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해갈 =========================================================================
“피아노 소리에 거의 묻혀 있었지만, 2층에서 희미하게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리더군요. 다들 못 들은 것 같아 저도 무시하고 있다가, 비명이 계속 이어지기에 2층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인기척이 있는 방 앞에서 노크하고 바로 문을 열었더니 소파 위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게 보였습니다. 버클리 씨가 바지를 내린 채로 클로제 양을 몸으로 깔아 누르고 있었죠.”
순간 버클리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당장에 그의 변호인이 일어나, 얼린이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불필요하게 상세히 폭로한다며 따지고 들었지만, 판사는 얼린이 말을 계속하게 했다.
“얼린 경. 고소인이 클로제 양을 추행하는 것으로 보였소?”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강압적으로 보이는 구도이긴 했으나, 둘 다 제 개입을 썩 반기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적어도 억지로 떼놓고 고발할 상황은 아닌 듯해, 저는 제지만 해놓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이 저를 따라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재판장님, 클로제 양이 고성을 낸 것은 두 사람이 앞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던 중의 일일 뿐입니다. 얼린 경이 목격한 것은 두 사람의 애정 행위였습니다. 클로제 양이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버클리 측이 적극적으로 항변하자, 스톡스가 발언권을 청하며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유감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제된 행위였습니다, 재판장님. 클로제 양은 당시에 눈물을 흘리며 거부하고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클로제 양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여성으로서, 4년 전의 사고로 인해 위험한 환경을 헤쳐 오면서도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정숙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지켰습니다. 작년에 결혼하여 신방을 차리기 전까지, 클로제 양은 단 한 번도 남성에게 몸을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이는 클로제 양의 남편을 통해서도 확인받은 사실입니다. 정식 약혼도 하지 않은 버클리 씨에게 관계를 허락한 적은 당연히 없습니다.”
스톡스의 다소 적나라한 공개에 사람들의 시선이 아드리아나에게로 모아졌다. 버클리의 시선도 뜨겁게 아드리아나에게로 박혔다.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듯 의심하는 그의 눈빛을, 아드리아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무시했다.
지극히 사적인 일을 까발려지는 일이 치욕스럽기도 했지만, 여성이 결혼하기까지 순결을 지켰다는 일을 미덕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풍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아드리아나는 판사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향한 호의가 더해지는 것을 위안 삼을 수 있었다.
버클리의 변호인이 거듭 판사에게 호소했다.
“사실과 다릅니다, 재판장님. 클로제 양은 여성으로서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여 보일 수 있는 소극적인 저항을 했을 뿐입니다. 그때 얼린 경이 끼어들었어도 도움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버클리 씨가 약혼자였고, 그 일이 둘 사이에 허용되는 애정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약혼 관계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였소만.”
판사가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며 잘라 말했다.
“정정하겠습니다. 당사자 간의 약속을 나눈 연인 관계로서 서로 허용하는 안에서의 행위뿐이었지, 절대로 추행은 없었습니다.”
버클리 측의 말 뒤에 스톡스가 뭔가 발언하려다가, 판사의 시선이 얼린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고 등을 도로 기대며 앉았다. 판사가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얼린에게 물었다.
“자, 얼린 경. 솔직히 발언하시오. 당시에 본인이 불륜의 현장을 방해한 기분이었소? 아니면 성추행범으로부터 요조숙녀를 구한 기분이었소?”
판사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약간의 모욕감을 느꼈지만, 사전에 당부들은 대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얼린이 자신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스톡스는 얼린이 ‘자기 내키는 대로 솔직하거나 모르는 척 숨길 것’이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 자신했으니 그를 불렀을 터였다.
얼린이 미묘하게 미소 지었다.
“둘 다였습니다, 재판장님. 클로제 양이 달려와 제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니 훼방꾼이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클로제 양은 버클리 씨보다는 저를 더 무서워하는 걸로 보였고, 그를 감싸고 싶어 하는 듯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버클리의 변호인이 부릅뜨고 있던 시선을 조금 부드럽게 했다. 버클리의 목에는 더욱 꼿꼿하게 힘이 들어가는 듯 보였다.
