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아드리아나 클로제에 관한 예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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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쉬 공작이 마음에 들면 가지라고 내놓은 그 배라면, 아이넨에서 구할 수 있는 그 어떤 물건에 뒤지지 않을 터였다.
발렌틴은 졌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너그러움을 발휘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만 알아보고.”
아드리아나는 기뻐하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뭘 알아보겠다는 건지 몰라도, 그에게 있어서도 귀한 물건을 빌려주는 일일 테니 충분히 긍정적인 대답이 되었다.
며칠 뒤, 발렌틴이 후작의 앞으로 편지를 썼다. 아드리아나가 그에게 청한 대로, 만약 ‘공주님’이 원한다면 결혼식을 위해 자신들의 배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그 유람선이 투스미아의 어느 높은 귀족에게서 하사받은 물건이며, 케이드 왕자에게 만들어준 것의 전신 모델인 더 성대한 버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답장은 그 며칠 뒤에 아드리아나의 앞으로 왔다.
「이것은 청첩장이에요. 웨버 부인과 부군을 제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어요. 제공해주시는 배를 기쁘게 사용하겠어요. 그날 바쁜 일이 있다면 사양하셔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참석해주세요. 만약 부인이 저와 제 남편에게 축가를 들려준다면, 부인이 원하는 것을 뭐든 선물해 드리겠어요.」
높고 또박또박하면서도 다소 빠른 어조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아드리아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웨버 부인이 앞에 적혀 있는데다 ‘웨버 경’ 대신 ‘부군’이라고 칭한 것도 너무 우스웠다.
“‘뭐든’ 주겠다는군. 누구처럼 첫날밤에 남편에게 한소리 들을 여자 같지 않소?”
발렌틴이 웃음기 띤 투로 말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느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아드리아나의 뒤로 다가와서 편지를 훔쳐보고 있었다.
“여자끼리의 편지를 훔쳐보시다니 못된 신사분이시군요.”
아드리아나가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다. 발렌틴은 혼내지 말라며 의자 뒤에 선 채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있던 아드리아나의 입술 위에다 자기 입술을 포갰다.
그에게 닿자마자 작게 들뜬 비음이 흘러나왔다.
“발렌틴….”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고, 아드리아나가 상기된 얼굴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자신의 한쪽 뺨과 머리카락을 감싸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그에게 짐짓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그에 발렌틴은 5분 안에 돌아오겠다며 몸을 돌렸다.
아드리아나는 욕실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러다 손 안의 편지를 의식하며 말했다.
“당신 덕분에 특이한 분과 사귀게 되었네요.”
발렌틴이 뒤돌아보며 살짝 불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닐걸. 그 여자는 처음부터 당신과 사귀고 싶었던 걸 거야.”
“…저를요?”
“부인들에게 인기가 많아 좋겠군.”
발렌틴이 말했다.
곧 욕실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이 아드리아나의 시야에서 감추어졌다. 이윽고 들려오기 시작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여름날의 빗소리처럼 상쾌하게 들렸다.
‘…나는 잘 해나가고 있어.’
아드리아나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리고 ‘마리안느’라는 이름으로 발신되어 온 편지를 잘 접어서 봉투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이제는 남편의 일에 동행하면서 실수하고 긴장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이번 일의 경우에는 순전히 상대가 좋았다는 운도 따라주었지만,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어도 상대를 실망시키는 일 없이 해결될 수 있어서 기뻤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으나, 자신처럼 가정사에 아픔을 가진, 마음에 드는 친구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넌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멍청한 생각이라고 빈정거리던 그 험악한 목소리도. 그럴 때면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아버지를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괴로워졌지만, 정말 가족과 의절하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서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괜찮으신지…. 내일은 어머니께 전화를 해봐야겠어. 이젠 바르테즈가 받아도 상관없어.’
*
커튼을 치지 않고 잔 탓에,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드리아나는 눈꺼풀 안쪽까지 비추고 들어오는 강렬한 빛을 피하려 꿈지럭거리며 몸을 돌리고 누웠다.
끄응, 신음하며 남편의 가슴을 찾아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의 팔이 아드리아나의 팔 위로 둘러졌다. 아드리아나는 남편의 체향을 맡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나 포근해서 행복한 기분으로 단잠에 빠지게도 하고, 어떤 때는 흥분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지금은 그 양쪽 모두였다.
