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92화 (92/140)

00092  지친 날의 유혹  =========================================================================

아드리아나는 리노아스에서 따로 기별이 올 때까지, 테스카에서 충실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교구의 일처리에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을 감안하면 수주, 또는 수개월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동안은 버클리에 대해서도 리노아스에 대해서도 모두 잊고 지내기로 했다.

테스카의 생활은 변함없이 순조로웠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자리가 잡혀갔다.

아드리아나는 어느덧 웨버 가의 안주인으로서 젊은 부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교양 있고 아름다운 귀부인이라고 이름이 영지 전체에 알려져 있었다. 결혼한 지 4개월 만이었다. 남편과 친구들의 후광이 컸던 게 사실이지만, 리노아스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외모와 재능, 교육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가문에 대해서는 그저 함구하고 있어도 되었다. 아이넨에서는 특히 상류층으로 갈수록 껄끄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본인이 먼저 자랑하지 않는 한, 출신에 대해 캐묻지 않는 금기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국왕과 보수 귀족이 고수하고 있는 일부다처제와, 왕자들을 필두로 일부 상류층에 정착한 일부일처제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나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아나로서는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고,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걸 들어도 마냥 부끄럽다는 듯 미소 띤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었다. 어느 정도 입지가 다져진 지금에 와서는 먼저 실례를 무릅쓰고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이도 없었다.

다만 에둘러서 가문에 대한 짐작을 하거나, 짐작을 핑계로 추켜 세워주며 잘 보이려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웨버 부인께서 워낙 겸손하신 탓이지요. 게임이면 게임, 시면 시, 온갖 언어에 악기 연주까지 못 하시는 것이 없는데 가문 자랑까지 하시면 우리 여자들의 시기를 어떻게 감당하시겠어요? 필시 어딘가의 깨끗한 시골 땅 영주쯤 되시는 귀족에게서 태어나셨을 거예요. 거기서 온갖 재주를 가지고도 때 묻지 않은 수수하고 고결한 삶을 사시다가, 각지를 유랑하며 웨버 경의 색시를 찾던 웨버 가의 심부름꾼에게 딱 발견되신 거지요. 듣자하니, 웨버 경의 탐색 능력이 보통이 아니시라던데요.”

“그럴싸한 짐작이네요. 그분 하시는 사업만 봐도 그래요. 귀한 분께 의뢰받아 귀한 물건을 찾아드리는 일에 도사이시니, 귀한 본인 몸을 맡길 부인을 찾으시는 데에는 또 얼마나 깐깐하게 정성을 들였겠어요?”

“아이고, 틀리셨어요, 부인들. 웨버 경 본인이 보시고는 그냥 첫눈에 뿅 반해서 덥석 잡고는 같이 살자고 데려가 청혼했다고 하시던 걸요. 이 얘기는 출처가 웨버 부인의 친구이신 레빙턴 부인이랍니다. 거의 확실해요.”

“어머나, 망측해라.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토리네요.”

성에 모인 여자들이 까르르 웃으며 떠들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아드리아나가 후작의 부인의 요청에 따라 낭송해줄 시집을 뒤적이고 서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즐거워했다.

아드리아나는 사실과 거의 근접한 남편과의 일을 들으며, 지난 일이 떠올라 내심 흐뭇해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부인들에게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인들이 이 웃음의 의미를 두고 더 크게 떠들어댔을 터였다.

“그나저나 이번에 새로 오신 신부님을 보셨나요, 여러분? 제가 교회에 몸담은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그렇게 무뚝뚝하신 분은 처음 뵈었어요. 설교도 한 음정으로 하셔서 어찌나 잠이 오는지.”

“2년만 버텨요, 부인. 테스카 교회의 주임직은 2년을 못 넘기게 되어 있대요.”

“그 2년 안에 신앙의 고비가 올 것만 같아요. 얼굴도 저희 시아버님을 닮으셔서 전 매주 일요일이 너무 너무 괴롭답니다.”

부인들이 테스카 교회의 주임 신부직이 바뀐 일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소니아를 통해 벌써 들어서 알고 있었다.

