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해갈 =========================================================================
※96편과 97편을 연이어서 올립니다. 이어보시는 경우 이번 편만 보시면 내용이 누락될 수 있습니다.
***
“괜한 책을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신부님.”
버클리는 아드리아나를 조금 책망하는 말을 했다가, 즉시 그녀의 변호사에게 경고를 듣고 자신의 변호사에게까지 주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이내 버클리는 그 방을 뛰쳐나왔다.
교회에서는 주임직을 빼앗을 터였다. 어디 주임직뿐만이랴. 이제 그들은 버클리에게 독립적으로 가정생활의 풍요를 누리며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자리는 주지 않으려 할 것이고, 성직의 멍에를 내려놓든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속죄하며 살든지 하는 식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도 있다.
집안에서도 난리가 날 것이다. 고결하고 명예로운 성직자로 자자했던 버클리 가의 이름에 오물을 끼얹은 셈이니.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버클리에게 성직자가 되는 길 외에는 신분을 높일 길이 없었다. 아내는 귀족 가의 여식이지만, 작위는 얻지 못했다. 교사나 교수 따위보다는, 귀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 성직자로 사는 편이 명예로운 게 당연했다.
리노아스에서 인정한 새 교회의 주임 신부가 되면, 남작과도 거의 대등한 신분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자리가 거의 다 잡힐 듯 손끝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랬는데.
“여보, 이럴 게 아니라 남작님께 다시 간청해 보세요. 그분께 용서를 빌어 봐요.”
“다 끝났어. 클로제 남작은 꽉 막힌 사람이라고. 더 이상의 수모를 겪을 이유가 없어.”
“이대로는 교회가 우리를 변경으로 보낼 거예요. 시골 교회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먹이고 입히시려고 그러세요? 아버님 뵙기는 부끄럽지 않으시고요?”
“당신까지 그런 소리 마! 아아, 왜 하필 그런 여자한테 걸려서…. 여자가 수치심도 모르고 연애할 때의 이야기를 떠벌이다니, 자기 남편 생각은 하지도 않는 건가? 조용히 지나가도 될 일을 도대체 왜 자기 집안에다 떠들어서 기어이 남의 인생을 파탄 내려는 거야? 집요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여보, 제롬. 비는 척이라도 해 봐요. 제가 같이 가서 용서를 빌게요. 남작님도 신앙인이신데 어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원수 보듯 하시기만 하겠어요. 그분의 마음을 돌리는 수밖에 없어요. 리노아스를 떠나겠다고 해요. 다른 곳이어도 괜찮잖아요. 기다리면 다시 좋은 자리가 돌아올 거예요. 불명예스럽게 밀려나게 되면 그런 기회도 다시 안 올 거라고요.”
“이럴 거면 그만두는 게 나아. 먼 도시에서 따로 개척을 하든지, 교사 일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여보, 교사라니요. 아버님이 절대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다음 순간, 버클리는 건물 밖으로 이어지는 길을 밟으며, 신경질적으로 쿵쿵 밟아대던 걸음을 딱 멈추었다. 입구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의 마지막 재판이라 건물에 남아 있는 이가 거의 없는 줄 알았는데, 아직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꽤 있었다.
버클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비통함과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그때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버클리는 시선을 보내는 사람 쪽을 돌아보았다가 무심코 숨을 삼켰다.
아드리아나의 남편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배알도 없이 여기까지 따라왔군. 어떻게 된 남자인지.’
슬픔이 싹 가슴 속으로 수렴되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웨버는 버클리를 한번 흘긋 보았다가 시선을 거두며 아주 묘한 미소를 지었다. 버클리의 눈에는 그가 커다란 덩치로 긴 의자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서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있는 거만한 모습도 아니꼬웠고, 자기들이 이겼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속으로 비웃는 게 분명한 눈빛이 속을 뒤틀리게 했다.
‘자기 여자가 나와 무슨 짓을 하고 지냈는지 알고도 웃음이 나온다는 건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군.’
버클리는 안 보는 체하며 웨버를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공판까지 갔어야 했어. 나 같이 운 없는 남자도 없을 거야.”
“여보, 그런 생각은 이제 그만하시고 당분간은 기도에 전념하세요. 마음이 정리되시면 같이 남작님을 찾아뵈어요. 하루라도 빠른 편이 좋겠지만요.”
“그 소리는 그만 해. 킹스턴까지 나와서, 성직자 옷을 벗는다고 할 일이 없겠소?”
버클리의 말에 부인이 지나온 자리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여보…. 사실 전 그 남자가 한 말도 마음에 걸려요. 당신이 신부복을 벗고 나면 가책 없이 당신에게 손을 대려는 게 틀림없어요.”
“제발 어이없는 소리 마. 지금은 법과 윤리가 왕국을 수호하는 시대야. 내가 신부라서 봐주고 있다니, 게다가 그런 야만스러운 자가 신을 알기나 할 걸로 보이던가?”
“그래요, 여보. 바로 그 야만스러운 북국인이라고요. 우리 법과 윤리를 무시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망상이 지나치군.”
“여보, 제발요. 당신 아버님도 저도 당신이 성직에서 물러나길 바라지 않아요. 부담 드리긴 싫지만, 저희 가문은 또 어떻겠어요? 이제 남작님께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어요.”
아내의 우는 소리도, 멸시하는 듯한 웃음을 보인 북국의 남자도,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클로제들도 진절머리가 났다.
‘기도가 부족했어. 그래 내 잘못이었어. 남자를 유혹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여자를 멀리하지 못한 잘못이야. 나는 너무 약하고 어리석었어.’
아드리아나에게는 이미 사과도 했다. 남작에게까지 무릎을 꿇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엄하신 아버지와 작위는 없다고 해도 엄연한 귀족 가인 처가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생각하면, 결국 아내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고 말 터였다.
