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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02화 (102/140)

00102  허니문, 향수, 우울  =========================================================================

바쉬 성에서 보낸 이틀도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드리아나는 돌아오는 여행길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그곳에 남겨둔 채로 미처 다 챙겨오지 못한 기분이 들 만큼, 못내 아쉽고 애틋했다.

이시스 숲에서 보낸 발렌틴과 둘만의 시간, 그의 가족과 제시카 등 친구들과 어울려 보냈던 시간, 그리고 마지막 날 바쉬 성에서 즐긴 연회까지, 매순간이 아드리아나를 행복하게 했다.

연회에서 아드리아나는 결혼식 때 입었던 것처럼 몸매를 야성적이고 풍만해 보이게 하는 고전 드레스를 입고, 같은 풍의 거친 관능을 드러내는 고전 정장을 한 남편과 생애 두 번째 느린 왈츠를 추었다.

발렌틴은 그를 홀린 듯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드리아나가 우스운 듯 눈가를 부드럽게 한 채, 몇 번인가 고개를 숙여 아드리아나의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에 한 번은, 뺨 대신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기도 했다.

가슴이 저릴 만큼 행복했다. 많은 이들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는 영원불변한 마음을 서로에게 맹세했던 그 장소에서,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해진 반려자의 손을 잡고 있는 그 순간 이상을 바랄 수 없었다.

그 여행의 여운이 심상치 않게 마음을 흔들었다.

아이넨으로 돌아온 지 이제 사흘째.

단 꿀 같았던 5일간의 휴가를 위해 비워두었던 두 사람의 자리로, 밀린 일과 약속이 해일처럼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아이넨으로 돌아오자마자 리노아스에 방문했다가 상속인 지정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왕성에도 다녀왔다. 그 후로도 발렌틴은 발렌틴대로, 아드리아나는 아드리아나대로, 각자 활동하는 영역 여기저기에서 부름을 받아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 후 며칠 만에 또 중요한 일로 다시 왕성에 불려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4일간의 비교적 장기 출장으로 업무 관계의 손님도 만날 예정이어서 부부가 다시 테스카를 비울 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내심 남편과 전처럼 오붓하고 한가롭게 보낼 시간이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둘이 같이 종횡무진하며 일에 쫓겨 다니는 건 그나마도 형편이 나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왕성 체류 일정과 겹치는 이틀의 기간, 아드리아나가 테스카 후작의 첫째 부인으로부터 ‘테스카 시 유력 인사들의 부인 회의’ 어쩌고 하는 모임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회의 제목이 아주 찝찝했다. 뭔가의 ‘유력한 여성’도 아니고 ‘유력한 인사의 부인’이라는 모임이니, 남편들의 명예를 인질로 걸어두고 있는 셈이다.

“안 나가면 뒷감당이 힘들어질 느낌이에요.”

아드리아나가 싫은 것을 만지듯 초대장을 살짝 집어 들고 말하자, 발렌틴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난 작년까지는 부인이 없어봐서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상상이 안 되는군.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기도 한데, 혹시나 여자들끼리의 일에서 불이익이 생기는 거라면… 한번 소니아한테 전화라도 해봐요, 여보.”

“그래야겠어요.”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갑작스러운 초대에 관해 물었다. 듣자하니, 테스카에 정치적으로 특별하게 취급될 만한 사안이 생겼을 때 소집되는 중요한 회의임은 틀리지 않다는 말이었다. 소니아는 회의 첫째 날은 교회 일 때문에 못 가고 둘째 날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난 당연히 가지, 오드리! 누가 내 헛소문을 만들어 쑥덕거리지는 않았는지 쳐들어가서 색출해내야 해. 내가 원수가 많거든요. 그 자리에서 한판 해놓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후에 기정사실이 되어 있고 그래서 가야 편해요.”

“아휴, 어떡하죠? 전 발렌틴하고 왕성에 다녀오려고 했거든요. 빠지면 나중에 곤란해질까요?”

