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3부完 - 비밀2 (발렌틴) =========================================================================
테스카로 돌아와 차가 멈추었을 때에도 아드리아나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기절한 듯 고개를 불편하게 꺾은 자세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그녀를 살짝 깨워보았다가, 발렌틴은 이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들고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그녀의 곁에 앉아서, 약간 부은 듯 보이는 뺨 위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흙투성이인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이불 위에 납작 붙어 있는 등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을 때에, 이 작은 등이 얼마나 애처로워보였던지.
겁 없이 혼자 쳐들어갈 곳이 아니었다. 물론 거느리고 갔던 경호원과 하녀를 믿었던 거겠지만.
옷을 벗기자, 아드리아나는 외출복 안에 입었던 속 드레스 차림으로 등을 보이고 웅크리며 돌아누웠다. 그러는 사이에 따뜻한 물수건을 만들어온 엘레나가 노크했고, 발렌틴은 뒤로 물러나서 잠시 기다렸다. 엘레나는 아드리아나의 얼굴과 팔다리를 닦아주고 금방 방을 나갔다.
발렌틴은 다시 아드리아나의 곁에 앉아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서 펴준 후, 그녀의 등 뒤에 몸을 누이고 따끈따끈하게 열이 올라 있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얼린은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왕을 사랑하면 왕비가 되고, 포주를 사랑하면 창부가 될 것 같은 아가씨였습니다.”
발렌틴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토록 남편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할 여성이라는 뜻인가?”
얼린은 드물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리고 그 말 또한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왕비도 될 수 있는 여성이라면, 창부 밖에 될 길이 없는 여성이 아니라면, 그걸로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어쨌든 발렌틴은 그때도 이미 아드리아나를 자기 여자라고 확신하고 눈이 멀어있던 상태였다.
“으….”
아드리아나가 작게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발렌틴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숨소리가 편안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얼마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발렌틴은 몸을 일으켜서 방을 나왔다.
2층 계단 앞을 서성대던 플레밍이 방을 나오는 발렌틴에게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식사도 하셔야 할 텐데요, 주인님.”
“음.”
아무래도 아드리아나는 자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 듯해, 발렌틴은 플레밍을 따라 혼자서 1층으로 내려갔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음식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발렌틴은 식사를 채 끝내기도 전에 지치고 멍해져서 한동안 식탁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음행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발렌틴은 아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을 귀로 듣고, 그 짓을 했을 남자를 바로 앞에서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 자리에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연상되려는 장면에 한순간 마음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아내가 이미 쓰러질 듯 떨며 오열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경황이 없었던 것뿐.
그렇다고 무슨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쳐온 것도 아니었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알아냈던 사실들을 토대로 추측한, 거의 그대로에 불과했다. 아드리아나에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을 드나들며 지내온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오히려 남작가 내에서만 쉬쉬되며 알려지다 만 비밀스러운 추문의 전말은 필시 그렇고 그런 뻔한 일이리라 생각되었고, 이제 알게 된 바 역시 짐작을 재확인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직면하게 되니, 잘 정리해서 봉인해두었던 흉기들이 도로 뛰쳐나와 가슴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아내는 나쁘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가치관을 가진 남자로서 겨우 애써 포용해줄 수 있는 범위였지만, 어쨌든 포용하기로 한 이상 그 일을 두고 괴로워해서는 안 되었다. 그간 아내가 죄도 없이 얼마나 자신의 눈치를 봐왔던가. 발렌틴은 이번 일로 힘들어하는 내색을 했다가는 그녀가 상처받고 겁먹으며 숨어버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숨어버리면, 자신은 그때야말로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얻게 될 터였다.
교회에서 버클리와 있던 모습을 자신에게 들키고 놀라서 떨며 미안하다고 빌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자신의 괴로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다.
‘쓸데없이 다 이해하기로 했느니 그런 말은 않는 게 나아. 의식하지도 않는 척 하면 오드리도 금방 잊어버리겠지.’
다행히도 발렌틴이 태연한 척 웃고 달래주면, 아드리아나는 조금 눈치를 보면서도 안심하고 기대며 매달렸다. 그녀의 그런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 되었다. 평생을 지켜주기로 한 아내다. 처음부터 포용하기로 한 일로 그녀의 일로 이렇게….
발렌틴은 자기 자신을 세뇌하며 앉아 있다가, 시계가 어느덧 8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영감님처럼 몇 시간을 내내 앉아 있었구먼.”
바깥바람을 쐬러 정원에 나와 손을 내밀자, 로빈이 반기며 뛰어왔다.
