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봄의 소식 =========================================================================
발렌틴은 조용히 아드리아나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에 입을 열었다.
“나도 고민을 하기는 했어. 조만간 같이 리노아스로 인사를 드리러 가지.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가 자못 조심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고 하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등을 기대고 있던 몸을 돌려서 그와 마주보도록 누웠다. 발렌틴의 손이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느릿하게 쓰다듬고 있다가, 등을 감싸며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입술이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만일 정해진 혼처가 있었는데 일부러 도망쳤다는 식으로 추궁당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그저 사고를 당했을 때에 너무 당황해서 시간을 끌다가 돌아가지 못했다고 해. 설득력 같은 건 상관 없을 거야. 작정하고 정황을 만들어서 속일 필요까지는 없어.”
“거짓말을 할 자신도 없어요.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피한 것도 사실인데 들키면 어쩌죠?”
“글쎄. 당신의 의도와 관련된 사실관계를 추적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테고 그렇게까지 따지려 들 이가 있을까? 예전 혼처에서도, 본인들 보호 하에 당신을 데려가다가 사고를 냈으니, 혼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한 책임을 당신 쪽에다 추궁하기는 어려울 거야.”
아드리아나는 멍한 얼굴로 발렌틴을 쳐다보았다
그날의 마차 사고에 대한 책임을 스콰이어 가에 전가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폭풍우로 인한 천재지변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단순하게 인정으로 상황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실로 돌릴 여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절 다시 데려간다는 소리도 했대요. 제 정혼 상대였던 분은 제가 없어지고 난 후에 금방 다른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도, 만일 제가 살아 있다면 둘째 부인으로라도 데려가서 책임지겠다고 했대요.”
“미친 소리를….”
발렌틴이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조금 차가워 보이는 눈을 하고 질문을 덧붙였다.
“그게 어느 가문이지?”
아드리아나는 그의 질문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그가 아내의 옛 혼처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이 뜻밖이었고, 그의 그런 냉소적인 표정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키고 입단속을 철저히 했던 모양이야. 리노아스에도 당신의 정혼 상대에 대한 소문이 남아 있지 않았어.”
“아…. 그랬군요.”
아드리아나는 슬슬 발렌틴이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일이 사실로 실감되기 시작했다. 얼핏 두려움이 들 때가 있었지만, 결혼 상대의 가문에 대해 신빙성 있는 경로로 알아보는 것이 유별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원망스럽기보다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일에 같이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의지가 되었다. 반려자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고 의지하게 될 수가 있는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뭘 알아봤을까. 어떤 여자였는지, 왜 고향을 떠났는지 그런 걸 알아봤을까. 집에서는 외부에다 아드리아나를 시집보냈다고 어떤 식으로 알렸을까.
“…마티아스 스콰이어 경이었어요. 전 그분의 새 아내가 될 예정이었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명색이 아이넨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공작 가문의 일원인데다 악명 높은 뒷소문을 가진 마티아스를, 발렌틴도 모를 리 없었다. 내심 그런 사람에게 시집가야 했던 사정을 알리는 일이 부끄러웠다. 외동딸을 그런 자에게 보내려 했던 아버지 또한 한심하게 생각될 것만 같았다.
역시나 발렌틴은 좋은 말을 떠올리지 못한 듯했다. 아무 말 없이 아드리아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지키려는 듯 팔을 벌려서 품을 넓히고 가득 끌어안았다.
“발렌틴. 어디서 당신 같은 사람이 나타났을까요? 어쩌다 이때까지 결혼을 안 하고 계셨어요? 전 정말 운이 좋은 여자예요.”
희미하게 웃음기를 품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가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은 채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그 말 하니까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군. 장가를 못 간다고 펜하고 사귀냐는 둥, 고자라는 둥, 별소리를 다 듣고 살았단 말이야.”
“하하. 정말 너무하셨네요. 귀한 제 남편께, 대체 어떤 분이 그러시던가요?”
“주로 당신 시할아버지가 그랬지.”
아드리아나는 바쉬 공작의 근엄하고 과묵해 보이는 풍모를 떠올리고 소리 내서 웃었다.
“어쩜 그런 말씀을…. 하지만 전 영부인을 봐서라도 공작님 험담은 하지 말아야겠어요.”
“그렇게 해. 영감님 흉 볼 파트너라면 부족하지 않으니까.”
발렌틴은 어느새 다시 풀어진 표정으로 아드리아나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엉덩이를 주무르고 슬금슬금 허벅지 안쪽을 넘보기 시작했다.
“안 돼요. 우리 얼른 씻고 아침 먹으러 가요.”
아드리아나는 이불 속에 몸을 숨긴 채로 침대 아래를 더듬어서 잠옷을 찾았다. 머리 위로 몸통에 집어넣고 팔을 끼우다 흘깃 뒤를 돌아보자, 발렌틴이 옆으로 누워서 자기 머리를 팔로 받치고 구경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 먼저 얼른 씻고 오세요.”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그가 이불을 들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발가벗은 뒷모습을 보며, 아드리아나는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혹시 집 앞에라도 나갈 일이 있으면 꼭 오언을 데리고 다녀. 하인들에게도 일러두겠지만, 당분간은 접근하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게 좋겠어. 그냥,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리노아스에 가는 건 다음 주 정도로 조정해볼게.”
