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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05화 (105/140)

00105  나의 가족  =========================================================================

“왜? 몸 안 좋아?”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아의 눈을 들여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몸 상태를 확인하는 그 물음 안에, 지금부터 그가 무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의중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너무 시간이 이른 것 같아서요.”

“할 일을 다 하고도 일찍 잘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발렌틴이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스커트의 나풀나풀한 끝자락을 손가락에 감아쥐었다. 그의 다른 한 손은 아드리아나가 기대고 있는 소파 등받이 위를 지나 움츠린 어깨에 살짝 닿아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은 지금처럼 불안정한 때에 그에게 안겨서 이성을 더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부인들의 충고로 새겼던 그 각오 따위는 그의 손이 닿자마자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발렌틴이 고개를 숙이더니 아드리아나의 입술을 한 번 가볍게 빨고 놓아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훔쳐보듯 그를 바라보며 가슴을 작게 들먹였다. 체온이 올라가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졌던 4일 전의 시간이 머릿속으로 확 몰아쳐 들어왔다. 허벅지 사이의 열기 띤 반응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릎을 꽉 붙이고 오므렸다.

무작정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할 일도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발렌틴의 부재에 비정상적인 괴로움을 느끼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그의 육체와 관계에 길들여지고 애착을 갖게 되면서 일종의 중독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소한 접촉부터 잠자리까지의 모든 행위가 그를 더욱 친밀하게 느껴지게 했고, 자신들이 배우자로서의 의무감과 애정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완전하게 이어진 하나가 되었다는 충족감에 도취되게 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고 주인이 되었다는 이런 마음이 지나친 것이라면, 무거워진 자신의 마음이 독이 될 수 있다면, 당장 마음을 담백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우선은 몸부터 조금이나마 통제를 하는 게 어떤가 싶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해?”

발렌틴이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며, 그의 한쪽 입술 끝이 비딱하게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커트 자락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길을 느꼈다. 느긋하게 허벅지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무심코 침이 꼴깍 넘어갔다.

“오드리. 며칠을 참고 어제도 그냥 재워줬는데 이러기야?”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웃으며, 틈을 주지 않고 아드리아나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당장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읏….”

그가 닿은 곳으로부터 주변까지 이어지는 신경이 쾌감에 마비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감고 떨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힘을 주고 있던 무릎이 바들거렸다.

얇은 블라우스 상의 위로 그의 뜨거운 숨결이 퍼졌다. 아찔해져서 정신을 잃어가며 벌어진 입술 위로, 어느새 가까워진 그의 입술이 눌리고 혀가 들어왔다.

*

멍해진 감각이 좀처럼 제자리를 되찾지 못했다. 아드리아나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눈을 껌벅이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찌어찌 잠옷은 주워서 뒤집어 입은 채로.

“로빈을 한 달 씻기지 않아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텐데.”

발렌틴이 다가와 물이 든 컵을 건네주며 짓궂게 미소 지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안에 손가락을 넣어 빗겨주는 그를 보며, 아드리아나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로빈은 자신만큼 털이 길지 않으니 비교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렌틴은 침대 옆자리에 앉았서 기다리다가, 아드리아나가 컵을 내려놓자 덮치듯 포옹하며 도로 이불 속에 들어가려 했다.

“저, 저 씻고 올게요, 발렌틴.”

“조금만 쉬었다가.”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팔 안에 껴안은 채로 잠자코 움직이지 않기에, 아드리아나는 버둥대기를 그만두고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의 가슴이 오르내릴 때마다 몸이 부드럽게 들썩이기를 반복하는 탓에 금방 졸음이 몰려왔다.

전에 말했던 ‘만에 하나’를 걱정한 탓인지, 그는 삽입을 즐기는 대신 갖가지 다른 행위을 동원해 쌓인 욕정을 해소했다. 또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들였고 거친 숨소리가 날 정도로 체력을 썼다. 훨씬 먼저 녹초가 되어 널브러져 있던 아드리아나에게 그답지 않게 몇 번이나 조금만 더 하고 조르기도 했다.

그가 머리 위에서 낮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당신 컨디션이 나아질 때까지 밖에 내보내지 말아야겠소. 또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몰라도, 내게 몸을 사리는 걸 보니 안 되겠어.”

“그런 게 아니라….”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기야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그를 향한 정념을 자중해야겠다고 마음먹기에는 서로 너무 달아 있었다. 물론 어느 때고, 자신이 삼가겠다고 발렌틴까지 힘들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를 밀어내지 마.”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나한테 거리 두지 마, 오드리.”

등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이 뜨거웠다. 그는 아드리아나의 몸을 자신에게 바짝 눌러서 밀착시키며 안았다.

“다 보기 싫을 때는 잠깐 혼자 있게 해줄 수도 있어. 당신이 편하게 자기 위해서 다시 방을 따로 쓰고 싶다고 하면….”

발렌틴은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듯이 깊은 심호흡을 한 뒤에야, 그것도 해줄 수 있노라고 말했다.

“아무튼 내게 상의해 줘. 뭐든 우리는 서로 상의하기로 했잖소. 혼자 고민하고 맘에 안 들어 하면서 내게서 멀어지면….”

“그런 거 아니에요, 발렌틴.”

아드리아나가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그냥 좀 바보 같은 생각을 계속 하게 돼요. 당신 말대로, 지금은 제가 뭔가를 현명하게 생각할 수 없는 나쁜 상태인 것 같아요. 제가 당신께 너무 무겁게 구는 것 같아서…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안 무거워. 오드리.”