“그러게. 명색이 여성 시민 대표들 회의 같은 거라서 뒷말이 많아지긴 하는데…. 안 그래도 오드리, 저번에 글라디스 영부인하고 일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소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미묘하네요. 별 큰일은 아니었는데 그 후로 영부인과 풀어놓을 기회가 없었어요.”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와 대화를 나눠보고 고민 끝에 왕성 여행을 포기하고 회의에 하루 참석하기로 했다. 어차피 일정이 중간에 끼어 겹쳐 있어서, 하루를 나가든 이틀을 나가든 발렌틴을 혼자 보내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보, 미안해요. 같이 가서 당신을 보살펴 드리고 싶은데….”

“아냐. 그보다 당신 피로가 안 풀린 것 같은데 걱정이오. 무리하지 말고 많이 쉬어둬요.”

발렌틴이 걱정스럽게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와 떨어지기가 여느 때 이상으로 내키지 않은 시기였지만, 아드리아나는 괜한 덜미를 잡히지 않도록 혼자 테스카에 남았다.

그렇게 발렌틴과 떨어진 첫째 날.

회의 일정은 그로부터 이틀 뒤부터였고, 아드리아나는 생각난 김에 소니아를 통해 웬디의 소식을 물었다.

웬디는 한 학년을 월반해서 들어가느라 첫 학기는 거의 일주일 내내 학교 활동을 했는데,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는 4월이 지나면 시간 여유가 생길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5월이니 슬슬 한가해질 만도 한데, 요즘엔 도리어 편지마저 줄어 있었다.

“웬디 무슨 대회 나가기로 해서 바쁜가 봐, 오드리.”

“그래요? 수학 경시 대회라면 다른 일정이랑 안 맞아서 안 나간다고 했는데….”

“어, 헤이즐이 그거 아니래. 학생들 전시회에 미술 작품 낸다고 하네.”

“헤이즐 집에 왔어요?”

“응. 웬디도 데려오라니까 그림 때문에 학교에 남는다고 했대.”

“어휴. 우리 웬디가 제일 바쁘네요.”

그간 계속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고 드물게는 통화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드리아나는 가끔은 여동생의 얼굴을 직접 보고 꼭 끌어안아주고도 싶었다. 테스카의 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먹여주고 따뜻하게 재워주고도 싶었다. 웬디네 학교 기숙사도 아주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웬디 보고 싶다.”

아드리아나는 웬디가 너무 어린 나이에 바쁜 일에 매여 마음과 건강을 돌볼 여유가 없지는 않은지 염려하며, 애정을 듬뿍 담은 편지를 보냈다. 어릴 때부터 잘 그렸던 그림을 떠올리며 응원의 말도 담았다.

혼자 자는 첫째 밤부터 너무 힘들었다.

밤이 되니 더욱 힘들어지는 듯했다. 매일 이 시간이 되면 살을 맞대고 곁에 누워 있을 발렌틴의 품이, 그의 체온과 감촉과 다정한 목소리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이는 일 잘 보시고 편안히 잘 주무시고 계실까.’

타지에서 아내도 없이 혼자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그가 가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누가 그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지는 않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사실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져주고 괴롭힘을 당했지, 밖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데도 과도한 걱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부터 종종 그랬듯, 일 때문에 잠깐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도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내가 또 감정적이 되어서 심하게 의존하는 성격이 나오나 봐.’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질책하고 다그치며, 생각을 멈추고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 만에 겨우 잠들고도 새벽에 몇 번이나 깼다. 인기척 없는 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깨어 몽롱한 정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울하고 공허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어릴 적에 아주 멀리 있던 이시스를 그리워하던 그때처럼, 자신은 지금도 지나온 이시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던 이시스를.

어둠이 물러가고 태양 빛이 비추기 시작한 아침,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마음을 어둡게 가라앉히며 드리워져 있던 우울함도 조금 옅어졌다.

