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허니문, 향수, 우울 =========================================================================
비로소 꿈속에서 보던 낙원에 당도했다.
아드리아나는 활짝 열린 창문 앞으로 다가가, 허리 높이의 창틀을 두 팔로 짚고 섰다. 이른 아침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몸을 감싸며 어제와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듯 느껴지게 했다. 새벽안개가 물러간 후, 이슬을 머금고 햇살에 반짝거리는 숲이 사위 가득 들어찼다.
5월이 된 지금, 이시스에는 늦은 봄이 온 듯 보였다.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의 냄새가 후각을 부드럽게 일깨웠다. 바라보고 있는 바로 앞쪽 땅에는 막 돋아난 연초록 이파리가 깔려 있었고, 멀리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보이는 울창한 숲까지 넓고 평평한 쉼터가 이어졌다.
아드리아나는 이전처럼 멀리서 이시스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나와 꿈에서 보던 것 같은 눈 덮인 산이 아니라 푸른 산이었다.
“…그렇게 창문을 활짝 열고 서 있다가, 산짐승이 들어와서 당신을 물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싱거운 소리를 하며, 발렌틴이 뒤에서 커다란 손을 뻗어 아드리아나의 어깨와 목을 감싸고 끌어안았다. 다시 한 번 그의 뜨거운 피부의 감촉과 살 내음에 취하고 싶어져, 아드리아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벌써 한 마리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발렌틴.”
아드리아나가 미소 지으며 속삭이자, 벌거벗은 채로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발렌틴이 코와 입술을 목덜미에 누르고 킁킁댔다.
“음. 맛있을 것 같아.”
“드시면 안 돼요.”
아드리아나는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손을 뻗어 가볍게 그를 밀어냈다. 힘을 줘도 꿈쩍 않는 튼실한 허벅지를 몇 번 밀어 보다가 곧 포기하고,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살갗을 더듬었다. 어디 간지러워보라고 슬금슬금 만지작거리다가, 팔을 좀 더 뻗어서 높게 올라붙은 단단한 엉덩이 근육을 쓰다듬었다. 그 직후,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에게 포획물처럼 붙잡혀서 침대로 들려갔다.
“안 돼, 내려주세요.”
산짐승처럼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남편의 어깨에서 아드리아나가 웃어댔다. 발렌틴은 무성의한 코웃음소리만 흘릴 뿐, 고분고분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 아침.”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이없는지 멋쩍게 한쪽 입 끝을 올린 채로, 그가 아드리아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몸을 실었다. 탈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잠자리였다.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둘이서만 지내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서로 실컷 희롱했다. 이시스의 별장에 들어온 지 사흘째였다.
바깥의 숲은 가도 가도 온통 짙은 갈색 나무 기둥으로 빽빽했고 뜨거운 빛을 가려주는 푸른 잎으로 시원했다. 아이넨의 도심처럼 먼지로 뒤덮이지 않은 파란 하늘을 보기만 해도 숨통이 트였다.
고작 며칠 만에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는 일조차 까마득해졌다. 두 사람은 밤낮없이 알몸이 되어 사랑을 나누고, 그러다 지치면 부둥켜안은 채로 잠들었다. 눈뜨면 주린 배를 채우고 나서 가까운 숲을 산책하다가, 시선이 마주치고 마음이 동하면 사방이 뚫린 숲속에서라도 입을 맞추고 몸을 연결했다.
“…정말 산짐승이 된 기분이에요.”
아드리아나가 얇은 광목으로 만들어진 이불 천을 몸에 감고 누워서, 가쁜 호흡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체력의 한계를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기절해서 깨어나지도 못했을 터였다.
“이런 걸 원해서 여기 오자고 한 줄 알았는데.”
발렌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드리아나는 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품에 꽉 안아 가두고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신혼여행이 너무 짧았던 것 같지 않소? 겨우 이 정도로 짐승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언제까지가 신혼인가요?”
“글쎄. 최소한 반 년 정도는 식사 중에 갑자기 둘이 사라져도 이해받을 수 있는 기간 아닌가.”
아드리아나는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보다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으니 또 잘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이러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는데 지장은 없을지. 아마 후유증이 대단할 것이다.
“오드리. 당신 배 안 고파?”
“응…. 식사해요, 여보.”
