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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88화 (88/140)

00088  폭발  =========================================================================

부인이 사제와 아드리아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자기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어머나 참, 내 정신 좀 봐. 명단을 새 걸로 바꾼다고 와놓고서는 도로 들고 나가려고 했네요.”

그녀는 멋쩍어하면서도 활짝 웃었지만, 사무실 안의 다른 어느 누구도 미소 짓지 않았다.

버클리는 진즉에 눈을 피하고 있었다.

차마 염치없거나 미안해서가 아닌,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이는 눈이었다.

부인이 아드리아나가 서 있는 책상 옆으로 다가와서 그 위에 붙어 있는 안내문과 담당 성직자 명단을 확인하며 교체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투로 뭔가 떠들었지만, 아드리아나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마 버클리의 귀에도 들리는 게 없었을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천천히 모자를 다시 쓰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발걸음을 뗀 버클리가 빠른 걸음으로 아드리아나를 스쳐 지나서 일하는 부인 뒤로 자리를 옮겼다.

또각또각, 차갑게 울리는 자신의 구두 소리만 들렸다.

이 순간이 그에게도 영원처럼 느껴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의 기분이 더러웠던 만큼, 그 역시 낭패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만은 틀림없었다.

아드리아나와 그 사제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적어도 엘레나는 눈치 챈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는 눈으로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을 뿐, 조용히 곁을 지켜주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기분이 최악인 상태였다.

“그래, 돌아올 생각이냐.”

아버지의 그 오만한 말투에 화를 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도 버클리도 이기적이고 유치한 사람들이라는 가벼운 경멸이 느껴졌다.

“…제 권리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드리아나의 입에서 그만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버지를 향해, 아드리아나는 어깨를 펴고 서서 눈을 내리뜬 채로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옆에 선 어머니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시야 안에 잡혀 있었지만, 지금은 마음 어딘지가 너무 지쳐서, 표정을 바꾸는 일 정도도 힘들게 느껴졌다.

“지금 나와 싸워보겠다는 거냐?”

아버지가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드는 수고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직도 버클리의 얼굴이 잔상처럼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싸우지 않고서는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을 수도 없나요? 저와 그리도 반목하시고 싶으신가요? 아버지의 가문을 이어드릴 자식이 저 한 명뿐인 줄 알았는데요.”

떠오르는 대로 마구 내뱉고 나자, 아버지가 큰 소리로 헛기침했다.

멍한 정신을 깨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화를 내든 뺨을 때리기 위해 쫓아오든 자신과 무관한 일인 듯 여겨졌다. 물론 후자는 성공하지 못하리라. 남편이 붙여준 경호원이 곁에 있었으니.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어.’

그런데도 왜 모두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무엇이 두렵고 화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자 때문이야. 전부 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아드리아나는 그들의 대화를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그래도 다음의 말은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물건을 집어던져 부술 때처럼 고막을 흔드는 투로 말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으면, 어디 말해봐라!”

그는 먼저 테이블 앞으로 척척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아드리아나는 바로 그를 따라가지 않고 입구에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을 사위로서 정중하게 대접해 주세요.”

“…뭐라고?”

“그분은 남작님께서 함부로 업신여겨도 될 분이 아닙니다. 마티아스 스콰이어 경에게 하려던 것과 똑같이 예의를 갖추어 주세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리시고 스콰이어가 저를 보호하지 못했을 때, 대신 저를 살리고 보호하신 분입니다.”

아버지가 당혹감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드리아나는 그제야 테이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버지와 떨어진 대각선 자리에 앉은 후 다시금 말을 이었다.

“…계승서열에서는 밀려나 있으나, 웨버 경은 투스미아 대귀족의 귀한 후손이십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소개시켜주신 적 없는 왕족들을 그분과의 결혼식에서 알현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자세한 것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그분이 테스카에서의 하시는 일과 신분만으로도 남작님의 사위 될 자격이 넘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이넨에 들어온 기업 중에는 왕가나 귀족 가에서 직접 투자하고 경영하는 곳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천한 상인으로 취급받고 멸시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겠죠.”

아버지는 입이 굳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 위에 두 주먹을 쥔 채로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입을 연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럼 네 남편도 본래 귀족이라는 말이 아니니.”

