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9 3부完 - 비밀2 (발렌틴) =========================================================================
바쉬 공작은 그의 체격에 적합하지 않은 실내 공간과 가구들이 편치 않다는 말 대신,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으니 넓은 회랑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남작 부부는 무척이나 송구스러워하며 머리를 조아리고서 공작의 걸음을 뒤따랐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하께서 엊그제 국왕 전하의 손님으로 입국하셨다가, 오늘 제 일정을 들으시고는 아내의 본가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급작스럽지만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발렌틴의 말에 남작이 경직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공작을 향해 말했다.
“황송합니다. 공작 저하를 이렇게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남작은 마치 죄 지은 신하처럼 두려워하는 태도로 손님들을 대했다. 그는 공작의 거대한 몸을 두려움과 경외감이 담긴 눈으로 우러러 보았고, 공작가의 일원이면서 ‘상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온’ 사위와 눈이 마주칠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드러냈다.
아마 그는 속으로 딸에게 ‘잘난 점이라고는 재산밖에 내세울 게 없을 품위 없고 천한 노동자 남편은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던 말을 내심 후회하고 있으리라. 그 말이 발렌틴의 귀에도 들어왔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테니. 그가 발렌틴과 눈을 길게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니 더욱 확신이 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내를 두려워 떨게 하고 마음 다치게 했던 남자들은, 발렌틴이 보기에는 한없이 작고 약한 남자들에 불과했다. 남작이야 ‘아버지’라는,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지위를 가졌다고 하지만.
아무튼 남작이 버클리처럼 말도 안 통하는 철면피는 아닌 듯 보여 시름이 덜어졌다. 스콰이어 공작가의 개망나니 다섯째 아들 따위를 사위로 삼으려 했던 일이나 아드리아나를 억압했던 일이나, 리노아스 환경과 그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아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아버지인 사람이니 좋은 쪽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다면 좋게 생각하고 싶었다.
한편, 남작과 달리 클로제 부인은 이미 품고 있던 호감을 바탕으로 발렌틴과 그 일가를 공손하고도 따뜻하게 대했다. 그녀는 웨버 가에 아드리아나를 거두어준 일을 거듭 감사했다. 아무래도 아드리아나의 순진무구한 기질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천성인 면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는 아주 좋은 여자요. 영부인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 안목이 훌륭한 사람이라, 난 가문에 사람을 들일 때는 반드시 영부인의 의견을 듣소.”
공작의 칭찬에, 클로제 부인이 감격에 겨워하며 미소 지었다. ‘오드리’라는 이름이 생소한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연신 눈을 깜박였다.
“아내의 애칭입니다, 장모님.”
발렌틴이 얼른 해명하자, 클로제 부인은 딸에게 애칭이 있다는 사실에도 기뻐했다. 또한 그녀는 발렌틴이 ‘장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뭔가 남세스러운 듯 부끄러워하며 웃기도 했다.
“귀여운 애칭이네요. 우린 아드리아나라고만 불렀는데…. 그렇죠, 여보?”
클로제 부인이 동의를 구하며 남편을 쳐다보자, 남작은 뻣뻣한 얼굴 근육을 당기며 미소 짓고 ‘예.’하고 겨우 대답했다. 대신 공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영문 모를 위엄이 담긴 목소리로 ‘우린 모두 오드리라고 부른다오. 우린 긴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하고 끼어들었다.
“전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게 본명인 줄 알았습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더군요. 자기 친구들에게도 어지간히 귀여움을 받는 사람이지요.”
남작 부부가 너무 긴장하고 있어, 발렌틴이 편안하게 해주려 친근하게 말을 건네자, 클로제 부인은 ‘그 애의 친구들….’하고 또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해했다.
그 후 공작이 선약을 위해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클로제 부인은 수도에 상경해 처음으로 왕자님을 만난 시골 소녀처럼 눈을 반짝거렸고, 남작은 몇 번 입을 벙끗하다 말았다. 그가 아는 예절이 공작을 대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아서 더욱 곤혹스러워하는 듯했다.
아드리아나가 아버지에게 받은 설움을 알고 있던 발렌틴으로서는 장인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았으나, 자신들을 너무나도 어려워하는 그 모습에 연민이 일 지경이었다.
“…실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서둘러 뵙고자 하였습니다.”
공작을 배웅 한 후, 발렌틴이 본 용건을 꺼냈다. 남작 부부도 예상하고 있던 전개였을 터, 숙연해 보이는 얼굴로 조용히 하인들을 물렸다.
“어제… 웨버 경이 우리 아드리아나를 데리러 와줬다고 들었어요.”
클로제 부인의 말에, 발렌틴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발렌틴은 앞으로 아드리아나를 위해서 해주어야 할 일에 대해 협조를 구했다. 남작에게는 영주의 이름으로 제롬 버클리를 탄원하되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해야 할 것이며, 버클리가 불복하여 맞대응할 시 어떤 식으로 대처할 것이라는 계획과, 이를 위해 남작 가에서 말을 맞출 수 있도록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사항들을 일러주었다.
