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6 해갈 =========================================================================
“피고소인, 클로제 남작에게 무죄를 선고하겠소.”
판사의 거칠고 굵은 음성이 실내의 소음을 압도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찌푸린 얼굴을 긁적이거나 흐트러진 자세로 한숨을 내쉬는 등 품위 없는 태도로 일관했던 일이 거짓이라는 듯, 그는 불복을 허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을 실은 목소리로 판결을 내렸다.
“들으시오. 버클리 씨를 소속 단체에 탄원함으로써 추천을 철회할 만한 타당한 이유와 정당한 권리가 남작에게 있다고 보이오. 그의 딸이 무책임하게 추행 당했다고 의심하는 근거 역시도 충분하다고 여겨지오. 버클리 씨는 클로제 양에 대해 부족했던 배려를 반성하였다고 주장하나, 태도로 보아 그 또한 의심스럽소.
비록 버클리 씨의 클로제 양에 대한 강압적인 접촉이 세간의 법에서 관여하지 않는 범위의 일이었다고는 인정되나, 법에 저촉되지 않음이 도덕적인 지탄마저 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오. 양측이 자발적으로 구속받고 있는 종교의 교리가 도덕에 있어 보다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또한 경시할 수 없소. 고소인은 해당 종교의 엄격한 영향력 안에 있으며 동시에 그 득을 보는 자리에 있는 자로서, 의혹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을 받음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오.
남작의 고발에 악의성이 있다는 고소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겠소. 남작이 고소인을 껄끄러워하여 모함하고 내쫓으려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불충분하오. 우리 아르본은 해당 교회 단체에서 자체적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맡기겠소.”
버클리의 변호인은 생각도 못했던 결과인 듯, 멍한 얼굴이 되어 쥐죽은 듯 조용히 판사의 말을 들었다.
“아울러 고소인에게는 공무를 방해하는 허위 고발로 벌금형을 선고하는 바요. 금액은 별도로 통지될 것이오. 이번 판결에 대해 원칙적으로 항소는 불가능하며, 원한다면 왕실에 항고할 수는 있소. 이상이오. 재판이 끝났으니 알아서들 돌아가 주시오.”
이후 판사는 바로 손을 들어 보이며 고소인과 피고소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뒤이어 조정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클리에게 말을 건넸다.
“신부님. 위로가 될지 모르겠으나, 벌금은 그닥 크지도 않은 액수일 겁니다.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는 심히 동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 후, 판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방 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 자리는 무거운 비탄에 잠겨 있었다. 이게 비탄에 잠길 만한 일인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인가. 버클리는 진정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그의 변호인은 그에게 속은 협력자인가 공범인가….
아드리아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늘어져 있던 척추를 곧게 펴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니?”
버클리의 목소리였다.
분노를 억누른, 안타까워하고 원망하고 아파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아드리아나는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와 얘기가 잘 통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한 달의 시간은 이성을 파악하기에 결코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한 달이 무언가. 2년의 시간도 부족했었다.
“버클리 씨. 제 의뢰인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저를 통하십시오.”
스톡스가 바로 끼어들었다. 버클리의 변호인도 급하게 자기 의뢰인의 경솔한 행동을 제지하며 보호하려 했다. 얼마지 않아, 거칠게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아드리아나는 불쾌감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실소가 나왔다. 이게 한때나마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와의 결말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구석 마을에서 상연하는 연극보다 더 웃기는 쇼 같았다. 시간은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웨버 부인, 괜찮으십니까?”
스톡스의 목소리에, 아득해지고 있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아드리아나는 어깨를 크게 들썩인 후, 미소 짓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요. 좀 멍해졌어요….”
“허탈하시지요?”
스톡스가 물건을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으며, 드물게 미소 지었다.
물론 허탈한 편이 백번 낫다는 것을 아드리아나도 알고 있었다. 공판으로 넘어가면 온갖 증인을 다 불러들이고 공개해서 진흙탕 싸움을 만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스톡스는 아드리아나에게 지난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라도 가리지 않고 끌어낼 거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었다.