테스카 교회는 부를 쌓아올리기 좋은 환경이라 주임직이 치열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곳에서 사유재산을 만드는 일이 금지되어서 중앙 교회에서 지정하는 이들이 돌아가며 그 자리를 이끈다고 했다.

반면에 리노아스에서는 오랫동안 꾸준하게 영지민들을 돌봐줄 이가 선호되어서, 영주와는 또 다른 우두머리로서 리노아스를 보살피고 동시에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버클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아드리아나는 다시 그 영지로 돌아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버클리의 주임 승격 예정이 보류된 것은 지난주의 일이었다. 지난달에 아드리아나의 아버지가 교구에 탄원서를 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직 직분 자체가 취소가 된 것은 아니었고, 신부로서 전과 다름없이 리노아스 안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교회에서 탄원 건을 검토해보겠다고 하였으니, 탄원 내용을 받아들여준다면, 최소한 버클리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터이다.

아드리아나는 물론 버클리가 불복하고 도전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주에 그에게 통보가 되었다 하니, 조만간 뭔가 또 소식이 있겠지. 그가 남작관에 항의를 하러 온다거나….’

아드리아나는 최악의 경우도 가정해보았다. 그가 민심에 호소해서 남작을 행실 나쁜 영애의 응석을 받아준 팔불출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판사판으로 아드리아나와의 일을 왜곡해 리노아스 전체에 대고 폭로할 수도 있을 터였다.

-저 여자가 음탕하여 나를 유혹해 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합니다! 실컷 즐겨놓고 추행이라니요!

그의 지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너 따위를 유혹할 정도로 눈이 나쁘지 않아.’

지금이라면 그렇게 쏘아붙여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가 유일하게 아는 남자였고 그의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 그를 따르게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사람을 볼 줄 모르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웨버 부인, 시를 고르셨나요?”

후작의 첫째 부인, 글라디스가 아드리아나를 향해 부드럽게 물어왔다. 아드리아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글라디스도 아드리아나와 같은 코니스 계 혼혈이었는데, 그녀는 머리색이 짙었고 아이넨의 분위기가 더 많이 났다. 그래도 모친의 조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아드리아나와 코니스어로 이야기하거나 코니스의 옛말로 된 시들을 듣기를 좋아했다. 남편의 애정을 혼자서 차지하지 못하는 두 명의 부인 중 하나였어도, 그 점에 불만을 가졌거나 불행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드리아나에게는 그런 그녀가 신기하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다른 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섣불리 타인에게 연민을 가져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부인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없다니 너무 아쉬워요. 손이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글라디스가 온화하고 고상한 투로 말했다.

아드리아나가 손을 다쳐서 첼로를 켜기 어렵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연습을 너무 과하게 해서 그렇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수를 놓던 바늘에 살짝 찔린 것뿐이었다.

어젯밤에 아드리아나의 곁에 와서 자기도 뜨개질을 해보겠다고 진지한 얼굴로 코바늘을 잡고 앉아 있던 발렌틴을 놀리며 장난치지만 않았어도, 평생에 수놓는 바늘 따위로 손을 찔리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부끄러워졌다.

아드리아나는 글라디스에게 시를 몇 편 읽어주고 잠시 쉬다가, 남자들이 2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함께 온 발렌틴도 그 무리 안에 있었다.

“신사분들이 떠나시네요.”

“어머, 벌써요?”

어느새 여성들의 숫자도 줄어들어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해서 본격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나뉠 때를 조심하라고, 캐롤과 발렌틴에게서 누누이 들어온 아드리아나였다.

“그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제 남편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네요.”

“웨버 경도 신사 분들과 함께 내려가셨답니다. 오래 걸리실 거예요.”

다른 지역에서 휴양하러 왔다는 젊은 귀부인이 깃털부채 안에 웃는 얼굴을 감추며 말했다. 동시에 곁에 있던 다른 부인이 하인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하자, 하인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아드리아나가 얼른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잠깐 말씀을 나누다 금방 내려오시겠지요. 저는 그이를 기다리러 가보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마치 남편의 부속품처럼 얽매여 사시는군요.”

이번에는 글라디스가 붙잡았다.