얼린은 시종 편한 자세로 앉아, 조용히 증언을 이어나갔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가 그 방에서 클로제 양을 데리고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약간 말을 돌려서 그들이 연인 사이인지를 묻기도 했는데, 둘 다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제 관여로 강압이 해소되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판사가 연민의 눈으로 아드리아나를 쳐다보기에, 아드리아나가 얼른 입을 열었다.
“예, 저를 범하려 했을지언정 감싸주려 했습니다. 저를 책임지고 약혼해 줄 거라고 믿었고, 그가 제게 무슨 짓을 하든, 장래의 남편이 될 사람으로서 제가 용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보기에 영애는 ‘곧 정리하겠다’고 한마디만 들었어도 넘어가 충분히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것 같소.”
판사가 퉁명스럽게 지적했다.
“절대 아닙니다. 정리하고 돌아와 줄 때까지 기다렸을 거예요. 제가 비록 남자에 무지하고 어리석었으나 다른 여성과 약속을 나눈 약혼자를 탐하는 일의 부도덕함과 두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버클리 씨도 그러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고결한 성직자의 아드님이셨고, 제게 사랑을 고백하셨고, ‘언젠가는’ 꼭 결혼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아드리아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자, 판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조정관은 아드리아나에게 ‘이중 약혼은 사기로 고발할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스톡스는 자신과 상의한 대로 말하기 위해 수치심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아드리아나를 격려하듯 부드럽게 바라봐주었다.
“…남녀문제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데가 많소. 약속은 진실이었다가도 변하는 것이니 쉽게 믿은 영애의 잘못도 있소.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닌 이상, 한쪽이 변심하여 약속을 위반했다 한들 우리 법이 구제해주지 않소. 뒤늦게나마 영애가 깨달았으니 정조를 지켜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지난 연인과의 일이 추행이었는가를 이제와 따지기도 어렵소.”
판사는 잘못한 학생을 나무라듯 말하고 나서, 버클리에게도 말했다.
“약혼 사실을 숨기고 연애하는 것도 엄연한 사기죄에 해당하오. 다만 고발이 없었으니 그 점은 지금 추궁하지 않겠소. 떳떳하게 약혼하여 책임 있는 지위를 얻지 않고 혈기와 연애감정만으로 관계를 유지했으니, 남작이 한때나마의 순애를 폄하하고 추행죄를 묻는 게 아니오?”
순애라는 말에, 아드리아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버클리는 진정 참회하는 듯한 얼굴로 판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판사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버클리 측에 정리하는 변론을 하게 했다. 그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지 힌트를 주지 않고 있었기에, 양쪽 모두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재판장님. 남작 측의 주장은 감정에 호소하여 오도하는 말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두 연인은 훼방과 장애가 있어 갈라서게 되었지만, 버클리 씨가 연인으로서 진실하고 충실하였기에 클로제 양도 그를 더욱 신뢰했을 터입니다. 당시에는 서로 사랑했고 결혼할 결심을 했던 것이 확실한 진실입니다. 어찌 추행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남작의 모함일 뿐입니다.
버클리 씨의 가문은 대대로 우리 아르본에 착실히 세금을 내고 선행을 베풀어온 정직하고 훌륭한 분들이라고 명망이 높습니다. 재판장님, 버클리 씨는 킹스턴을 졸업한 수재임에도 작은 교회에서부터 수도하고 봉사하며 근면하게 살아왔습니다. 클로제 양에게 더욱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을 마음 아파하며 기나긴 참회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철없던 시절에, 비록 방법에 있어서 서툴렀던 면이 있으나, 한때는 진실했던 애정을 추행이었다고 왜곡당하고 고발당함으로써 그가 얻은 상처와 손해는 무엇으로도 회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라도 탄원서를 물리고 성직자로서의 품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주십시오.”
이후 판사가 처음부터 그랬듯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정관이 손을 들고 나섰다.
“버클리 씨는 혼인한 신부이므로 수도자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정정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판사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남작 측, 최종 변론 하시오.”
스톡스가 입을 열었다.
“증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하고 싶습니다. 남아 계시도록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시오.”
판사가 허락하자, 스톡스가 감사 인사를 하고 말을 이었다.