“수고하셨어요, 스톡스. 덕분에 금방 끝났네요.”
아드리아나는 잠시 피로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스톡스를 바라보고 있다가, 곧 얼린을 돌아보았다. 얼린은 어느새 들어와 있는 자기 하인에게 겉옷을 건네받으며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일어서서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얼린 경.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천만에요, 웨버 부인.”
얼린은 짧게 답하고서 금방 시선을 돌렸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그에게 단 한 번도 피해를 입은 적이 없음에도 줄곧 그를 두려워하며 편견으로 바라봐온 것에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게다가 남편과 아는 사이이니, 앞으로도 얼린과는 종종 부딪치게 될 일이 있을 터였다.
“경께 두 번이나 큰 은혜를 입었어요.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아드리아나가 나직이 말하자, 얼린이 몸을 돌려 아드리아나를 향해 섰다.
“보답이라면 이미 부군께서 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같은 일로 보답씩이나 받을 것도 없습니다만…. 아무튼 나중에 부군과 같이 저를 다시 보시게 되거든 그때는 부디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웨버 경과 제가 함께 있으면 숙녀분들이 그분을 무서워했으면 했지, 저를 이렇게 어려워하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어, 아드리아나가 겸연쩍게 웃었다.
사실 발렌틴이 녹을 만큼 다정한 남자가 된 것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이지, 그가 처음부터 여성 앞에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청혼한 이후로도 한동안 다소 무뚝뚝한 편이었고, 혼자 싸늘한 눈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리노아스에서 제가 한 일은….”
얼린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가, 잠시 틈을 둔 후에 이어졌다.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으니 부인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번쯤 끼어들어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아드리아나는 도로 멍해진 눈을 깜박이며 얼린을 바라보았다.
왠지 ‘한 번쯤’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한 번쯤 남의 일에 끼어들어보고 싶었다는 말인가? 원래 남의 일에 잘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가진 그이지만, 한 번쯤 간섭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고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다른 뜻이 감춰져 있을 것만 같아 얼이 빠져 있는 새, 얼린이 인사를 하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서서히 꿈에서 깨어날 듯한 기분이 되었다. 간절하게 버클리를 이기고 싶어 했던 나머지, 모든 일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얼린이 나타나서 도와주고 승리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황당무계한 생각마저 들었다.
발렌틴이 실제로 밖에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그가 없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요, 스톡스.”
아드리아나는 스톡스와 함께 방을 나왔다.
엘레나가 바로 앞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맞아주었다. 그녀는 아드리아나를 근처에 있는 여성용 휴게실로 데려가서 매무새를 보기 좋게 정돈해준 후,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바깥뜰로 안내해주었다.
답답했던 건물을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꽃나무 아래에, 펜이 처음 보는 아가씨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발렌틴은 계단 앞 벤치에 비딱하게 앉아서, 아닌 척 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 끝을 올리고 있었다.
“여보.”
발렌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절로 미소가 새어나왔다. 아드리아나는 그를 부르며 폴짝폴짝 계단을 내려갔다.
부르는 소리를 들은 발렌틴이 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드리아나의 얼굴에 다가와 머물렀다.
이내 스톡스가 부부에게 인사하고 먼저 성을 빠져나갔고,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곁에 앉으며 그의 허벅지를 살짝 쓰다듬었다.
“저 왔어요, 여보.”
“응. 고생했소.”
발렌틴의 손이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드리아나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턱을 아래로 당겼다. 남편의 목을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조금 부끄러웠다.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돌아갑시다. 피곤하지?”
“전 괜찮아요.”
아드리아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걸어 나가며 주변을 흘긋 둘러보았다. 아마 버클리 일행도 이 길을 통과해 지나갔을 터였다. 몹시 화를 내며 뛰쳐나갔으니 뒤도 안 보고 쏜살같이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행여 남편과 눈이라도 마주치지 않았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왜?”
발렌틴이 눈치 보는 아드리아나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멋쩍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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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더 이어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