아내가 귀여워하는 강아지. 발칙하게도,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맘에 들어 하는 게 틀림없는 남자 배우의 역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순애보와 수호기사 같은 점이 낭만적이라고 동경하면서도 그의 가슴털과 몸은 영 받아들이기 어렵다니, 비슷한 조건을 가진 발렌틴으로서는 웃을 수도 없었다.
“내일 집 좀 잘 지켜라, 로빈.”
목과 등을 거칠게 쓸어주자 로빈이 입을 헤 벌리고 기뻐했다. 로빈은 눈처럼 뽀얀 털에 순진하게 생긴 눈망울 같은 생김새가 아내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강아지인데, 그 점이 둘이 닮기도 했다. 아무나 잘 따르던 녀석이라 이제부터 우리가 주인이라고 잡아 데려올 때에도 의심 없이 따르고 순종했는데, 희한하게도 발렌틴 부부가 없는 사이에는 아무리 불러대도 들은 척도 않고 제 집으로 쏙 들어간다고 친구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 점조차 아내와 성질이 비슷했다.
덜컥 청혼했더니 네, 알겠다고 덥석 시집온 아드리아나를 생각하면, 자신이 상대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자신하는 한편 웃음도 나왔다.
발렌틴은 잠시 로빈과 놀아주고 있다가, 아드리아나가 리노아스 집을 박차고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테스카의 웨버입니다.”
전화를 받은 바르테즈에게, 발렌틴은 아드리아나가 무사히 집에 잘 들어왔으며 수일 내에 찾아뵙고 싶다고 말을 전하고 끊었다.
그 후 10분도 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발렌틴은 다음날 오전에 리노아스를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문간에 서서, 어두운 방 안에 아드리아나가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내일은 집에 있으라고 당부해놓고 혼자 리노아스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내버려두고 가기는 영 안쓰러웠지만, 그녀의 부모와 전화상으로 먼저 인사를 나눈 이상, 예를 갖춰 얼굴을 보이고 오는 것도 미루지 말 일이었다.
“여보.”
다가가서 조그맣게 속삭여봐도 아드리아나는 깰 기미가 없었다. 조금 예뻐해 주고 다시 재울까 했지만, 얼굴을 살짝 만져 봐도 모르는 걸 보아 틀린 일 같았다.
발렌틴은 도로 밖으로 나와서 로빈을 목욕시키고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쪽지를 썼다. 아침에 외출하게 되면, 혼자 남겨질 아내 곁에 강아지를 두고 갈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여보’로 시작해서 로빈을 씻겼다고 자랑스레 적은 편지를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발렌틴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았다.
*
새벽에 또 전화벨이 울렸다.
희미한 소리가 1층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군가 전화를 받았는지 곧 조용해지기에 발렌틴은 다시 잠이 들려다가 얼마 못 가 또 깨어나야 했다.
“주인님, 기침 하셨습니까?”
조금 늦게까지 누워서 아드리아나가 깨기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플레밍이 문을 노크하기에 도리 없이 일어났다. 어지간해서는 침실을 노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리노아스에서 다시 연락이라도 온 것인지도 몰라, 발렌틴은 굳은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플레밍은 통화 내용을 들려주며 곤혹스러워했다. 듣는 발렌틴도 그랬다.
“겹겹이 정말 미치겠군.”
발렌틴은 예정보다 조금 서둘러서 외출 준비를 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전화를 건 사람의 마차가 이미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저하, 어디서 전화를 하셨습니까?”
“오다보니 길거리에 전화기가 있기에, 거기서 전화를 하게 했네.”
마차 안에, 바쉬 공작이 못마땅해 죽겠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 수염을 씰룩거리고 앉아 있었다.
“나를 집에도 못 들어오게 하다니 이 무슨 고약한 불충인가?”
“송구합니다, 저하. 아내가 많이 아픕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밑에서 웅성거리면 힘들어 할 겁니다.”
“어흠! 내 부하들은 풋내기가 아니야. 없는 듯이 있을 수도 있네.”
공작이 불쾌해하며 내뱉더니, 곧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많이 아픈가.’하고 나직이 덧붙였다. 발렌틴이 너무 가슴이 아픈 나머지 말도 못하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자, 공작의 얼굴도 그와 거의 비슷하게 변했다.
잠시 후 마차가 리노아스를 향해 출발했다. 공작이 끌고 온 두 대의 마차와, 펜이 모는 리무진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 연약한 존재는 아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줘야 하는 법이네. 혹시 그대가 배려도 없이 무리하게 다루는 게 아닌가?”
“어제 아내가 고향에 갔다가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 옛 지인을 만났다가 괴롭힘을 당한 모양인데, 누구와 싸워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충격이 컸나 봅니다.”