“네. 하지만 제 남편이나 시부모님께 작위가 없는 것은 사실이고, 저희는 앞으로도 테스카에서 지금처럼 지낼 생각이에요. 지금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시고 미우시다면 저도 뭐라고 드릴 말씀은 없어요.”

어머니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나섰다.

“아니다, 얘. 남을 부릴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스스로 성실하게 일하고 노력하는 삶을 택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니. 그렇게 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겠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봐요, 여보. 장사라고는 해도 결국 얘 남편도 그 회사라는 곳 꼭대기에서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어요. 그런 신분에 오르기까지 어디 배경 없이 가능했겠나요? 일로 만나고 다니는 상대들도 전부 귀족들 아니면 왕족들이라니 천한 신분을 가진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제 고집은 그만 부리세요, 여보.”

“어험!”

아버지가 크게 기침을 터뜨리며 어머니에게 무섭게 눈총을 주었지만, 어머니는 전처럼 움츠러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넌 뭘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냐.”

아버지가 아드리아나를 향해 차갑게 물었다. 아까처럼 기세등등하고 투지로 불타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일이 아드리아나의 뜻대로 되는 게 마뜩지 않다는 듯한 시비조가 거슬려서 아드리아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처음부터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야 무조건 순종했고 대화자체가 드물어서 몰랐지만, 갈등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발렌틴 부자간처럼 정다워질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왔다.

“제 남편이 받아 마땅한 몫을 받게 해주세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주시고요.”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건 손아랫사람이다. 아비가 너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란 말이냐?”

아버지가 발끈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드리아나는 점점 그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마주하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 되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타이르는 투로 다시금 아버지를 설득했다.

“여보, ‘사위로서’라고 아까 애가 말하는 걸 들으셨잖아요. 그럼 당연히 사위에게도 예의를 차려야지 천민들처럼 예의 없이 막역하게 대할까요. 하물며 신분이 낮은 사람도 아니라는데요.”

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이 없었다.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수긍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아드리아나는 생각했다.

잠시 후, 아드리아나가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요.”

“그래야지, 얘야. 어서 오렴. 준비가 다 되었나 모르겠네.”

먼저 몸을 일으키는 어머니를 따라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향해, 어머니가 ‘어서 오시지 않고 뭐하세요’하고 재촉했다.

마지못한 듯 식사 자리에 어울리며, 아버지는 평소보다 더 과묵했다.

아드리아나는 개의치 않고 조용히 식사를 했다. 어머니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긍정적인 답이 나올 만한 질문을 하면, 아버지에게 들으라는 듯이 어느 부모라도 흡족하게 들을 만한, 품위를 지키고 사는 생활에 대해 들려주었다.

“왜, 전에 얘가 타고 왔던 마차도 그냥 물건이 아니었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명마들은 돈을 준다고 해도 손님을 가려서 파는 말들이라고요.”

“난 그때 나가지 않아서 보질 못했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에 반박은 못하고 타협하려는 듯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아직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며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까처럼 쏘아붙이는 말을 삼가고 공손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서 한결같이 미소 띤 얼굴로 이쪽저쪽에 말을 전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존경스러웠다. 대단한 관용과 인내 없이는 이런 자리를 중재하며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당신도 좋으시겠어요. 성을 사위와 딸에게 물려주실 수 있게 되셔서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아드리아나에게로 향했다.

“네가 알지 모르겠다만, 귀족도 아닌 자에게 덜컥 왕국의 땅을 맡길 수는 없는 거야. 격에 맞는 자가 물려받아야 하는 무거운 자리이지. 반반한 건달들이 영애를 꾀어내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재산을 손에 넣고 무가치한 일로 거덜 내는 일도 많다.”

아드리아나의 표정이 조금 굳는 걸 보고, 어머니가 또 재빨리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얘 남편은 우리보다 재산이 많았으면 많았지 모자라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존경받으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을 어찌 건달하고 비교하세요? 게다가 그 사람 만났을 때, 아드리아나는 알거지나 다름없었어요.”

알거지라는 단어에 멍해져서 무표정한 얼굴로도 그만 풋, 하고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드리아나는 얼른 냅킨을 들어 얌전하게 입을 닦았다.