“클로제 남작이 버클리 씨를 추행 전적이 있다는 이유로 교회에 고발한 일에 과연 부당함이 존재할지요. 애초에 주임신부로 버클리 씨를 추천해준 것도 남작입니다. 그런데 판단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가 딸의 음행을 지적하고 구제할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중 약혼으로 추행하고 사기를 친 장본인이라는 문제가 발견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약혼관계도 아닌 남자가 영애에게 해온 행위만으로도 아버지된 입장에서 추행의 의심을 하기에는 충분할 수 있습니다. 남작의 탄원은 버클리 씨가 클로제 양을 기만하고 연인 행세를 한 일의 시비를 가리고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의 교리와 도덕의 귀감이 되어야 할 자리에 그를 추천한 것을 철회하겠다는 의사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 적합한지 아닌지 여부는 교회가 가려줄 것입니다.
또한 버클리 씨와 클로제 양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클로제 양의 짝사랑인 것으로 연인 관계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버클리 씨가 진정한 연인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얼린 경의 증언을 듣고 싶습니다.”
“안됐지만, 얼린 경은 두 남녀 사이에 관심이 그리 없어 보이오. 영애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소만.”
판사가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보다는 명백해진 아드리아나에 대한 연민이 드러났다.
스톡스가 말했다.
“얼린 경은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감싸주려던 클로제 양을 목격했듯, 버클리 씨의 태도 또한 목격했을 것입니다. 버클리 씨가 연인이 아니라 추행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판사가 미적지근한 투로 질문했다.
“증인은 두 사람 사이의 행위가 일방적인 추행인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했소. 연인 관계로 봄 직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아까 저는 성추행범으로부터 요조숙녀를 구한 기분도 동시에 느꼈다 답하였습니다. 버클리 씨가 강압적이었던 데다가 클로제 양을 연모하거나 책임질 남자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버클리 측이 증인의 근거 없는 감상을 듣는 일에 항의했지만, 판사는 ‘조용히 하시오’하고 마지막 증언을 듣고 끝내기를 명령했다.
“당시 클로제 양이 버클리 씨의 밑에 깔려 있을 때, 좀 심하게 말하면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물범벅이었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심하게 떨고 있었는데 버클리 씨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더군요. 저는 어쩌면 두 사람이 정신적인 면에서 상하수직적인 관계로, 강제적인 성관계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갈 사이인가 보다 했습니다. 다만 클로제 양이 너무 떠는 게 좀 안타까워 보이기도 해서, 버클리 씨에게 좀 더 여유를 갖고 나중에 다시 하라 일러주긴 했습니다.”
“얼린 경. 비약이 심하시군요! 우리는 연인 사이였고, 나는 그 정도로 강제한 적이 없습니다!”
참다못한 듯, 버클리의 입에서 말이 뛰쳐나왔다. 그의 입술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이전 날 리노아스의 교회에서 아드리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린이 투명하게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 정도로 강제하셨습니다. 저는 귀가 밝을 뿐 아니라 시력도 매우 좋은 편입니다. 기억력에 있어서도 남들에게 뒤지는 일이 없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너무 감상적인 묘사는 쓰지 않으려 했으나, 그때 클로제 양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라도 느끼는 것처럼 하얗게 질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버클리 씨가 그때 영애의 얼굴보다는 하반신이 잘 맞고 있는지에 몰두하고 있었던 탓에, 본인의 잘못된 생각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걸 겁니다.”
버클리의 시선이 황망하게 허공을 헤매다, 억울하다는 듯이 아드리아나에게로 향했다. 시뻘개진 얼굴로 마치 어서 해명하라는 듯한, 자기 편을 들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드리아나는 혐오감에 입술을 깨물며 눈을 피했다. 버클리의 얼굴이 처음 보는 악마처럼 보여서 그만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그러나 직후 판사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위해 억지로 침을 삼켜 목 안쪽을 적셨다. 눈물이 목 안으로 함께 넘어갔다.
판사는 아드리아나 쪽에 추가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항의하는 버클리의 변호인 말을 무시하며 버클리를 향해 ‘내 법정에서 뭐 하는 거요! 영애를 위협하지 마시오!’라고 호통친 후, 거의 동시에 의사봉을 땅땅 두드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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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봉을 땅땅 (버클리의 등짝에) 두드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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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와 감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천사님들이야..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