“어디의 간 빠져나온 자가…. 뒤처리는 어찌 했나?”
“저하. 지금은 사람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으흠!”
“아무튼 리노아스에 가셔서도 모르는 척 해주십시오. 아내도 어쩌면 어제 일을 제가 알까 봐 벌벌 떨다 병이 난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공작은 수심 깊은 얼굴로 한숨만 쉬는 발렌틴을 보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침통한 목소리로 ‘그런 가엾은….’하고 중얼거렸다.
행렬은 대단한 장관을 이뤘다. 특별히 사이즈를 높게 제작한 고급 마차 두 대와 리노아스에는 좀처럼 나타나는 일 없는 자동차까지 줄지어서 영지 안으로 들어서자, 꽤 멀리서까지 영지민들이 내다보며 웅성거렸다.
남작 부부가 얼마나 불편해 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리노아스의 어른들을 자기도 봐야겠노라는 공작에게 거절의 말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리노아스에는 이미 사위로서 상당한 결례를 범하고 인사드리러 가는데다, 정말 이상한 일행까지 붙이고 가게 되었으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댁 어른을 모시고 간다고 알리면 부담스러워하며 기다릴 것 같아, 차라리 오다가 만났다고 할 셈으로 발렌틴은 따로 연락을 넣지 않았다.
“어험! 다들 기척을 죽여라.”
마차가 서고 일행이 우르르 내렸을 때 공작이 명령했다. 그 즉시 부하들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거구의 공작과 고만고만한 덩치의 사내들이 소리 내지 않고 사뿐사뿐 조용히 움직이는 모습도, 어떤 의미로는 무서운 광경이었다.
“저하, 지금 우리는 리노아스를 치러 가는 게 아닙니다. 앞에다 떡하니 시커먼 마차와 자동차를 세워놓고, 발소리를 죽여서 접근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오는지도 몰랐다가 얼굴 보고 기겁할 겁니다.”
“예의를 차리는 거네. 망할 나라 예법이 보통 까다로워야지.”
일행을 안내하는 리노아스의 하인은 손님들을 무례하게 힐끔대지 않으려 부단한 애를 쓰는 게 눈에 보였다. 목에 기브스를 한 듯 힘을 주고 걷다가 실내까지 안내를 하고 돌아간 뒤에는 어깨가 결릴 판이었다.
“이 몸은 발렌틴 웨버의 할아비 되는 자이올시다.”
공작이 묘한 아이넨 억양과 말투로 친히 자기소개를 했다. 스스로 이름을 밝히는 일까지는 익숙하지 않은 위인인 만큼, 뒷마무리는 발렌틴의 몫이었다.
“캘러반 루미아, 바쉬의 공작님이십니다.”
얼핏 침울하게 들릴 만큼 나직한 발렌틴의 목소리에, 남작 부부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바로 전날의 일 때문에 사위 얼굴 보는 일에 다소 민망함을 느끼며 긴장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갑작스런 불청객인 공작의 거구를 올려다보느라 홉뜨고 있던 눈에 의심의 빛까지 더해졌다.
“…예?”
클로제 부인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감탄사처럼 내뱉었다. 그들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며 정렬하고 있던 하인들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사실 공작 일행이 들어선 시점부터 그들의 얼굴은 서서히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허험! 하고 공작의 습관 같은 헛기침 소리가 성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본인은 너무 과도하게 놀라는 남작 부부의 대우가 어색해서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한 일이겠지만, 기침 소리에 실내의 생명체란 생명체는 전부 다 굳어 섰다.
“저, 그럼 어디서 말씀을 나누시는 게 편하시겠습니까?”
정적을 깬 것은 발렌틴이었다. 크나큰 당혹감으로 안내하는 일마저 잠시 잊어버린 성의 주인들 대신, 그가 하인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사람들을 끌고 갔다.
한숨이 나왔다. 당초의 계획은 혼자 조용히 찾아와 처가 어른들에게 사위의 위엄과 다정함을 동시에 보여주어서 점수를 따고 지난 시간 그들이 느꼈을 서운함을 만회할 셈이었는데, 이래서야 외조부의 하인 노릇이나 하다가 돌아가게 생겼다고.
============================ 작품 후기 ============================
ㄲ ㅏ ㄲ ㅏ!! 이렇게 많은 분들이 챙겨주시다니ㅜㅜ(카트 끌고 2마트로 달려간다)
선추코평쿠 흔적 남겨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정성스런 장코에도 늘 감동하고 이써요ㅜㅜs2 내일 또 뵈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