“…그이는 허튼 일에 사치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사내들이 빠지기 쉬운 유흥에도 관심이 없으시고요. 요즘 그분의 수입 관리하는 일을 세무사 선생에게 같이 배우고 있는데, 청렴결백이란 말이 그분만큼 어울리시는 분도 없을 거예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며 말하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버지는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어머니는 거기에 더한 말을 보탰다.

“솔직히 난 마티아스 경보다 우리 사위가 훨씬 마음에 들어요. 가문도 가문이지만, 사람의 됨됨이가 훌륭해야지요. 스콰이어 가에 갔더라면 이 애가 이렇게 존중받고 웃으면서 지낼 수나 있었을까요? 살아 돌아오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그때는 정말로 딸을 잃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머니는 옛날 일이 생각난 듯, 냅킨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소.”

아버지가 변명의 말을 이었다.

“그때는 아드리아나가 철없이 잘못을 하지 않았소?”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드리아나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겨우 화해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본인이 했던 결정의 정당성을 변호하기를 우선하기로 한 듯했다.

“교회에다 재산을 바치는 것도, 어찌 보면 그렇게나마 그 친구에게 죄를 갚는 길이 될까 생각도 했었소.”

“…무슨 죄요?”

아드리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때 일 말이다.”

아버지는 어느새 또 흥분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고지식하고 꽉 막힌 사람이기는 했어도, 냉철하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점괘 하나가 아버지를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갔다.

“남의 불행이니 이 얘기는 안 하려고 했다만, 제롬 군은 그때 귀한 여성과 약혼 중이었다. 그런데 네 일로 파혼이 되었다고 하더구나. 그 일로 네가 행실 나쁘다는 소문이라도 퍼졌으면 어찌 되었겠냐.”

그 말에 ‘왜’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왜 과거에 지나쳤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결말을 보여주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래서요?”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며, 아드리아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날 그자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늘 궁금했어요.”

아드리아나의 물음에 아버지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마 말하기도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이 시뻘게졌다.

“다 지난 일이야. 제롬 군에게도 최소한의 보상은 했다. 리노아스의 주임 신부가 되면 수입이 나쁘지는 않겠지.”

“보상이라뇨? 아버지가 그자를 불러들이셨나요?”

아드리아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보상을 한다면 그자가 해야죠! 그자가 보상하라고 그러던가요? 제가 그자를 유혹이라도 했다고 하던가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분노와 혐오감으로 가슴속이 시커멓게 물드는 것 같았다. 하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식당 입구에 오언과 엘레나가 나타났다.

아버지가 그들을 향해 불쾌해하는 눈길을 보낸 후,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늘 하녀애를 내보내고 제롬 군과 둘만 있고 싶어 했다고 하더구나.”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잘못 아셨다며 정색하고 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드리아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언과 엘레나가 가로막았지만, 밀쳐내고 나가는 아드리아나를 감히 무력으로 막지는 못했다. 쉽게 따라잡힐 터였지만, 어차피 그들을 따돌릴 생각은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생활관 안으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입구에 매여 있던 말 위로 올라탔다. 서툴게 출발시키며 살짝 휘청했지만, 고삐를 단단히 쥐고 말머리를 성 밖으로 향한 후 있는 힘껏 박차를 가했다.

“마님!”

마굿간이 꽤 떨어진 곳에 있었음에도, 아드리아나가 성 앞을 겨우 벗어났을 때 두 사람이 바로 뒤쫓아왔다.

“마님, 고정하세요. 그자를 만나실 셈이세요?”

엘레나가 옆에서 말을 달리게 하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말에서 떨어질까 봐 앞만 보고 달렸다. 억울하고 분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 그자에게 잘못한 게 없어. 내게 엎드려 빌어야 하는 건 그자야.”

============================ 작품 후기 ============================

제가 또 지난 화 분량 가지고 말짓을 해드려서..ㅡㅜ 그래도 너그럽게 다시 보아주시고 코멘을 또 달아주신 상냥한 분들이 계셔서 마음의 이득을 보았어요^.^(왕반지 낀 아드리아나가 떄린다)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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