그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느끼시겠죠. 당신은 남편으로서 너무 희생하시려는 경향을 가지셨으니까요.”

“아니, 희생 같은 거 안 해. 양보는 조금 하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내가 무겁다고 생각 안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당신한테 만족해.”

발렌틴은 언뜻, 의외의 초조함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믿음을 못 줬나? 내가 당신 거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워? 당신 별로 약자 아니야. 당신이 걱정하는 것처럼 우리 관계가 기울어져 있지는 않아. 나도 당신한테 아주 많이 의지하고 있어. 당신이 늘 여기서 나를 기다려주고, 누구보다 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믿으니까 편하게 나가서 일을 하고 여유도 부릴 수 있는 거야.”

아드리아나는 금방 그의 말에 설득당하고, 그대로 다 믿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부인들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남편의 목소리가 훨씬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귀에 와 닿고 있음에도.

“…제가 당신께 너무 집착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요?”

“솔직히… 난 당신이 유별나게 집착한다고 못 느끼겠소. 난 언제나 만족하고 있어. 그저 지금보다 내게서 후퇴하려고 하면… 당신이 내 것 같지 않게 구는 건 못 참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그가 가만히 안 있겠다고 말하며, 자기 말이 우스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도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집착하고 무겁게 하는 게 어떤 건지, 나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될 거야.”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그도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웃는군.”

그는 불평하듯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 위에 뺨을 문질렀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말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처음부터, 자신이 청혼을 받아들이자마자 곧 남편이 된 듯이 행동하던 그. 아드리아나를 자신의 부인으로,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듯 대하며 갑작스럽게 다정해지기 시작했던 그.

그런 그가 이대로 좋다고 말해주는 말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내일 선물 있어.”

그가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뺨을 만졌다.

“뭔데요?”

“내일 아침에 같이 가서 실어옵시다.”

“실어오다니, 큰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묻자, 발렌틴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갸웃했다.

“글쎄, 나도 꽤 오래 전에 보고 본 적이 없소.”

그의 말을 들으니 더 아리송해졌다.

아드리아나는 선물에 대해 짚이는 게 없어 궁금해 하며 그의 가슴 안에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씻겨주겠다고 잡아끄는 그의 손에 붙들려 침대에서 내려왔다. 물론 욕실에 함께 들어가는 일은 끝끝내 사양하고, 혼자 먼저 욕실로 쏙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다음 날 아드리아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곯아떨어져 있다가, 발렌틴이 얼굴에서 손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쪽쪽 입을 맞춰대는 통에 잠에서 깼다.

“여보, 많이 피곤해?”

“응….”

아드리아나는 비몽사몽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비비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벌써 씻고 옷까지 갈아입어서 멀끔해져 있었다.

“자, 아침 먹고 나랑 나갔다 와요. 바람도 쐴 겸.”

그는 잠을 너무 많이 자도 우울한 기분이 더 악화된다며, 아드리아나를 끌어안고서 일으켜 앉혀 주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와 함께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햇볕이 좋고 바람도 가로수 이파리가 살랑살랑 흔들릴 정도로 적당했다. 시야 가득한 초록빛이 하루하루 짙어지며, 여름이 얼마만치 다가와 있는지를 알렸다.

아드리아나는 열린 차창 밖을 감상하는 일에 흠뻑 빠졌다. 리무진은 일부러 길을 조금 돌아, 경치가 멋진 외곽 길을 따라 달렸다. 비포장길을 달리느라 차바퀴가 울퉁불퉁한 흙과 자갈을 밟으며 자그락자그락 내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우리 어디에 가는 거예요, 발렌틴?”

아드리아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발렌틴이 바깥을 쓱 훑어 위치를 파악하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의 꼬마 동생을 데리러.”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두고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의 말뜻을 이해했다. 차가 이미 익숙한 장소에 가까워져 있었다.

리무진이 학교 앞에 멈추었다.

이윽고 학교 안의 정원 한쪽의 벤치에 앉아 있던 두 소녀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왔다.

“오드리!”

웬디와 헤이즐이었다.

“웬디….”

허리까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뛰어오는 어엿한 소녀 아이를 보고, 아드리아나는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 참, 우리 오드리는 지금도 울보네?”

웬디가 팔을 크게 벌려 아드리아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벌써 키가 아드리아나의 가슴 위로 올라올 정도로 컸다.

“아니야. 안 그랬는데 요즘 갑자기 눈물이 많아져서 그래.”

아드리아나는 억울하다고 하며 입을 내밀었다. 옆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헤이즐도 한 번 안아주고, 웬디와 잘 지내주어 고맙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저께 내가 전화했는데, 플레밍이라는 분이 받아서 오드리는 집에 없다고 웨버 경을 바꿔줬어.”

웬디가 말하고는, 힐끔 눈을 돌려서 눈치 보듯 발렌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웨버 경.”

“안녕.”

발렌틴은 아이에게 인사를 받듯이 짧은 말로 인사를 받았다가, 곧바로 숙녀에게 해주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인사해주었다.

웬디가 부끄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아드리아나의 품에 숨어서 키득대고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결혼식 때 한껏 멋을 낸 발렌틴을 보고 왕자님 같다고 한 웬디의 말이 생각나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시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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