이내 발렌틴이 먼저 몸을 일으키고, 아드리아나도 뒤따라 침대를 내려갔다.
두 사람은 부엌으로 가서 전통방식의 아궁이에 장작을 더 집어넣고, 요리가 든 냄비를 올렸다. 별채에 있는 관리인이 매일 아침마다 들러서 새 요리를 조달해주고 갔다.
향긋한 향신료와 토마토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가 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입맛을 다시며 김이 오르는 냄비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발렌틴이 연기를 마시면 좋지 않다며 식탁 앞으로 보냈다.
“맛있어요, 여보.”
스튜 국물을 떠서 후루룩 소리 내며 맛보고, 아드리아나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인도 없이 자기들끼리 하루를 보내며 음식을 데우고 나눠먹는 일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혼자 살 때는 늘 그렇게 했었지만, 남편과 둘이서 그렇게 하는 건 기분이 아주 묘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향해 미소 지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자상하게 챙겨준 후, 더 살찌워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쯤 다들 와 있을까요?”
식사 후, 먼저 씻고 나온 아드리아나가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오늘 오후에는 바쉬 시내로 가서 식구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발렌틴의 막내 동생 스테판 부부와 제시카를 만나 놀다가 바쉬 성으로 가서 이틀을 묵기로 한 것이다.
마침 오늘 늦게까지 시장을 여는 날이라, 다 같이 만나서 시장을 구경하고 놀 생각에 아드리아나는 아이넨을 떠나오기 전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스테판과 멜리사는 일찍부터 나와서 들쑤시고 다니고 있을 거야. 둘 다 시끄러운 데를 좋아하니까. 제스야 아직 일하고 있겠지.”
발렌틴이 제시카를 애칭인 제스로 부르는 것에도 처음에는 놀랐던 아드리아나였지만,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제시카가 펜의 쌍둥이 누나라는 사실이나, 펜에게 오래된 약혼녀가 있는데 아직 18살이 채 되지 않아 아이넨으로 데려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나, 펜이 제시카와 마찬가지로 아드리아나보다 딱 1살 많은 22살 젊은 청년이라는 사실 따위였다.
“그런데 시장에 가도 당신이 재미있을지 모르겠소. 스테판이랑 제스는 씨름판에 돈 걸 생각으로 열 올리고 있을 게 틀림없거든.”
발렌틴이 어느새 바지와 셔츠를 멀끔히 차려입고 소매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수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왠지 너무나 오랜만인 것 같아서, 아드리아나는 곁눈질로 그를 보며 수줍게 웃었다.
문명인이길 포기한 듯 야만스럽게 뒹굴고 지낸 게 언제 적 일이냐는 듯, 발렌틴은 자못 근엄한 얼굴로 관리인에게서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아드리아나도 자기 말에 올랐다. 산 아래까지 걸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마차가 들어올 만한 길은 따로 없어서 말을 타는 게 편했다.
“시내까지 갈 수 있겠어?”
발렌틴이 돌아보며 물었다.
“네. 전 좋아요.”
아드리아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발렌틴을 따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이렇게 긴 거리를 달려보게 되었다. 온통 커다란 산과 넓은 평원이 펼쳐진 구역을 상쾌하게 달리면, 몸은 조금 지쳐도 정신이 상쾌해졌다. 품종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대자연을 누비고 다니는 놈들이라 말들도 훨씬 기운이 넘치고 생생해보였다.
그리고 굳이 똑같이 분류하자면 조그만 품종에 속하는 아드리아나도 넓은 자연을 누비는 쪽이 행복했다.
40분쯤 지나자, 드디어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벌판 위에 세워진 시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시장 입구의 마구간에다 말을 맡겼다. 아드리아나는 남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화끈화끈해진 자기 엉덩이를 한 번 쓱쓱 문지른 뒤에 남편 손을 잡고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넨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 이곳에는 흔했다. 나이 든 부부, 젊은 부부가 평범하게 손을 잡고 다녔다. 약혼한 연인 정도라면 부부가 아니어도 사람들 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손을 잡은 발렌틴을 올려다보고는, 엘레나에게 혼났던 일을 떠올리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길을 걸으며 아드리아나가 커다란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흘끔거리는 것만큼이나, 그들도 아드리아나를 흘끔댔다. 혼자만 외모가 너무 튀는 것 같아서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 옅은 금발을 감추고 있었는데도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들과 차이가 심한 눈동자 색이나 작은 키까지는 감추기가 어려웠다.
