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아드리아나 클로제에 관한 예언 =========================================================================
※낮에 추가로 올리는 화입니다. 지난 자정쯤에 올린 81화가 이전에 있습니다. 최신화 클릭해서 보시는 경우 참고해 주세요.
리노아스에 다녀온 후로도 아드리아나는 평소처럼 씩씩하게 지냈다. 시시때때로 아버지의 음성이 되살아나 멍해졌지만, 거기에 몰두해 있지 않으려 바쁘게 움직였다.
테스카 성 고유의 규칙에 관해 설명하는 캐롤의 가르침을 집중해서 듣다가도, 소니아의 친한 이웃들을 모두 불러들여 오찬을 대접하면서도, 불현듯 머릿속으로 찾아드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싸우며 아드리아나는 무기력해져버리고 싶은 유혹을 떨쳐냈다.
금요일은 발렌틴의 회사 일로 테스카 성 연회에 동행하기로 한 날이었다. 오늘의 일을 잘 다녀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일 함께 그와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오늘도 해안을 볼 수는 있겠네요.”
엘레나가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고, 한껏 화려하지만 천박해 보이지 않도록 정성들인 화장을 받고 있었다. 허리를 세게 조이는 데다 소매와 치맛자락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때문에 답답해서 살짝 씩씩대며 숨을 쉬고 있었다.
“후작님을 보러 갈 때마다 고생이시네요. 본인이 사치를 부리기 좋아하시는 건 그렇다쳐도 손님에게까지 이 고생을 시키시니.”
엘레나가 눈썹을 까닥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능숙하게 움직이며 아드리아나의 옆 머리카락을 조금씩 집어 가늘게 땋아 내려가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거울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테스카를 잘 꾸리고 있으니 뭐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영지민들을 골고루 굽어 살피는 일에도 좀 신경 써 줬으면 좋겠네. 부유층이 이렇게 두터운데도 소외된 구역은 시골 지방보다 삭막하대.”
도시가 번성해서 일할 곳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굶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니아처럼 자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부유층 그룹도 있었고, 도움을 청하면 가진 자의 교양과 의무로 생각하여 충분히 베푸는 이가 널렸다. 그런데도 외곽의 일부 구역은 궁핍에 찌들어 있었다.
“예전에 언젠가는 그곳의 부랑자들을 추방하고 새로운 이주민을 받았던 때도 있었어요. 도시의 꿈을 안고 들어온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구역을 살려보려는 계획이 잘 안 된 모양이에요. 보호해줄 배경 없는 외부인들이 이 도시에 발을 들이면, 대개는 사치와 향락에 먼저 물들어서 소비되고 떨어져나가는 일이 많다고 해요.”
엘레나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처음 테스카에 와서 은행가 골목에 살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여보, 언제 끝나?”
문간에서 발렌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벽에 기대 고개를 기울이고 서서, 엘레나에게 가려진 아드리아나의 뒷모습을 보려고 기웃대고 있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주인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엘레나가 대신 대답했다. 아드리아나는 거울로 발렌틴의 모습을 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과연 그도 오늘은 짐짓 화려했다. 겉옷은 아직 걸치지 않았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흰색 셔츠가 상체 근육의 윤곽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허리에 이르러 넓은 바지의 밑위로 꽉 조여졌다.
아드리아나는 남편의 늘씬한 허리를 눈으로 더듬으며 셔츠 안을 상상하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도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는 데인 듯 시선을 거두며 얼굴을 붉혔다.
‘엘레나도 있는 앞에서 남편 몸이나 훔쳐보다니, 나도 참 뭘 하는 거야.’
민망해하며 슬쩍 거울 안의 남편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아드리아나가 한 생각을 다 알았다는 듯, 발렌틴이 입 끝을 쓱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더니 이내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천천히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
아드리아나는 부끄럽고 기가 차서 입을 삐죽거렸다. 자상하고 져주는 남편인가 하면, 저렇게 비웃는 듯 거만 떠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발렌틴과 자신이 얼마나 찰떡궁합인가 하면, 그 거만 떠는 행동을 볼 때마다 왜인지 가슴이 살살 녹으며 떨린다는 자각이 들 정도였다.
“중증이야. 가망이 없겠어.”
아드리아나가 무심코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소니아가 자신들을 보고 늘 하는 말이었다.
엘레나는 조용히 땋은 머리카락 가닥을 뒤로 묶어서 머리장식으로 고정하면서,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오드리.”
차에 타자마자, 발렌틴이 말했다.
“여자들끼리 어쩌고 남자들끼리 어쩌고 하면서 뜬금없이 갈라놓으려 드는 부류들이 있어. 오늘은 후작의 손님과 만나고 식사하자마자 돌아올 거야. 오후에 다른 일이 있다고 해뒀으니까 당신도 그렇다고 해줘.”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미혼 남녀라면 모를까,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고 무엇을 도모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설마하니 여자한테도 둘째 남편을 들이라고 종용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지도 모르지. 비공식적인 걸로.”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찌푸렸다.
“설마 후작님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나요?”
“후작이 아니라 성에 모이는 이들 중에 그런 자들도 많다는 뜻이었소. 후작이야 기혼자들은 건드리지 않지. 치맛바람이 막강한 부인들에게 무슨 원성을 들으려고.”
발렌틴이 후작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었지만, 그래도 아드리아나는 그가 썩 좋아지지 않았다.
