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해갈 =========================================================================
아드리아나의 표정에서 미소가 걷혔다.
이런 때에 이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숨을 틀어막으며 가슴 속으로 흘러 들어와 심장을 짓누르며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다. 아드리아나는 한 손으로는 그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뒤에서 손을 잡힌 채로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간을 더 기다려도 움직임이 없자, 이내 손을 놓고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으며 긴 머리카락 위에 자기 볼을 문질러서 흐트러뜨렸다.
“내 부인은 날 사랑하지 않나 보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그가 짐짓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아드리아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팔을 움직여서 눈가를 훔치지 않고도, 뒤돌아 그의 품에 안기지 않고도, 그를 만족시켜줄 대답을 해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들여다보인 기분이었다. 결국 그에게 두려움을 내보였기 때문에, 또는 그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픈 가정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실은 지금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과거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고,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되뇌고 있다는 상상이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에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눈앞에 보이는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등을 끌어안았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당신께 너무 큰 시련을 안겨드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이 지치지 않고 제 곁에 남아 있을지만 생각해요.”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한 말의 몰염치함에 부끄러워하고 서 있었지만, 발렌틴은 느긋한 동작으로 등을 쓸어주며 엉뚱한 말을 속삭였다.
“나 없이 못 살 것 같다고 말해 줘, 여보.”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빨개진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말이 좋으세요? 처음으로 사랑고백을 해서 감동하게 하시더니, 정말 무드도 모르는 분이에요.”
“그랬소? 아무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서 말해 봐.”
발렌틴은 천연덕스레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아드리아나의 촉촉해진 뺨을 닦아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그의 가슴에 마구 문질러 그의 셔츠를 젖게 했다.
정말, 그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지금에 이르렀다.
그는 알지도 못하리라. 아드리아나가 그의 청혼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부터 이 후의 다음이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 다음을 원하지 않게 되리라고 예감했던 사실을.
그보다 더 앞선 순간에는 어땠던가. 어딘지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로 과자점에 들어섰던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 호텔에서 부딪치고 지나갔던 그를 회상하던 날, 벼랑 아래에서의 첫 만남을 뜨겁게 망상하던 꿈,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의 꿈….
아드리아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그와 결혼하고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현실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결같이 그를 꿈꿔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당신이 없는 걸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발렌틴. 그런 말은 묻지 말아주세요.”
괜스레 원망하는 투로 작게 속삭이자, 발렌틴은 금방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한참을 그대로 문 앞에 서서 아드리아나를 부둥켜안은 채로 혼자 미소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보단 안 힘들어. 당신보다 훨씬 튼튼하고.”
그는 말하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훔쳐보듯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물을 닦아주고 뺨에 입을 맞춰준 후 산책하러 나갈지 침대로 갈지를 묻는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그를 게으름뱅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듣고 싶던 말을 들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좀 더 솔직하게 그를 걱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드리아나보다 덜 힘들다는 말은, 그가 힘들다고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기에.
*
그 후 재판이 열리기로 한 5월 초까지, 아드리아나는 일정을 줄이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기로 했다. 발렌틴이 다른 일을 통해 기분을 전환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보다 아드리아나를 곁에 두고 지켜보며 안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르본으로 떠나게 된 날, 아드리아나는 발렌틴과 아침을 먹고 평소처럼 정원을 산책하고 간단한 오락거리를 즐기며 느긋하게 오전을 보냈다. 재판 일정이 늦은 오후로 잡혀서, 집에서 적당히 여유 있게 출발하기로 했다.
발렌틴은 체스판 위에 놓인 아드리아나의 퀸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가 말했다.
“나도 당신하고 같이 가고 싶어.”
아드리아나는 그가 이만하면 많이 물러줘 왔다고 생각했다.
“갈래. 아르본까지만이라도.”
그가 좀 더 물러주면서도 더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여보. 성에까지 같이 가요. 당신은 밖에서 펜이랑 꽃구경이라도 하시면서 기다려주세요.”
재판장은 성 안에 있었고 근처까지 함께 갈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다.
발렌틴이 흡족해하더니, 이내 손을 움직여서 아드리아나의 퀸을 거두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
버클리 측의 주장은 이랬다.
“제롬 버클리 씨와 아드리아나 클로제 양은 당시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합의 하에 애정 행위를 나누던 관계였지요. 그러므로 버클리 씨가 클로제 양을 추행했다는 탄원서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서두부터 끔찍한 소리였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도 한때는 그 말 그대로를 오롯한 진실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벌써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그 뒤로 말론과 리디를 포함한 여러 명의 증언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나마 자신의 자격과 신분을 감안해 ‘웨버 부인’이 아닌 ‘클로제 양’으로 불리도록 되어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했다. 물론 가장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발렌틴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버클리의 변호인은 불의의 사태에 분노한다는 투로 진술을 이었다. 그는 클로제 남작의 탄원 내용, 즉 버클리가 아드리아나를 추행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반성 없이 리노아스의 주임 신부직 추천을 받아 들였다는 그 내용이 의도적인 모함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클로제 남작은 지체 높은 모 가문과 연을 맺기 위해 버클리 씨에게 클로제 양을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버클리 씨는 평범한 학생 신분에 불과했으니 남작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다 그 직후에 클로제 양이 사고를 당해 실종되자, 남작이 자진해서 과거 일을 속죄하는 의미로 버클리 씨를 리노아스의 주임직에 추천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드리아나가 버클리를 버리고 다른 가문에 시집가다가 행방불명되었으며 현재는 전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피고소인 측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남작이 사위에게 리노아스 성을 물려주고 살게 하기 위해, 눈엣가시인 ‘딸의 옛 연인’을 모함해 쫓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킹스턴 대학의 강사로 있는 말론이 말을 보태어,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나갔다.