어젯밤의 정사가 남긴 열기와 피로감이 다시금 몸을 나른하게 데웠다.
아드리아나는 어제 너무 흥분해서 맨 정신으로는 못할 주문을 남편에게 했었다. 정사 중에 자신의 안을 뜨겁게 채우고 파정하며 불끈거리는 존재를 느끼다가 문득, 그가 정액을 내보내는 순간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발렌틴은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며 멍하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지금은 많이 안 나올 것 같으니까 다음에’라고 대답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남편의 얼굴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자고 있던 그가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껌벅이며 아드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기억하시겠지?’
자기는 기억력이 별로 안 좋다던 그의 말 때문에 약간의 불신이 들었다. 발렌틴이 중요한 일이나 약속을 잊는 일은 없었지만, 건성으로 가볍게 한 말이나 스쳐 지나친 사람의 존재 따위는 잘 기억을 못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잊혀서 없었던 일이 된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그에게 다시 그런 말을 할 용기는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발렌틴이 가만히 아드리아나의 등을 쓰다듬고 있다가, 뒤척이며 몸을 밀어붙였다. 상체를 밀착하고 그에게 꼭 끌어 안겨서 비비적대며, 아드리아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흘렸다.
어제는 분명히 지쳐서 며칠은 못 하겠다고 나가떨어졌는데, 벌써 관심이 온통 그의 중심으로 쏠렸다. 지금 그의 하반신 상태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오드리, 무슨 생각해?”
가만히 움츠리고 꼼짝 않는 모습이 수상했는지, 느닷없이 발렌틴이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지레 양심이 찔려서 얼굴을 짙게 물들이며 창피해했다.
“여보…. 제가 너무 밝히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해요?”
“아.”
갑자기 발렌틴이 작게 웃어댔다.
“난 당신이 심란해하는 줄 알고 물어봤어. 오늘 리노아스에 전화할 거라고 했잖아.”
“윽….”
“부인, 요즘 무리하시는 것 같소. 벌써 또 하고 싶어 할 줄은….”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허벅지를 들어서 자기 허리에 걸쳤다. 그대로 밀착하자, 잠옷 너머로 은근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 부피감이 배를 압박했다.
“모, 못해요.”
“힘들어?”
그는 다정하게 물으며 아드리아나의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하고는 싶은데 힘든 건가.”
“아, 아니에요. 몰라요.”
아드리아나는 그가 몸을 누르는 통에 뜨뜻해지기 시작한 다리 사이와 초조하게 달리는 심장의 반응이, 조금 속상해질 정도였다.
쾌락에 약하다는 자각이 있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음란한 생각이 들거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흥분하지는 않았다. 오직 남편에게 뿐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꿈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에게 갈증을 위로받거나 채워지고 싶다는 열망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이건 천성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폭로한 예언처럼…. 그런 의심이 들었다.
발렌틴은 딱히 여자가 수치도 모르고 욕망을 드러낸다고 꾸짖은 적이 없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와 밤을 보내고 난 후 이성이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육체적인 쾌락에 너무 몰두하며 지나친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여보, 혹시 제가 거북한 말을 했다면 잊어주세요. 절 미워하시면 안 돼요. 너무 흥분해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어요.”
아드리아나가 슬픈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발렌틴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후회하는 거로군. 난 좋았는데.”
“기분 나쁘지 않으셨어요?”
“난 어제 당신이 사정하는 걸 보여 달라는 말도 진지하게 고민했단 말이야. 며칠 금욕한 후에 보여줄까도 생각했지. 당신이 시각적인 걸로 즐거운 자극을 받는다면 기왕 하는 거 충격적일 정도로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여, 여보.”
아드리아나는 손으로 그의 입을 막으며 쩔쩔맸다. 이런 사람 앞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외설적인 요구를 했다고 반성을 하다니.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발렌틴이 허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아이 참, 오늘은 할 일이 많아요. 전 전화도 해 봐야 하고, 일찍 당신하고 외출하고 싶단 말이에요.”
아드리아나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발렌틴은 얼마간 더 아내의 허리의 매달려 있다가 겨우 떨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좋다고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해놓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일어나세요, 여보. 아침을 드셔야죠.”
아드리아나가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식히고 나서, 그의 배를 문질러주며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이나 뽀뽀해주고 달래주며 그를 일으켜놓고,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
‘아휴, 아기까지 태어나면 정말 바빠지겠어.’