남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위를 볼 면목이 없소. 딸애를 잘 돌보지 못한 우리 탓이오. 아드리아나의 출생 예언이 워낙 흉악한 놈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딸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 했소만, 아드리아나가 경을 남편으로 얻은 것은 아주 특별한 행운이고, 우리가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느긋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소.”
그의 말에 발렌틴은 이해한다는 듯 끄덕여주면서도, 조금 다른 견해를 들려주었다.
“제 고국에서는 왕가 또는 일부 공작가에서나 그걸 듣습니다. 왕실 점술가가 계속해서 운명이 바뀌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조언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여야 도움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애초에 후계자로 만들 자식과 아닌 자식을 솎아내서 버리기 위한 용도로 시작인 예언인데, 남작께서는 제 아내를 버릴 작정이 아니셨지 않습니까.”
흉한 점괘가 나왔다고 남작이 딸을 버린 게 아니라 17년간 지키고 키운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했고 잘못된 방법으로 지켰지만, 만일 남작이 딸을 갓난아이일 때 버렸더라면, 그녀가 잘 자라서 발렌틴에게 무사히 와주었을지는 미지수다.
남작은 대답을 잇지 못하고, 무거운 한숨을 쉬며 하염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후 발렌틴은 남작 부부와 아내에 관한 지극히 일상적인 안부를 들려주며 시간을 조금 보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사실은 제가 오늘 아내 몰래 나왔습니다. 어제… 그런 일도 있었는데 저 혼자 부모님을 찾아뵈었다고 하면 걱정할 듯해서 아직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는 모른 척 해주십시오.”
조금 멋쩍어하며 말하자, 클로제 부인은 또다시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들이 현명하게 딸을 기르지 못해 누를 끼치게 되었다며 거듭 사과했다.
발렌틴이 조만간 아내와 함께 오겠다며 ‘장인어른, 장모님.’ 하고 바른 자세로 목례하자, 남작 부부가 비로소 그렇게 해달라고 입을 모아 인사했다.
“어떠셨습니까?”
차에 타자, 펜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냥…. 평범한 부모이셨네.”
발렌틴의 말에, 펜이 씩 웃었다. 아드리아나를 자식으로서 아끼지도 않고 두고두고 괴롭힐 만한 악질이면 어쩌나, 걱정하던 주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오니 5시가 넘어 있었다. 발렌틴은 밥시간에 늦지 않도록 귀가하는 일만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내 옆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남편의 임무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현관문이 열리고 아드리아나와 로빈이 반기며 마중을 나왔다. 발렌틴이 사랑하는 뽀얗고 귀여운 그 둘이 같이 나와 맞이해주는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하고 가슴 뿌듯하게 느꼈다.
“여보…”
아드리아나가 조금 쭈뼛거리며 미소 짓는 얼굴로 다가왔다. 작은 입술이 움직이며 다녀오셨냐는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발렌틴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개었다.
괜찮은 척, 기분 좋은 척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안겨오는 아내를 보니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
창문을 가린 커튼을 아주 살짝만 젖혀서 부드러운 달빛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벗은 상체에 선선한 저녁 바람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 테라스의 좁은 벤치에서 막 아내의 몸 안에 들어가기까지 했다가 물러나 침실로 온 참이었다. 바지 안에다 억지로 쑤셔 넣기에는 앞이 너무 난폭해져 있어서 바지를 채 여미지도 못했다.
발렌틴은 몸을 돌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벗겨놓아 나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앞을 가리고 있었지만, 숨이 가쁜 듯 어깨를 들먹이는 모습에서 어서 사랑을 나누고 싶어 안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조금 심술을 부려 기다리게 내버려두고,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이 몸매를 따라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모양새를 눈으로 훑었다. 몸집에 비해 약간 큰 유방이 보기 좋을 정도로 봉긋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양쪽의 정점은 훨씬 아까부터 뾰족하게 일어서 있을 터였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열일곱 소녀 때처럼 순결해 보였고, 그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발렌틴은 자신이 그녀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더 아름다워졌기 때문에 이토록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발렌틴이 바지와 속옷을 마저 벗었다. 달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아드리아나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흥분한 눈을 반짝이며 남편이 옷을 벗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상기되어 붉어진 뺨과 입술이 무척 아름다웠다. 조신하게만 보이는 작은 그 입술이 조금 전까지 자신의 남성을 가득 머금고 능란하게 애무해 사정하게 한 일이 꿈같았다.
발렌틴은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손으로 허리 뒤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겹치고 비볐다. 이내 그녀가 흘려보낸 한숨 소리를, 보드라운 입술째로 자신의 입 안에 집어삼켰다. 두 손으로 탐스러운 젖가슴을 그러쥐며 손 안에 취해보고, 상체를 숙여 입에 머금고 빨았다. 그러다 그녀가 초조하게 신음을 흘리는 것을 듣고, 흡족해하며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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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마저 채우고 꿈나라로 갑니다. 좋은 꿈 꾸세요.uup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