판사는 흔해 빠지고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청중의 얼굴로 덤덤하게 진술을 들었다.
성에서의 약식 재판이란 당사자들의 신분이나 호감도뿐 아니라, 판사의 개인적인 기호와 기분 상태에 따라서도 결과가 좌지우지 되었으므로, 양측이 그의 안색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작 측 반론하시오.”
판사가 짧게 말하고서 시선을 스톡스에게로 옮겼다. 스톡스가 그에게 다시금 목례하여 예를 표했다.
그동안 아드리아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버클리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겸손한 체 하며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의 편을 들고 있었던 말론의 퉁명스러운 시선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약혼이라니. 가문의 반대로 헤어진 비운의 연인 행세라니. 갖가지 구질구질한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확약을 미루던 그의 졸렬한 표정이 생생한데.
“일단, 클로제 양은 버클리 씨와 약혼을 한 일이 없습니다.”
스톡스는 사소한 잘못을 정정하듯 부드럽게 언급한 후에 반론을 이었다. 아드리아나 측에는 남작의 변호인 자격으로 온 스톡스와 아드리아나, 그리고 남작을 대신하는 대리인 세 명만이 앉아 있었다.
“…클로제 양이 버클리 씨를 연모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버클리 씨는 클로제 양의 가정교사였는데 클로제 양의 연정을 이용하여 지속적인 추행을 해왔고요, 클로제 양은 그것을 순수한 애정으로 생각하여 묵인해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시골 영지의 영애들이 남녀 사이의 일에 완전히 무지하도록 보호받는다는 점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님.
…버클리 씨는 클로제 양이 신체 접촉을 거부하는 의사를 나타내면 약혼에 대한 희망을 두루뭉술하게 암시하는 식으로 추행을 이어갔으며, 연인 관계로 믿게끔 하면서도 둘 사이의 일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이미 다른 여성과 약혼한 상태라는 사실도 감추고 기만했고요. 아르본 법이 그렇듯이, 대개의 영지 상식에서도 이중 약혼을 인정하지 않음을 버클리 씨가 몰랐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클로제 남작은 이 모든 사실을 최근 클로제 양과 재회하고서야 듣게 되었습니다. 여성을 추행하고도 뉘우침이 없는 파렴치한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도록 탄원한 것은 정당한 일일 것입니다.”
스톡스의 말에 버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대신 버클리의 변호인이 다소 흥분하며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높였다.
“본 사건과는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 혼약은 버클리 씨의 가문에서 성사시킨 일이었고, 당사자들은 서로 면식만 있었을 뿐 혼인 의사가 없었습니다. 버클리 씨는 클로제 양과의 연인관계에 충실했으며 결혼할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클로제 양을 강제로 추행한 일이 없습니다. 남작이 두 사람의 연애를 훼방 놓고서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입니다.”
“클로제 남작이 클로제 양을 멀리 시집보낸 것은 오히려 버클리 씨의 계획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버클리 씨가 겁간을 시도했다가 좌절되자 범행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남작에게 딸의 행실이 음탕하다고 음해하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버클리의 변호인이 분노하며 외쳤다.
판사는 손을 들어 발언을 중지시키고, 눈썹을 으쓱하며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는 이후 버클리와 아드리아나에게 변호인들의 말에 대해 물었고, 지루해진 듯 턱을 가볍게 괸 채로 양측에게 전달받은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약혼 관계였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겠소. 그러나 연인 관계였다고는 인정하겠소. 클로제 양에게 그를 고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관계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추행죄도 성립하기 어렵소.”
판사가 서류를 넘기다가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말했다.
“그 ‘겁간이 시도되는 듯한’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를 데려오시오,”
그가 입을 열자 잠시 실내가 썰렁해졌다. 순간 버클리의 낯빛이 조금 탁하게 변하는 듯도 보였다.
이윽고 조정실 방의 문이 열렸다.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남자가 걷는 길을, 아드리아나가 곁눈질로 좇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아드리아나의 시선도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캐도건 자작 가의 장남, 얼린 다이어 경입니다.”
얼린이 아르본의 기와 판사 앞에 목례했다.
아드리아나는 목 아래에서부터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슈하스에서는 그를 만났을 때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 해놓고서 도움을 받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에 대한 두려움은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을 모른 척 해주었던 일, 발렌틴과 제법 호의를 나누는 사이라는 사실, 버클리에게서 구해주었던 일 등을 모두 종합해보면, 그에게 적개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린이라는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얼린이 신분 확인과 인사를 하고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당사자들과의 관계를 묻는 판사의 질문에,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클리 씨와는 킹스턴 선후배 사이고 클로제 양과도 인사를 한 적은 있습니다. 양쪽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본 적은 없습니다.”
“친한 사이여도 상관없소. 경이 본 대로 진실을 말해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린은 차분히 앉아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질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묻는 말에 한 치 망설임 없이, 4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바로 조금 전에 본 일을 설명하듯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킹스턴 동기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잘 치던 교향곡이라 귀에 거슬리지 않았고, 저는 귀가 밝은 편이라 그때 꽤 멀리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얼린이 조용한 어투로 다소 연관 없는 사적인 점까지 밝히는 것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아드리아나는 어쩐지 그가 재미있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작품 후기 ============================
어제 2시까지 쓰다가 포기했어요ㅠ.ㅠ 쉬려고 한 것은 아닌데...ㅠ.ㅠ 3부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uu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