“혹시 로레인 수녀님이 여길 지나다니실 때에도 저렇게 다들 쳐다보나요?”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의 팔에 바짝 붙어서 걸으며 물었다. 로레인은 외모에 있어서 형제 중 가장 아이넨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키가 아드리아나보다도 더 작았다.
발렌틴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로레인이 눈 부릅뜨고 ‘뭘 보냐, 눈 깔아라.’ 몇 번 한 후로는 아무도 안 쳐다봐.”
아드리아나는 한순간 자기도 그렇게 해볼까 고민하다 금방 생각을 접었다. 로레인만큼 까랑까랑한 목소리를 낼 자신도 없었고, 남편에게 그런 거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시장은 빈 벌판 위에다 장사판을 만든 것이었는데, 넓은 통로를 확보하며 양쪽으로 마주보게 가판을 세워둔 길이 여러 갈래 늘어서 있었다. 투박한 나무 테이블 위에 쌓인 물건들을 신기해하며 구경하다가, 아드리아나는 이윽고 다른 상점거리와 교차하는 넓은 터에 들어섰다.
작은 광장처럼 둥그렇게 둘러쳐진 구역 안은 모래 바닥이었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는 유난히 몸이 좋아 보이는 사내들이 눈에 띄었다. 치안관으로 보이는 남자들도 몇 명이나 모여 있었다.
이곳이 발렌틴이 말한 ‘씨름판’인가 보다 하고 아드리아나가 천진하게 눈을 빛냈다.
“여보, 여기서 씨름을 하나요?”
“응. 이리 와.”
발렌틴이 두리번거리더니 빈 의자를 찾아 자리를 치우고 아드리아나를 앉혀주었다.
그때 부부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이, 발렌틴!”
한 사내가 부르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쭉 따라 몰려들었다. 바쉬의 영주 손자로서 발렌틴의 얼굴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두가 그를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두리번거리며 쳐다보는 이들 가운데에서, 발렌틴을 부른 사내와 그의 패거리들이 의자 주변을 둘러쌌다.
“이야, 자네도 보러 왔구먼! 역시!”
“여기서 동생들을 만나기로 했네. 그런데 자네들은 왜 여기 있나?”
발렌틴도 반색하며 손을 내밀어 그들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점잖고 교양 있는 신사가 아니라 철없는 청년처럼 거칠게 변하는 표정이, 아드리아나로 하여금 그들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사내들 중 얼굴이 제일 우락부락한 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요즘 공작님 성에서 일하네. 그나저나 진짜 오랜만이군. 이 친구들은 다들 자네 결혼식에 갔다 왔다는데 난 마누라가 애 낳는 걸 보느라고 가질 못했어. 10시간 넘게 진통했지.”
“고생이 심했겠더군. 소식은 들었네. 자네 닮은 딸이 나왔어야 했는데 아들을 낳았다며.”
“그러는 자네나 자기 얼굴 같이 예쁘장한 딸 낳으시게.”
사내의 말에 발렌틴이 웃는 낯으로 그의 손을 꾹 쥐었다. 그는 쥐어 짜인 손을 문지르며 ‘성질도 더러워가지고 분에 넘치게 남쪽 왕국 공주님을 신부로 얻었다’며 큰소리로 구시렁댔다.
그 말에 발렌틴이 마지못한 듯 아드리아나를 소개해주자 사방에서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다. 코니스 공주님 어쩌고 하며 낯부끄러운 칭송을 늘어놓는 사내들 틈에서,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테스카의 사교에서 간신배 같은 부인들에게 들어온 아첨과 찬양의 말 덕분에 꽤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수양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지나는 이들이 존경어린 눈빛으로 발렌틴을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자,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콧방귀를 뀌었다.
“무식한 인간들이라 다들 모르나본데, 얌전한 숙녀들은 의외로 발렌틴 같이 예쁘장하고 잔재주 많은 남자한테 잘 넘어가는 법이야. 맨손으로 곰을 잡아 바칠 사내다운 사내보다는 검 꼬챙이를 들고 다른 남자들을 쿡쿡 잘 찌르는 남자를 더 좋아한다고.”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친구가 발렌틴의 어깨를 팔을 얹었다.