아드리아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불을 들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혼자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던 때보다는 덜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이 과정을 이틀 더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여행을 다녀오신 후유증이 크신가 봐요, 마님.”

파리해보이는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보고, 엘레나가 말했다.

“돌아오신 뒤부터 점점 피로해 보이시더니, 지금은 안색이 많이 나빠졌어요.”

“그래?”

실은 아드리아나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몰라도, 몸과 마음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혹시… 회임하신 거 아니에요?”

엘레나가 동그란 눈을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왔다.

“그건 아니야. 얼마 안 되었거든.”

임신 증상이라면 좋겠지만, 달 손님은 성실하게도 때를 맞춰 찾아와 지나간지 2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냥… 투스미아에서 내가 가진 열정을 다 불살라 버렸나 봐.”

아드리아나가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소 격한 그 표현에, 엘레나도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어쩌면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를 보내는 동안에 느꼈던 꿈결 속을 거니는 듯한 행복, 새롭게 채워져 충만했던 에너지가 모두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 시간을 함께 했던 반려자가 곁에 없으니 실제로도 커다란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다.

발렌틴이 이 집안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남편 없이는 솜 빠진 인형처럼 무기력해지기 쉬운 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혐오감까지 끌어들이게 되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남편과 떨어진 지 이틀 만에, 가벼운 여행 후유증으로 여기고 있던 우울증이 심각해졌다.

일상의 모든 게 흐느적대는 듯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엘레나와 일부러 외출해 햇볕을 쪼이고, 로빈과 정원에서 운동도 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해 보아도 초조함이 가라앉지 않았다. 첼로의 활도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스스로 절제도 못하는 못난 사람이 되면 안 돼.’

아드리아나로서도 자신의 불안정해진 감정 상태가 당혹스러웠지만, 그로 인해 하인들을 신경 쓰게 만들거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다였다. 가만히 있으면 온갖 잡생각이 몰려들었고, 그렇다고 일을 할라치면 정신이 산만해서 실수투성이가 되었다.

리노아스 일이 해결되면 야심차게 추진해 보려던 새 계획도 있었는데,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었다. 불안정한 마음 상태는 그때와 비슷하거나, 도리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렇게 셋째 날이 되어, 아드리아나는 후작의 성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글라디스 영부인에게도 미리 방문 예정을 전해두었다.

후작과 영부인이 각기 다른 층에 모여서 방탕하게 외도를 즐겼던 때를 생각하면, 그들과 너무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도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삶을 즐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혐오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조심스러운 거부감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번에도 그런 유흥을 목격하거나 권유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어서 오세요, 웨버 부인. 여행은 잘 다녀오셨나요?”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글라디스 영부인.”

입가에 교양 넘치는 점잖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드리아나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드리아나가 들어서자, 회의 전의 가벼운 연회를 위해 마련된 커다란 응접실 안에, 저마다의 욕망으로 눈을 이글거리는 여성들이 일제히 눈을 돌려 새로운 참가자를 쳐다보았다.

아드리아나는 일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양한 향수 냄새가 짙게 섞여 확 풍겨왔다. 한껏 높인 머리 스타일, 치렁치렁한 귀걸이와 붉은 입술, 화려하고 야한 드레스 차림은 은행 가 뒷골목에서 보았던 마담 바이올렛과 그녀들의 차이를 알지 못하게 했다.

은근하게 치미는 메스꺼움을 억누르고, 뱃속에 굼실거리는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얼굴로 아드리아나는 허리를 펴고 걸었다.

지금까지도 생각보다 잘 해내왔다. 이들과 하루 더 어울리는 일이 어려울 리 없다.

‘여기가 현실이야.’

이시스의 맑은 공기가 간절해졌지만, 다른 상념과 그리움은 잠시 가슴 깊숙한 곳에 접어놓고, 아드리아나는 글라디스 영부인이 가까이에 마련해둔 자리로 갔다.

============================ 작품 후기 ============================

@4부가 완결 맞습니다uu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우리도 휴일 후네요. 활기찬 월요일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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