뜻하지 않게 인생이 꼬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충분히 참회하고 기도하였는데도 뭔가 부족했던 모양이지만, 뭐가 부족했는지는 깨달을 수 없었다.
버클리는 거기에 신만이 아는 깊은 뜻이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
테스카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누구도 먼저 버클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의 어깨에 기대자 발렌틴이 손을 잡아주었고, 말없이 서로의 손만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한참 후, 정적을 깨고 아드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얼린 경이 말이에요. 당신이 그분보다 더 무섭게 생기셨대요.”
“갑자기 그건 대체 무슨 소리요.”
발렌틴이 인상을 찌푸리며 웃자, 엘레나도 가볍게 웃는 소리를 냈다.
“아닌 게 아니라, 얼린 경 아주 미남이시던데요? 우리 주인님보다는 선이 훨씬 고와보이시고요.”
엘레나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린의 외모에 단정한 느낌이 있기는 하나, 어딘지 오만하고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점에서는 그가 발렌틴 이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의 공포스러웠던 첫 만남부터, 그 남자만 보면 들통 나서는 안 될 게 들통 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기 급급했던 터라, 아드리아나로서는 그의 외모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해볼 일도 없었다.
“…증언을 해 달랬더니, 잘난 얼굴로 남의 아내를 홀리고 내 흉이나 보고 가다니.”
발렌틴이 창가에 팔꿈치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 탓에, 그에게 기대고 있던 아드리아나의 몸이 더욱 기울어지며 반쯤 드러누운 자세가 되었다.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여보’하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마지못한 듯 곁눈질로 내려다보았다. 덕분에 안 그래도 사나운 눈매가 쏘아보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왜 부르시오, 부인.”
“여보, 그런 표정이시니까 무서워요.”
“난 원래 이렇게 생겼는데 내 얼굴이 맘에 안 드시오?”
그 사나운 얼굴에서 짐짓 서러운 듯한 말투가 튀어나옴에 참을 수 없이 우스워져서, 아드리아나는 하인들이 있는 것도 잊고 몸을 일으켜 덮치듯 발렌틴을 끌어안았다.
“너무나 맘에 들어요. 세상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잘생기셔서 좋아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까지 아첨하지는 않아도 돼.”
발렌틴이 품 안에서 금세 누그러진 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에요. 얼린 경의 말은, 그냥 제가 그분을 너무 무서워하고 피해 다니니까 그러지 말라고 농담을 하신 것뿐이에요.”
“흠.”
“어쩜 그분을 다 질투하실 수가 있어요? 혹시 질투하시는 거 맞아요?”
“하지. 나보다 먼저 당신을 알았고, 더 잘 알고 있었던 남자잖아.”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관점에 약간 당황하고 있다가,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주었다.
“생각이 지나치셨어요, 여보. 당신이 저를 생판 모르셨을 때에나 그랬을 거예요. 게다가 지금 당신보다 저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확실해?”
“그럼요.”
아드리아나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이자, 좀 더 만족스럽게 들리는 ‘흠’ 소리가 났다. 잠잠해져서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발렌틴을 끌어안은 채로 미소 짓고 있다가, 아드리아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녁임에도 열린 차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따뜻했다. 품 안에 있는 남편의 따뜻하고 단단한 몸이 아주 오랜만인 듯 그립게 느껴졌다.
“…여보. 우리 어디 멀리 여행 다녀와요. 당신과 둘이서 며칠 길게 푹 쉬었다 오고 싶어요.”
“나랑 어디 가고 싶은데?”
“어디든 좋아요. 우리 이시스에도 가기로 했잖아요. 봄이니 더 좋을 거예요. 가는 김에 바쉬랑 로아타르에도 들르고요.”
“사랑의 도피라도 하자는 줄 알았더니, 생각한 게 당신 시댁인가.”
“당신 가족들이 절 예뻐해 주시니 공주 대접이나 실컷 받고 오죠. 로빈도 데려가서 형제들과 놀게 해주면 좋아할 거예요. 그러고 나면 같이 리노아스에도 다녀와요. 당신도 제 부모님께 왕자님 대접 받으시게 해드릴 거예요.”
“왕자라니 난 됐어, 여보.”
발렌틴은 왕자도 공작도 다 싫다고 불평하며, 아드리아나를 꽉 끌어안았다.
리무진이 노을 속을 달려서 테스카에 가까워졌다. 익숙한 도시의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기분이 몽롱한 나른함에 잠기기 시작했다.
따사로운 봄날이어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혀왔던 남자에 대한 기억은 천천히 옅어지고 거의 아프지 않게 되는 날도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발렌틴이 끼워준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다이아몬드가 노을 빛 아래에서도 처음과 변함없는 아름다운 빛을 내는 모습을, 아드리아나는 뿌듯해하며 바라보았다. 발렌틴의 손가락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둘이서 반지를 나눠 끼며 약속했던 일을 떠올리자 입가에 잔잔하게 걸려 있던 미소가 크게 번졌다.
“…당신, 알몸으로 제게 서약해주셨어요.”
아드리아나의 갑작스러운 말과 작게 터진 웃음에, 앞좌석에서는 기침 소리가 나고 외면하는 등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오드리, 졸려? 우리 부인이 많이 힘들었나 보오. 안아줄 테니 좀 자요.”
뻔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도 알몸 서약은 부끄러웠는지, 웃어대는 아드리아나를 품에 꼭 가둬넣고서 억지로 등을 토닥였다.
============================ 작품 후기 ============================
이것으로 징글징글했던 놈을 보냅니다.
부어주신 선추코평쿠 모두 고맙습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