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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80화 (80/140)

00080  돌아오다  =========================================================================

아드리아나는 어머니에게서 몸을 떨어뜨리고, 아버지를 향해 예를 올렸다.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린 순간, 아버지가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다.

“그래. 네가 무사하니 되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이 멘 듯한 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응접실로 나온 카리나도 세 식구를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돌려주고 난 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건강하셨어요, 어머니?”

“그럼. 어미 걱정은 하나도 말거라.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네가 멀리서 오느라 배가 고프겠어. 지금 요리를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려무나.”

식당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아버지가 자리를 비켜주기에, 아드리아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풀었다. 어머니는 아드리아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카리나가 제 얘길 어떻게 하던가요?”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있는 대로 부풀리고 과장해서 미화했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짐짓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어머니를 얼마나 기쁘게 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말도 마렴. 그 애는 네가 여기서 지낼 때보다도 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왕비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 오죽 널 보고 걱정을 덜었으면 그리 말할까 싶으면서도, 어디 그 말의 반이나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하하.”

왕비처럼 지내고 있다는 그런 표현에야, 아드리아나도 카리나의 미화 수준이 자신보다 몇 수 위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명의 부인을 공평하게 사랑해야 하는 국왕을 둔 왕비와 자신의 행복에는 분명 다른 데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어머니. 연락을 너무 늦게 드린 것도요. 실은 전부터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어요. 하지만 매번 바르테즈가 받아서, 전 무서워 말도 못해보고 끊고….”

“그랬겠지. 왜 안 그랬겠니. 네가 무서워 떨며 배곯고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만, 이제 네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무엇이 서운하고 부족하겠니. 난 네가 차라리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마티아스 경에게 갈 바에는 말이야. 네 얼굴을 보니 카리나가 거짓말을 한 것만은 아니란 걸 알겠구나.”

한껏 신경 쓰고 치장하고 온 보람이 있어서, 어머니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연신 흡족함을 드러냈다.

한때는 마르고 여위었던 뺨도 지금은 어릴 때처럼 통통하고 장밋빛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윤기 나고 빛나는 피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딸이 건강한 것을 기뻐했다. 그녀는 아드리아나가 두르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 감격스러워했다.

“…네 남편이 네게 늘 이런 옷을 해주니?”

너무도 조심스럽게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실 전 더 편한 옷을 좋아하지만, 격식을 갖춘 옷을 입어야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오늘도 어머니께 잘 보이려고 입고 왔어요.”

“그래, 아주 예쁘구나. 널 편한 집에 살게 해주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분과 결혼을 하였다고는 들었다마는….”

어머니는 미소 지으면서도 금방 다시 눈가를 적셨다.

“어미라고 해 준 게 없는데, 어찌 너 혼자의 힘으로 가정까지 만들었단 말이니. 정말로 대견하고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어머니가 금세 또 괴로워하며 울먹였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더 죄송해질 정도로 잘 지냈다고 어머니를 달랬다. 처음에 시설에서 미네타와 오손도손하게 생활했던 일, 테스카에서 웬디라는 아이와 정답게 식구처럼 지냈던 일 등을 들려주었다.

몇 번인가 우연히 발렌틴과 마주쳤던 일과 그에게 청혼 받았던 일을 들려주었을 때에는, 어머니가 ‘세상에나’를 연발하며 웃었다. 혹시나 섣부른 편견이나 빚진 마음을 갖게 할까 봐, 아드리아나는 남편이 자신을 구해준 장본인이라는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 또한 투스미아에서의 애매한 그 신분에 대해서도.

“그런 인연이 다 있구나.”

그럼에도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발렌틴의 이미지는 거의 비현실적인 로맨티스트이자 성인의 이미지에 가깝게 변해가는 듯했다. 어머니는 발렌틴이 ‘비록’ 아이넨 귀족이 아닌 상인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낭만적이며 숭고한 정신을 간직한 고귀한 인물이라며 칭송했다.

“어찌 아무것도 못 가진 너를 믿고 덜컥 아내로 삼으셨을까? 그분께 정말 잘해야겠다. 그분의 가문에서는 너와 결혼하는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니?”

“잘 모르겠어요. 제게 청혼하셨을 때 이미 모든 게 정리되어 있었거든요. 투스미아에 가서 뵈었을 때는 다들 너무 좋으셨어요.”

“그래, 투스미아라고 했었지.”