“알만 하군, 자네. 아마 그밖에도 게임 내기에 데려가서 돈도 왕창 따 보였을 테고, 잘생긴 거시기를 보여주면서 시집오라고 청혼했을 거야. 지금도 잘생겼는지는 몰라도.”
“그런 짓 한 적 없어, 변태 야만놈들아.”
발렌틴이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막으려 내뱉었다. 그는 아드리아나의 곁에 서서 인상을 구긴 채로 혼자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아드리아나는 아까부터 웃음이 폭발해서 얼굴을 두 손바닥 안에 숨기고 몸을 떨고 있었다. 자칫 오해를 받을 타이밍이었다.
“뭐에 웃으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소, 부인?”
발렌틴이 눈썹을 움찔하며 묻기에, 아드리아나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여보.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꾸 당신더러 예쁘장하대서….”
“멀쩡한 사람들이 아니라 저 놈들만 그래요.”
발렌틴이 울화를 억누르는 듯 자상하게 말하더니, 난데없이 자기 겉옷을 벗어서 아드리아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열불이 나느라 더워서인지, 아드리아나를 그들에게서 안 보이게 감추고 싶은 건지 몰랐다.
“여보, 혹시 저분들이 어릴 적에 당신이랑 바다에서 헤엄치고 놀았다는 친구들이신가요?”
“어떻게 알았소?”
아드리아나는 결혼 전 그에게서 들었던, 그가 투스미아의 바다에서 친구들끼리 놀 때에는 남세스러운 수영복을 입는 대신 벌거벗고 헤엄쳤다던 이야기 때문이라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사실을 말하면 발렌틴의 기분이 더 나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짓궂은 발언이 수위를 넘으면, 발렌틴은 나직이 ‘짜증나’ 라거나 ‘그만 꺼져줘’ 따위의 상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뇌까렸다. 아드리아나는 남편의 처음 보는 모습에 웃고 즐거워하다 원망을 들으면서도 그의 팔에 매달려서 싱글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친구들 앞에서 품위를 잃는 모습마저 가슴을 들뜨게 했다. 아마 이곳이 아드리아나의 눈에 낯선 향수와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리라.
얼마지 않아, 사람들이 편을 가르고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나무 탁자 위에 장부와 바구니 따위가 등장했다. 그리고 돈이 오갔다.
스테판 부부와 제시카가 나타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형님! 형수님!”
로레인처럼 목소리가 큰 스테판이 발렌틴을 덥석 끌어안고 나서 아드리아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드리아나는 악수 후에 그의 아내 멜리사와도 포옹을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제시카를 끌어안았을 때에는, 그녀가 두 손으로 아드리아나의 볼을 잡고 커다랗게 쪽 소리 내며 입술에 뽀뽀해서 스테판을 비명 지르게 했다.
“위험한 거 아닙니까? 남의 여자한테 저래도 됩니까, 형님?”
“나도 남의 여자거든.”
제시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여자 친구끼리 우정의 입술박치기였을 뿐이었다고 말하자, 발렌틴도 무심한 얼굴로 ‘오드리는 여색 취미가 없으니까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할 거야’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카가 아드리아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말했다.
“결혼해서 재미 좋냐.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사는지 얼굴에 애교가 철철 넘치네. 네가 밝아진 거 보니까 내가 다 흐뭇하다.”
아드리아나는 제시카가 말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우린 잘 지내고 있어요. 아까 제시카도 남의 여자라고 하던데 연인이 생긴 건가요?”
“아니. 뭐, 나도 임자가 있긴 있겠지 싶어서 해본 말이야. 근데 이 세계에 태어나긴 했는지 모르겠다.”
제시카는 바보 거인들이 진절머리 나서 아이넨에 일을 구하려고 치안대 시험을 봐왔는데,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쉽지 않아 포기하고 투스미아로 돌아와 바쉬 성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바쉬에 있다고 하니, 아드리아나는 앞으로 시댁에 놀러오는 일이 더 기다려질 것 같았다.
잠시 후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씨름’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임시 경기장 주변이 더 북적북적해졌다. 참가자들도 구경꾼들과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지만, 눈은 승부욕에 불타 긴장시키고 있음이 역력했다. 마주보고 늘어선 두 팀이 정정당당한 시합을 다짐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호각이 울림과 동시에 서로 돌진하며 거세게 맞부딪쳤다.