아기가 태어났다고 그에게 응석부리지 못하게 하면 그도 나름대로 서운해질 것이다. 아이와 남편을 공평하게 사랑해주는 것도 언젠가 닥쳐올 숙제겠다고, 아드리아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고민뿐이었다면 좋으련만, 곧 달콤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식사 후, 아드리아나는 리노아스로 전화를 걸며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랬다. 정말이지 목에 걸린 가시 그 자체였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통화도 못 하도록 조치를 하지 않았을지, 그런 최악의 상황도 생각을 해야 했다.
어서 바르테즈가 전화를 받기를 원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를 듣기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수화음이 끝났다.
“리노아스 남작관입니다. 어디십니까?”
“나예요. 다른 말은 하지 마시고 어머니께 전화를 바꿔주세요, 바르테즈.”
속으로 수십 번 되뇌어봤던 말을 단번에 내뱉었다.
아마도 마리안느 공주라면 연습할 필요도 없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명령을 쏘아댈 수 있겠지, 하고 그녀를 떠올리자, 조금이나마 마음의 안정에 보탬이 되는 듯했다.
“얘야, 어미다, 아드리아나야. 지금 집이니?”
어머니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마음고생을 시켜드렸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지만, 아드리아나는 우울한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연락을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아직 전화를 하기가 조금 어색하네요. 저는 집에 잘 돌아와 있어요.”
“그래, 그러면 됐다. 전화가 없는 곳도 많은데, 뭘.”
아드리아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아드리아나가 걱정하는 것만큼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며 안심시켜주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네 아버지가 뭘 하실 수 있겠니. 말씀만 그리 하시는 거야. 우리처럼 나이를 먹고 무슨 힘이 있다고 네 남편에게서 너를 빼앗아 오겠어. 그때 네가 데려왔던 커다란 남자 때문에 너를 여기다 가둘 생각도 못하셨잖니.”
어머니가 위기의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을 해서, 아드리아나도 조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과 같이 갈 걸 그랬나 봐요. 그이 얼굴 보여드릴 기회를 버리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아니다, 얘. 자책하지 말거라. 금방 볼 수 있을 거야. 남작님도 조금 궁금해 하시기는 하더라.”
“설마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내심 놀라워하며 묻자, 어머니가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그게, 대체 어떻게 생긴 작자인지 궁금하다고….”
“어머니….”
아드리아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풀어져서 웃었다.
“참 왜 그러시는지 나도 모르겠구나. 한 분의 신을 믿기로 하셨다면서, 루나신을 섬기는 노파가 한 예언 따위에 아직도 그리 얽매여 계시다니.”
“…정확히 무슨 예언이었는지 어머니도 아세요?”
아드리아나는 줄곧 마음에 걸려왔던 탄생 시 예언이라는 것에 대해 물었다. 역시나 석연치 않은 내용뿐이었는지, 어머니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며 ‘틀린 예언이라는 것만 알고 들어다오.’하고 당부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당시 클로제 남작이 태어날 아이가 아들일 경우와 딸을 경우를 대비해 이름을 두 개 지어놨는데, 점술가 노파는 딸이라고 단언하며 아드리아나 클로제라는 이름 옆에다 이런 내용을 적어주었다고 한다.
-미색이 빼어나고 기예와 학문에 능한
범상치 않은 출중함을 타고날 것이나,
운을 받쳐줄 기력이 약하고 정욕은 강해,
어린 나이에 남자에 의존하며 음행에 눈뜨고
자기 인생과 가문까지 망칠 징조가 있다.
도덕성을 엄격하게 강제하는 종교와 관련이 되는 것이 이로우며
약혼은 늦게 17세 이후로 미루는 것이 이롭다.
공작 가의 남자를 만나면 공작 가의 영부인이 될 것이며,
천한 남자를 만나면 창기가 될 것이다.
18세가 되기 전에 사생아를 낳을 고비가 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평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요 며칠 부자된 기분이어요. 무사히 완결내고 제 소장용으로 책을 만들어서, 독자님들 남겨주신 코멘과 닉네임도 쫙 넣고 내지 첫페이지에다가는 팬아트를 칼라로 뙇 넣으면 엄청나겠지..하악..하고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스케일의 상상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