어머니가 소녀처럼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완전한 코니스인으로 아이넨에 시집와서 살고 있었으니, 자신의 고향과 각별하고 가까운 위치에 있는 그 동맹국의 이름에 무한한 호감을 느꼈으리라.

“그 왕국 바로 아래 있는 왕국에 살면서도, 난 한 번도 투스미아의 사람을 본 일이 없단다. 우리 눈에는 조금 무섭게 보일 외모라고 하더라만, 카리나는 무조건 네 남편이 아주 훤칠한 분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만 해대니 말이야.”

어머니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아이넨계 분이셔서 제 남편도 거의 여기 사람처럼 보이세요. 평균보다 몸이 좀 많이 크시긴 하지만, 막상 투스미아에 가보니까 아담해 보이시는 거 있죠. 시할아버님은 키가 2m가 넘으세요.”

아드리아나가 바쉬 공작의 위풍당당한 풍채를 떠올리며 팔을 크게 벌려 보이자, 어머니가 헉 하고 소리 내서 웃기까지 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궁금해라. 넌 겁도 많은 애가 그런 분들이 무섭지도 않았니?”

“오히려 든든하던걸요. 인상을 쓰시면 약간 그렇지만요. 전 처음에 제 남편도 무뚝뚝하실 줄 알았는데 아주 자상하신데다 요즘은 애교도 많아지셨어요.”

“남자가 부인에게 애교라니, 난 상상이 안 된다, 얘야.”

어머니는 아드리아나의 친구들처럼, 또는 여느 수다스러운 아가씨나 젊은 부인들처럼 들뜬 목소리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아드리아나는 온통 자랑하고 어머니가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딸이 이토록 존중받고 소중히 여겨지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음을 확인받으며, 이 순간만큼은, 지난 몇 년의 고통에 대한 작은 보상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정말 잘됐다. 정말 감사한 일이야. 어서 네 남편을 보고 싶구나.”

“그이가 같이 오자고 하시는 것을, 오늘은 제가 먼저 와서 봐야겠다고 고집 부려서 혼자 왔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죄송하기는. 곧 보면 되지 않겠니? 앞으로 언제든 볼 수 있잖니.”

“맞아요. 언제든지요.”

아드리아나는 빨리 테스카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며 어머니를 끌어안고 응석을 부렸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청해서 남편의 고향에서 데려온 로빈 얘기를 하자, 어머니는 코니스에서 살던 시절에 하얗고 커다란 개를 예뻐하며 길렀었다며 로빈을 궁금해했다.

그렇게 한참 웃고 떠들고 있는 사이에, 카리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하세요, 마님. 아가씨.”

카리나는 오언과 엘레나를 잘 챙겨서 따로 식사하겠노라고 일러주고 물러났다.

잠시 후 식당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이미 먼저 와서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기다란 테이블을 두고 상석에 앉은 그의 양 옆자리에, 아드리아나와 어머니가 마주보고 자리를 잡았다.

“얘기들 많이 나누었소?”

아버지가 수프 접시가 놓이는 것을 바라보며 점잖은 투로 말했다. 아직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상기된 볼을 한 어머니가 대답했다.

“한참 남았답니다. 나중에 우리끼리 실컷 수다를 떨어야지요.”

“4년을 생이별하고 살았으니 하루로는 턱도 없겠지.”

아버지가 한쪽 입 끝을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절 도와주신 분들이 정말 많아요. 제 남편과 아가씨도… 절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드리아나가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불편한 듯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화제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도 머쓱하고 서운해져서 조금 당황하며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헤아려 보자면, 연락도 못하고 지내느라 자기들끼리 남편 가문 쪽과만 상의하여 식을 올렸으니 그에 서운할 부모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형편을, 집에 돌아오기 싫었던 사정을, 특히나 아버지에게는 곧이곧대로 털어놓고 해명하기에 시기가 일렀다.

아드리아나는 식사를 하며 어머니와 간간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릴 적에 먹던 음식의 맛이라 그립고 좋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다, 그런 칭찬과 가벼운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대화에 영 끼지 못하는 아버지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딸이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그의 과묵함이 한순간에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헤밀에서 마차 사고가 났던 때, 저를 발견하고 구해주신 분들이 계세요.”

아드리아나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좀 더 나중에 밝히려고 했었지만, 아버지에게도 남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역시나 아버지도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헤밀의 한 아동 시설을 후원하던 분들이 절 구해주셨어요. 그 후로 그 시설을 운영하시는 분이 절 보살펴주셔서 거기서 안전하게 지냈고요.”