열기 띤 함성과 함께, 땅울림과 모래 먼지가 일었다.
시장의 ‘씨름’이라는 것은, 아드리아나가 알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개로 편을 가른 다수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아무나 붙잡고 맨손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거의 난투에 가까운 것이었다. 모래 바닥 위에서 2m 안팎의 사내 8명이 섞여 엎치락뒤치락대며 땅이 연신 쿵쿵 울렸다.
다들 목을 빼고 일어서서 돈을 건 쪽을 응원하는 데 소리를 높이는 동안,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아 선수들과 구경꾼들을 구경했다.
아까 시합 전, 어느 쪽에 걸겠냐는 말에 발렌틴은 노름을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 그랬냐는 원성이 터졌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원래부터 술도 도박도 여자도 멀리하며 ‘사내가 중독되기 쉬운 유혹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줄 알았지만, 가만 보면 미심쩍은 데가 한둘이 아니었다. 일 때문에 아주 드물게라고는 해도, 바로 얼마 전에 그가 흡연하는 장면도 보았던 아드리아나였다.
아드리아나가 남편을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당신이 내기 말고 또 뭐에 빠져 사셨는지, 이따가 스테판에게 좀 물어봐야겠어요.”
발렌틴은 슬그머니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한 때는 내기도 즐긴 게 사실이지만 빠져 살지는 않았어, 여보. 그리고 스테판보다는 펜이 더 많이 알아.”
그는 친절하게도 그렇게 일러주었다. 아무튼 정색하고 감출만한 일은 없는 건가, 하고 아드리아나는 금세 시선을 부드럽게 하며 발렌틴에게 다시 몸을 기댔다.
한 시간 가까운 시합 시간이 종료되고, 씨름판 위의 투사들을 향한 환호와 장난스러운 야유가 퍼졌다. 제시카와 스테판 부부는 각각 다른 쪽에 걸었고, 승리는 제시카에게 돌아갔다.
“너네는 만날 잃고 더럽게 못 따면서, 내기만 하면 빠지지를 않더라. 중독 아니냐? 차라리 스테판을 선수로 내보내는 게 낫겠어.”
제시카는 부부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달래줬다.
그 후 일행은 출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시장을 구경하며 지났다. 한쪽에서 사내들 간에 다툼이 생겨 치안관들이 살벌하게 떼어놓는 모습도 보였다. 사람도 많은 대낮에 길에서 엉겨 붙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아드리아나는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제시카가 피식 웃었다.
“새댁은 안 위험해. 남편이랑 있는 여자는 아무도 안 건드려. 무식한 놈들이라 비슷비슷한 놈들이 별것도 아닌 일로 주먹을 휘둘러서 그래. 누가 먹을 거 하나 더 먹었냐, 그딴 걸로 싸운다니까.”
“너도 그러잖아, 제스. 전과가 그렇게 많으면서 치안관 시험을 본다고 할 때부터 내가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스테판이 해맑게 말하자, 제시카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를 향해 흰자위를 드러냈다. 싸우려면 2대 1로 싸워야 할 거라는 멜리사의 도발적인 웃음소리에, 제시카는 ‘콩알만 한 계집애가 끼면 어떻게 싸우냐’며 인상을 찌푸리고 눈길을 거두었다.
시끄럽고 정신이 없는데도, 버클리의 일로 내심 지쳐있던 마음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일지도 몰랐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발렌틴과 이시스 숲속의 별장에서 뒹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투스미아의 친구들은 기운이 넘치고 밝았다. 그들의 체격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이유로, 아드리아나의 눈에는 그들이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 작품 후기 ============================
*4부 목차 예정(임시): 허니문, 향수, 우울/ 새로운 세력가들/ 결실/ 마티아스의 앵무새
*제스는 영화 핫칙의 여주가 친구들에게 제스로 불리는 걸 보고서 오 괜찮다 하고 결정한 이름인데, 덕분에 얘만 나오면 자꾸 그 영화의 주연 아저씨(제시카 몸에 빙의된 역) 얼굴이 생각나서 괴롭네요. 얼굴에 털이 많았던 그 아저씨...;ㅅ;
*목차는 4부 구상하던 걸 적어본 거라 대강 그런 흐름이라고만 참고해 주세용. 하루 쉬고 왔으니 다시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