“부인 정도 되시는 인재께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만 인생을 썩히는 것은 아까운 일이에요. 물론 부인께서도 예술계와 자선계에서 많은 훌륭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좀 더 주체적으로 삶을 누리실 필요가 있어 보여요.”

“전 지금도 분에 넘치게 누리고 있는걸요. 제가 행복한 이유로는 남편의 덕이 크니 어느 정도는 얽매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친구들과 농담하듯 부드럽고 가볍게 말했지만, 글라디스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아드리아나에게 말을 걸었던 다른 여인은 부채 밖으로 내놓은 눈매를 더욱 가늘게 좁혔다.

“인생을 한 남자가 좌지우지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옳지 않아요. 위험한 일이죠.”

글라디스가 다시 말했다.

“설령 후작님이라고 하더라도, 제 인생의 모든 것을 가지실 권한을 주장하시지는 않는답니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부속품이 아니며 남성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와 쾌락을 쟁취할 권리를 찾아야 해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게는 그런 권리를 쟁취하고 싶은 의사가 없으며, 제 남편도 외도를 경멸하는 철저한 일부일처제 옹호파입니다.’하고 비웃음 살 만한 싸움을 걸 수도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좋아하지 않는 화제가 시작된 것에 낭패감을 느끼며 자리를 빠져나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이곳에 머물다가 근처에 있는 카네시스와 합류해 정찬에 초대할 예정이었고, 발렌틴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가량이 남아 있었다.

‘먼저 돌아갈까.’

말없이 먼저 가버리는 것도, 발렌틴을 혼자 이런 자리에 내버려두고 가는 것도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구석에 묵묵히 서 있는 오언과 엘레나를 흘끔 쳐다본 후,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글라디스에게 말했다.

“제가 데려온 사람들은 남편의 하인들이에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은 북국의 남자이시고요.”

“그 북국의 신사분도 오늘 같은 날에 2층으로 따라가지 않고는 못 배기셨을 겁니다. 그분이 자기는 즐기시고 부인께만 부자유를 강요하는 소인배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드리아나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다가 곧 평정을 되찾으며 어깨에 두른 숄을 당겼다. 나머지 여자들만 봐서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려도 될 만한 인물들이었으나, 생일을 맞아 모처럼 사교에 나온 글라디스가 문제였다.

“…어쩔 수 없죠. 이 방으로 들어오는 남성들 중에 제 마음을 돌려놓을 만큼 매력적인 남성이 있기만을 바라겠어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부인들이 깔깔대며 좋아라고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적당히 같이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외모를 따지는 눈이 아주 높답니다. 우선 웨버 경보다 키가 작은 남자에게는 말을 섞는 것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군요.”

“걱정 마세요, 부인. 저도 키가 큰 쪽을 선호하거든요. 틀림없이 부인의 남편분보다 더 큰 남자도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모두 잘생기고 매너 좋은 신사분들이죠. 같은 남자를 두고 서로 다투지나 말기로 해요.”

글라디스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뜻밖의 난관에 약간 초조함을 느끼며,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입 밖에 꺼내도 될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잘 유지해온 평판에 치명적인 금이 가게 될지도 모르는 언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다른 부인 하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생글대며 말을 대신 꺼내주었다.

“웨버 부인의 남편 분은 어느 정도로 북국인에 가까우신가요? 제 말은, 그분의 신체구조가 우리네 남자들과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전부터 아주 궁금했거든요.”

“사뭇 다르시죠. 아주 심각하게.”

아드리아나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여자들 상대로 이 정도 말도 못한다면 여길 빠져나갈 수 없다고, 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제 남편보다 키만 커서는 안 될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말하자, 글라디스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부인께 가장 먼저 남자들의 바지 속을 확인해 보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우신 부인께서 원하신다면 다들 기꺼이 바지를 내려주실 거예요. 부디 눈에 차는 상대를 고르시길 바랍니다.”