주셉 후작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짝을 지어주기를 하도 좋아해서, 미혼 남성에게 각자 걸맞은 여성을 불러다가 정열의 밤을 선사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그것이 왜곡되어 기혼 남성에게조차 자기처럼 둘째 부인을 들이라고 꾄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헛소문은 차치하고서라도, 후작이 발렌틴에게 여자를 권한 일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면 호감이 가지 않았다. 결혼을 늦게 한 발렌틴이었으니, 남들보다도 유혹 당할 기회가 훨씬 많았을 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물론 내게 성실하시다고 믿지만….’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옛날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의 과거 일로 걱정하기에 급급했고, 그가 비교적 보수적인 기준에 맞춰 살아왔다는 사실을 아는 걸로 충분하다고 여기기로 하고 있었다.
“당신 왜 갑자기 혼자 삐쳤소?”
발렌틴이 점잖은 체하는 목소리로, 창밖을 바라보는 아드리아나에게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왜 제가 삐쳤다고 생각하세요?”
“나를 안 봐주니까.”
“제가 당신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을 돌아보며, 놀리듯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상체를 그의 앞으로 내밀며, 그윽하고 상냥한 눈길로 비스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게 좋으세요?”
얼굴을 꽤 바짝 댔는데도, 발렌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드리아나를 쳐다보며 ‘응’하고 대답했다.
“아주 좋군.”
아드리아나는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제가 아무리 사납게 굴어도 무서워하지 않으시니, 전 평생 당신에게 잡혀 살기나 해야겠어요.”
“그것도 좋지.”
그가 아드리아나의 말을 행동으로 나타내려는 듯, 팔을 아드리아나의 어깨 뒤로 두르고 가볍게 끌어안았다.
아드리아나가 빙그레 미소 짓고 있다가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다 입을 맞추었다. 발렌틴이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냈다.
“이런 데서 유혹하지 마, 여보. 펜이 없을 때 해.”
그의 속삭임에, 펜이 당장에 '제가 없으면 차는 저절로 갑니까?'하고 끼어들었다. 발렌틴이 씩 웃으며 마지못한 듯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감쌌던 팔을 풀었지만, 대신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스킨십이 잦아졌다. 엊그제 리노아스에 다녀온 후로, 발렌틴은 수시로 아드리아나를 안아주고 기대게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 일이 갑자기 생각나,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참, 미안해요, 여보. 다음 주에 리노아스에 같이 다녀오기로 한 약속도 취소해야겠네요.”
“왜? 예정대로 가지.”
“전 그렇게 대범하지 않단 말이에요. 다신 안 볼 것처럼 대들고 뛰쳐나왔는데 무슨 낯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시기 전에는 당신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곱지 못한 눈길을 받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버지에게 자신이 욕설을 들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날 못 보셔서 그런 거요.”
발렌틴이 말했다.
“그날 당신하고 같이 갔어야 했는데. 아마 날 보셨으면 남작님도 잘 대해주셨을 걸. 날 예뻐하지 않고는 못 배기셨을 테니까.”
“그럼요, 여보.”
아드리아나가 그의 얼굴을 쓱쓱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의 가문에 대해 아시게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사실은 아버지가 공작가에 심하게 연연하고 계셨거든요. 마티아스 경을 고른 것도, 단지 그분이 스콰이어 공작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왜 그리 거기에 얽매이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우리도 공작 친척쯤은 된다고 말씀 드리지 그랬소.”
발렌틴은 아무 문제도 없는 간단한 해결책이라는 듯, 즉각 그렇게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입을 조금 내밀며 우울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의 말에 너무 화가 나고 얄미워서 말하기 싫었어요. 그분의 바람이 이루어진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드레스의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아드리아나는 머리를 들어서 발렌틴을 쳐다보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 심술궂은 마음에서였네요. 제가 잘못을 하고 온 건가요?”
“잘못이라기보다는 실수 정도이지. 나 같았어도 말 안 했을 것 같소.”
그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나중에 사과드릴 기회가 있을 거야. 언제든 같이 가도 좋고. 남작께서 당신에게 상처 주신 일도 사과하셔야 할 테고. 부모가 자식에게 사과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발렌틴이 말끝을 흐리며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러다 보드라운 뺨에 손가락이 닿자 신기한 듯 살살 만져댔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잠시 내버려두다가, 다시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드리아나는 그날 리노아스에서 있었던 일을 반 정도 그에게 털어놓았었다. 말하다가 분한 마음에 북받쳐서 아버지에게 욕설을 들었다고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지금 발렌틴의 말을 들으니, 부모 자식 간에도 거칠고 막역하게 지내는 투스미아인의 가치관으로 보아도, 욕설을 하는 건 사과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나 보다고 서글프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얼마 후, 차가 테스카 성 앞에 멈추었다.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걸어서 성 안으로 입장했다.
성 안을 오가는 이들 중에는 벌써 눈에 익은 얼굴들도 있었다. 단골손님들이었다. 초대받지 않았어도 귀족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구역에는 각 처의 유력한 인사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드나드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가씨들도 꼬리 깃을 활짝 편 공작새처럼 스커트 뒤에 리본을 커다랗게 늘어뜨려 꾸민 차림으로 풍경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먼저 인사해오는 이들에게만 가볍게 목례해 답해주며 길을 지나쳐갔다. 발렌틴과 둘이 있을 때와 같은 다정하고 헤픈 미소는 말끔하게 지워낸 후였다.
남편과 함께 있을 때라도 너무 풀어져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나중에라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간교한 말솜씨로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가, 한 적도 없는 약속을 지키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이도 있었다.
“잘 오셨소, 웨버 경.”
주셉 후작은 반갑게 부부를 맞이해주고, 기다리는 손님에게로 안내했다.
“공주님께서 꼭 직접 만나봐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두 분을 오시게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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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감상 남겨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드리아나의 처녀성이 무사했던 것에 관한 의견도, 사실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인데, 글이 끝나기 전에 내용 안에 설명의 보완 부분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uu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좀 짧았으니 내일 점심 때 한 편 더 올릴게요! 아버지와도 나중에 가볍게 한 판 더 할 예정입니다[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