의 상속인이셨대요?”
“그게 뭐 놀랄 일인가요? 제가 뭔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역시나. 설마하니, 아무리 외지인이라고는 해도 귀족 출신에다 재벌쯤 되는 남자가 가문도 안 보고 결혼했으려고요. 그럼 웨버 경은 다른 영지의 남작으로 가시게 되는 걸까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하자, 이제 아드리아나는 라르슨 부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었다.
라르슨 부인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례를 저지르고도 자신의 실수를 알지 못하는 듯, 아드리아나에게 격이 맞는 이웃을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느니 친구가 되고 싶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 얼마 전에 마리안느에게 들었던 것과도 거의 흡사한 표현이었는데, 그때와는 전혀 기분이 달랐다.
아드리아나는 주변이 시끄러워진 틈을 타서, 잠시 화장을 고치러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정신없이 자리를 떠나 빈 방을 찾아 들어가서, 곧바로 문을 닫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가방을 열어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부채를 꺼냈다.
하인들은 문간에 서서 눈치를 보았다.
“저, 마님. 아까 아너슨 부인께서 웨버 경을 찾으러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고했다. 아드리아나는 그녀에게 라르슨 영애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할까 하다가 관두고, 진저리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분을 삭히려 연신 심호흡을 하다가, 소파 구석에 놓인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뉘였다.
백작 가의 영애라고, 왕족과 가까운 혈통을 가졌다고, 말도 안 되는 무례를 저지르며 상대도 가리지 않고 적을 만들고 다닌다는 말인가? 아니면 특별히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남의 귀한 남편을 그딴 식으로 말하다니.’
이번에는 우울함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었다.
아드리아나는 입을 꾹 닫고 코로 씩씩대며 열을 삭혔다. 팔을 이마에 얹고 쉬고 있다가, 곧 다시 거칠게 부채질을 해댔다.
엘레나가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말했다.
“그 귀부인께서는 본인 앞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들만 만나왔을 거예요. 어쩌다 테스카로 오시게 된지는 몰라도, 앞으로 고생깨나 하시게 되지 않을까요?”
“글쎄. 사람들의 뒷말이 과연 그분께 영향을 끼칠지나 모르겠어. 본인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셨으니까. 주위의 시선은 그렇다 쳐도, 눈앞에서 황당해하는 내 반응도 눈치 채지 못하시는 걸 보면 말이야.”
아니면 악의이거나.
엘레나의 말도 맞다. 라르슨 영애 앞에서 누가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있을까. 그녀는 백작 가의 나이 지긋한 영애이자 미망인이므로 다른 부인들과의 접점이 부족해 여간해서는 괴롭힘이나 비판의 타겟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거침없이 자기 주관으로 타인을 상처 입히고 깨닫지 못하며 살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사람이 된 건가?”
아드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말을 하던 때의 글라디스의 냉소적인 표정이 어른거렸다. 실제로 자신도 변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오래 전에 했던 미네타의 말을 떠올렸다.
-오드리는 이대로가 좋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미네타가 머리를 염색해주었던 때의 일이었던가? 아무튼 이런 대도시에서 사교 파티에 어울리며 지체 높은 부인의 무신경한 언사에 골머리를 앓는 귀부인의 삶에 대해서는 상상해본 적도 없던 때의 일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감고 느릿하게 손목을 움직이며 부채질을 했다.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작게 심호흡을 계속했다. 바깥바람을 쐬는 편이 더 나을 듯했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안 되지. 자꾸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돼. 만약 아기가 있다면....’
점점 의식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아드리아나는 화 내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며 침몰하듯 나른함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귓속이 먹먹할 정도로 묵직한 정적이 몸을 짓눌렀다. 등으로 배어드는 뜨거운 열기가 숨통을 틀어막는 듯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음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소리 없이 끙끙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마의 땀을 식혀주는 부드러운 미풍을 느끼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등을 돌렸다.
땀에 젖어 있던 등에 바람이 스치며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에 몸을 웅크리자, 한쪽 뺨이 따뜻한 손으로 감싸였다.
“여보, 옷 벗긴다.”
또렷하고 낮은 음성을 들은 아드리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시야가 소파 등받이에 가로막혀 있었다. 목소리가 다시 뒤에서 들려왔다.
“자면서 식은땀을 흘렸나 봐. 뒤에 지퍼 열고 닦아줄게.”
발렌틴이 고개를 기울여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발렌틴.”
아드리아나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흘끔 살폈다.
하인들과 남편뿐이었다. 발렌틴이 태연하게 손을 뻗어 지퍼를 열려하기에, 아드리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엘레나가 자기가 하겠다고 끼어들었다.
“이런 곳에서 곤히 자고 있다니 놀랐소.”
발렌틴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겸연쩍게 웃었다.
“죄송해요. 잠깐 쉬고 싶어서 누웠는데, 잠이 들 줄 몰랐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나요?”
“내가 온 지는 30분 정도 되었고, 아마도 당신은 40분 정도 잔 모양이야.”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경악하며 일어섰다.
“세상에... 또 무슨 말을 들으려고....”
초조해하는 기색으로 팔을 문지르고 허둥지둥 옷차림을 수습하자, 발렌틴이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많이 힘들면 그만 돌아갈까?”
“아뇨. 괜찮아요.”
도망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아드리아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날뛰던 마음도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으시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남편에게 상처를 더하는 셈이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을 한 번 꼭 끌어안아준 후, 함께 방을 나왔다.
============================ 작품 후기 ============================
앞편 길이 조절을 못했더니 요번 편이 짧네요. 다음편도 바로 이어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