그 여리여리한 외모와 후작 앞에서의 순종족인 태도에 속아서는 안 될 여자였다. 과연 능구렁이 주셉 후작의 첫 번째 부인 자리를 지킬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아드리아나는 다시 하인들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남자들을 벗겨보고 나서 양에 안 찬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천하의 오만불손한 여자 흉내를 내며 ‘남자들이 수준 이하라 어울리지 못하겠다.’ 하고 연기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러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 속을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들과 만난 후에 거절하는 일이, 지금 거절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것도 당연했다. 애당초 남자들이 아니라 글라디스를 거절하는 게 곤혹스러운 것이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도시인지, 여자인 자신도 이렇게 거절하기 힘들게 강요받는데, 남자인 발렌틴은 얼마나 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왔을지, 걱정을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이윽고, 남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를 소인배로 욕먹게 하더라도 그 핑계를 대며 도망치자고 결정하고, 아드리아나는 오언을 향해 어서 끼어들어 달라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오언은 버클리에게 완력을 쓰던 때와는 달리, 지체 높은 부인 앞에서 감히 뭐라 끼어들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듯했다. 엘레나도 나서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글라디스 영부인, 다른 오락에 얼마든지 어울릴 테니 이번만은 용서하여 주세요. 남편과의 약속은 물론이고 제 신념이나 흥미에도 맞지 않아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기를 감수하고, 솔직하게 양해를 구했다. 발렌틴의 일에 얼마나 지장이 생길지는 몰라도, 아내의 행실보다는 일에 지장이 생기는 편이 나을 게 틀림없었다.

글라디스는 대단히 실망하는 얼굴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할 수 없군요. 부인의 감별을 통해 북국인과 물건을 견줄 수 있는 남자의 수준에 대해 알게 되려나 내심 기대했는데, 아쉽지만 청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 계단으로 내려가면 남자들을 방해하게 될 터이니, 안쪽 방 하나를 빌려서 쉬도록 하세요.”

아드리아나는 아예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남자들을 방해한다는 건 핑계일 뿐, 중간에 이탈자를 만들어 비밀 유지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임을 알고 순순히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다른 자리에서 부인들끼리 모여서 재미로 물건을 걸고 카드게임을 할 때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여기 끼어버린 셈이고, 남편에게나 개인적으로 해명해야겠지.’

아드리아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엘레나와 오언을 방 안에 두고, 아드리아나는 혼자 테라스로 나갔다.

옆방의 발코니가 훤히 보여, 여기에도 오래는 못 있겠다고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2층으로 내려갔던 남자들 중 두 명이 그곳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러 나온 모습을 발견했다.

“앗!”

순간 아드리아나는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님, 위험해요.”

엘레나와 오언이 정색하며 다가왔다.

소란을 들은 남자들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발렌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드리아나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집게손가락을 자기 입술 앞에 대었다. 함께 있던 신사도 실실 웃으며 부부를 쳐다보았다.

“저이가….”

아드리아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 자신과 똑같이 테라스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에 혼란과 안도감이 섞이는 것을 느꼈다. 잠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발렌틴도 조용히 2층 안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단지 자기 아내를 보고 미소 짓고 있을 뿐인데도, 아드리아나는 그와 다른 사람 앞에서 간지러운 애정행각이라도 벌이고 있는 기분이 되어서 부끄러워졌다.

문득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드리아나가 잠시 응접실 밖의 기척에 신경쓰고 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어, 어디 가셨지.”

아드리아나는 남편을 믿으면서도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어 안절부절 못 했다. 그러다 얼마 후에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내려갑시다, 부인.”

발렌틴의 얼굴을 보고 아드리아나가 당황하여 눈을 깜박이자, 그가 재촉했다.

“사람들 들어오기 전에 얼른 나와요.”

아드리아나는 그를 따라 서쪽 계단으로 통하는 긴 복도를 지났다. 복도 안에는 이따금 지나는 하인을 제외하면, 아드리아나와 발렌틴 일행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부인을 억압하는 소인배라고 소문 날 거예요.”

“난 원래 소인배야.”

그가 뻔뻔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어렴풋하게, 태운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그의 옷과 머리카락에 스며든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글라디스 영부인이 앙심을 품으시지는 않을까요?”

“왜 내 부인을 놀리느냐고 말했소. 내가 당신을 발견할 줄은 몰랐겠지.”