“그랬니? 그분들께도 감사를 드려야지. 나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어머니가 먼저 말하며 나섰다. 아버지도 거기에는 동조하는 듯, 그들에 대해 듣기를 기다리는 시선으로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나는 아버지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며 입을 열었다.

“절 찾아내신 분들 중에 한 분은 바로 제 남편이세요. 다른 한 분은 그분의 여동생이고요. 슈하스에 계시는 수녀님이셨지 뭐예요.”

예상대로, 아버지는 교회 관계자의 이름이 나온 순간에는 눈동자를 빛내며 살짝 흥미를 비쳤다. 그러나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묵 속에 잠겨들었고, 어머니만이 시종 흥미로워하며 기쁨을 나타냈다.

“네 남편 혼자 여기 떨어져 지내신 건 아니었구나. 가족이 한 대륙 안에 있다고만 생각해도 큰 의지가 되겠지. 모르긴 몰라도, 필시 그 여동생분도 훌륭하신 분일 거야.”

아드리아나가 어머니의 호의 가득한 말에 고마워하며 미소 지어 보인 후, 아버지를 향해 살짝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버지는 그제야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너를 구해주신 것에는 감사를 드릴 일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보답하도록 하마.”

아리송한 말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이라고 선을 긋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의문을 품은 눈으로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남편에 대해 벌써 한마디는 물었을 법 했다. ‘네 남편이 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던데.’ 하고 못마땅해 하는 말이나 ‘왜 당장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느냐.’ 하고 꾸중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의 안색이 너무나 불편하게 굳어 있었다.

“…난 하나뿐인 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리노아스 영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날에는 영지를 왕국에 바치고 재산을 교구에 헌납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지. 우리 가문이 지켜온 영지를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구나.”

아버지가 무뚝뚝하지만 한결 안도하게 하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다. 그만 돌아와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데 힘쓰며 편안히 지내거라.”

다음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버지의 굳은 목소리가 아드리아나의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당혹스러운 듯 바라보다 초점마저 잃어버렸다.

“…네?”

저도 모르게 되묻자, 아버지가 더욱 굳은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작정한 듯 확고한, 마치 4년 전 마티아스에게 시집가라고 명령하던 그때와 같은 냉랭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였다.

아드리아나는 뭐가 아니냐고 묻는 대신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결혼을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는 거야. 세상천지에 양가가 먼저 인연을 맺는 과정도 없이 저들끼리 부부가 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아버지.”

“당분간 얌전히 지내거라. 제대로 된 가문의 여자로 살 수 있도록 아비가 알아서 해줄 테니.”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나왔다. 아드리아나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당하고 화가 나서 손까지 떨렸지만, 침착하려 애쓰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 전 유부녀예요. 남편과 정식으로 식을 올리고 함께 살고 있어요.”

“그 남자에 대해 대강 들었다. 이국에서 건너온 상인이라니 도저히 그건…. 그 남자는 대체 네 무엇을 보고 부인으로 삼겠다고 하더냐? 가문과 친지의 보증도 없이 집안에 여자를 들이는 남자가 되먹은 남자일 성 싶지 않아.”

“아버지….”

몹시 무례한 태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가 막혀 터져 나오는 숨을 내뱉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아버지가 ‘남편’이라는 호칭 대신 ‘그 남자’라는 모멸적인 호칭을 쓰는 것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건 여자의 겉모습만 보고 아내로 삼아도 자기 평판에 지장 없을 정도의 남자이겠지. 젊고 예쁜 여자를 좋을 대로 들였다가 싫증나면 내쫓는 저속한 남자들도 있다. 어차피 오래 갈 가정이 아니야.”

“그분은 그런 무책임한 남자들과 달라요, 아버지.”

아드리아나가 화를 참으며, 자못 또랑또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하는 일을 네가 알기는 어려운 거다. 그만 되었다. 아비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거라.”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가려고 하기에, 아드리아나가 벌떡 일어나며 항의했다.

“이러실 수는 없어요. 아무리 제 아버지라 하셔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 남편을 모욕하시고 그를 버리라고 하실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조금 놀라워하는 눈빛으로, 그리고 심히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아드리아나를 돌아보았다.

============================ 작품 후기 ============================

그동안 깔아왔던 복선을 반영할 큰 갈등 두 가지가 남았는데, 사이다를 위한 고구마 챕터 1이라고 생각하고 씁니다. 큽..사이다가 맛이가 있을지 걱정이에요.

읽어주시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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