아드리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발렌틴이 표정이 조금 불쾌해하는 얼굴로 변했다.

“그 여자가 당신을 놀린 거야. 부인들이 당신더러 백작 부인 어쩌고 하니까 장난질을 친 거야. 사람을 그딴 곳에 가둬두다니….”

“그럼 당신은요? 당신들도 다른 남자들을 기다려주던 게 아니었나요?”

“남자들은 1층으로 갔소.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나서 2층에 남아 잠깐 이야기하던 거였고. 끼지 않겠다고 사양하면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잖소?”

“하지만 제게는 마치 특별히 봐주신다는 것처럼 구셨어요.”

발렌틴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놀린 거야. 하인들이 있었으니 무슨 짓이야 안 당했겠지만, 당신에게 더러운 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했을 여자야.”

“전 방에 문 잠그고 있었어요, 여보. 아무것도 못 봤을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남편의 기분을 달래주려고 그에게 팔짱을 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잠깐 놀란 빛을 보이기는 했어도, 그가 속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는 몰랐다.

“아까는 왜 웃으셨어요? 절 보고 기뻐하시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거기서 보이는 게 일이 뻔하니까…. 뭐라고 우겨서 거기로 빠져 나온 건지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고, 내가 안 봤으면 혼자 거기서 기다렸을 걸 생각하니 열이 받고….”

“당신 원래 담배 피우셨어요?”

아드리아나는 글라디스 때문에 마음을 상했던 일은 완전히 잊고, 발렌틴의 팔에 매달려서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질문을 연발했다.

“…상대에 따라 술이냐 담배냐 하나는 꼭 택해야 할 때가 있소. 좀처럼 드문 일이지.”

“당신도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시는군요.”

아드리아나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틴 본인 말에 따르면, 술을 먹으면 잔실수를 하는 경향이 있어서 밖에서는 한 잔 받고 이후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양한다고 했다.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지키기 고된 결심일 터였다.

“…안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참 힘드네요.”

지친 목소리를 내자, 발렌틴이 살짝 한쪽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런 나약한 말은 마오. 당신이 고상하신 백작 부인이 된 덕에 나까지 신분 상승하고 좋은데.”

“아휴, 낯간지럽게 누가 그런 말을 지어낸 걸까요?”

“당신과 레빙턴 부인에게 잘 보이려는 여자들 아닐까. 대놓고 싸움꾼이나 새침데기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소. 당신이 투덜이라는 사실이야 나만 아는 거라고 쳐도.”

“제가 싸움꾼에 새침데기에 투덜이라고요?”

아드리아나가 입을 잔뜩 내밀고 눈을 흘기다가, 정말이네 하고 입술을 집어넣었다.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게 몸에 익고 있는 부작용이 아주 나빴다. 웃는 얼굴로라도 남편에게 자꾸만 쏘아대다니.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놓더니, 손을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카네시스한테 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지. 펜을 남겨놓고 갑시다.”

“당신이 운전하시려고요? 피곤하시잖아요, 여보.”

“엘레나가 있잖소. 차에서 나 어깨 안마해 줘.”

엘레나가 운전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아드리아나가 놀라워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남편의 손에 잡혀서 뒤를 돌아보는 채로 끌려가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엘레나가 상냥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

자신의 나쁜 태도를 반성하며 남편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집에 돌아와 보니, 기다리던 연락이 한 통 들어와 있었다.

우편으로 도착한 걸로 보아, 이 내용이 준비된 시기가 적어도 일주일 전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부당한 모함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리노아스 남작을 고발하겠다는, 제롬 버클리의 대리인으로부터 보내진 통첩장이었다.

============================ 작품 후기 ============================

당초 '폭발'과 '해갈'사이에 들어갈 이 챕터를 빼고 빠른 진행을 하려고 했었는데, 결국 전체 스토리 진행상 빼면 안 될 것 같아 회당 분량을 늘리는 걸로 하고 넣게 되었어요ㅜ.ㅜㅋㅋ

오늘 너무 늦은 시간에 올리네요. 못 주무시고 기다리신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ㅜ3ㅜ(다행히 없다)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S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