그가 말하며 돌아보기에,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남편에게 계속 신경 쓰게 하는 게 미안했지만, 죄를 짓지도 않았으면서 사과한다고 그가 더 안쓰러워하고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것 같아서, 순순히 그의 말을 듣는 걸로 대신했다.
같이 아침을 먹고 남편을 일터로 배웅한 후, 아드리아나는 잠시 문 앞에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장성한 열일곱에 길을 잃고, 그냥 아무것도 몰라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건 통하지 않을 변명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아드리아나가 어땠는지를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드리아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무성의한 변명에도 반쯤 수긍할지 모른다.
집 밖에도 몇 번 못 나가본 여자. 남작저의 전화번호는 외웠지만, 전화 거는 방법도 몰랐던 여자. 처음 보는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조차 두려워했던 여자.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던 과거에 슬퍼지는 한편, 그런 과거가 어느덧 지나가 잊힌 기억이 되었다는 것이 다행스러워졌다.
“…로빈, 어디 있니?”
아드리아나는 밝은 목소리를 내며 강아지를 찾으러 정원으로 나갔다.
“로빈.”
이름을 부르자, 헥헥 숨찬 소리와 함께 마른 풀을 밟고 뛰어오는 강아지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내 늑대와 비슷한 생김새에 귀가 쫑긋 서고 얼굴은 순하기 그지없게 생긴 강아지가 아드리아나를 반겨주며 나타났다.
아드리아나는 묵직한 강아지를 안아서 한 번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주었다. 토실토실한 궁둥이 뒤에서 꼬리가 바쁘게 흔들렸다.
“어이구, 무거워라. 아침부터 뭐하느라 그렇게 뛰어다닌 거야?”
투스미아에서 데려온 강아지, 로빈은 그새 덩치가 꽤 커져 있었다. 워낙 큰 대형견의 새끼이니 앞으로도 쑥쑥 자랄 터였다. 데려올 적에는 아드리아나의 팔뚝만 했던 녀석이 이제는 한쪽 팔을 쭉 뻗은 길이만 해졌다. 작은 개를 키우는 게 소망이었던 아드리아나는 결국 아버지의 사냥개보다 더 큰 개를 키우게 되었다.
결혼식 때, 그 즈음 로아타르에서 함께 태어난 강아지 형제들 중에 제일 얌전하고 숫기가 없는 녀석을 골라서 데려왔다. 그리고 용감한 강아지가 되라고 로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활달하고 씩씩한 녀석을 데려가지 그러십니까?
발렌틴의 남동생은 집을 잘 지키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었지만, 제 형제들끼리 잘 노는 녀석들을 떼어놓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낯을 가리며 조용히 아드리아나를 쳐다보고 있던 로빈에게 제일 눈이 갔다.
다행히도 집에 데려오고 며칠 지난 후부터, 로빈은 널찍한 정원과 후원 전체를 뛰고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정원의 가지 위에 내려앉는 새들을 보면 좋아서 쫓아다니며 꼬리치고 빙빙 맴돌았다. 아드리아나나 발렌틴, 또는 하인들이 놀아주러 나가도 그랬다.
“이게 마지막 남은 거야. 너희 고향집에다 더 보내달라고 말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아드리아나는 투스미아에서 가져온 육포 조각을 로빈의 밥그릇에 올려주고, 뽀얀 털이 보송보송한 몸통을 쓱쓱 쓰다듬었다.
“아휴, 귀엽다.”
덩치가 그렇게 컸어도 어찌나 생김새가 아기 같고 선량한지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움에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의 고향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몸집이 타국의 놈들에 비해 컸다.
“우리 남편 같다니까.”
아드리아나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누가 들었을까 두려워져 얼른 입을 가렸다.
날이 좀 더 풀리면 뜰에 있는 맑은 연못에다 물고기를 풀어놓게 할 것이다. 연못가를 돌아다니며 들여다보고 물고기를 구경할 로빈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상상이 되어 미소가 새어나왔다.
아드리아나는 속이 빈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와서 던지고 물어오게 하며 로빈과 놀아주다가, 얼마 후 방문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일과는 보통 이랬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아드리아나에게 사교계의 예법을 가르쳐주고 소식을 전해줄 교사가 왔다. 나머지 날들은 집안일 관리를 배우고 지역 모임에 나가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발렌틴의 일로 함께 외출을 하는 일도 있었다. 대개 식사나 연회에 초대 받아 인사를 나누는 정도여서 크게 불편한 일이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적당히 경청하는 척 하거나, 때로는 못 들은 척하기도 해야 했는데, 그것도 처음에만 당황했을 뿐 금방 익숙해지게 되었다. 사소한 실수는 몇 번 했지만,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아드리아나와 달리 발렌틴은 상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돌아서서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금방 그 일을 잊어버렸다.
“누구에게나 서툰 시절이 존재하지요. 예법이나 유행을 익히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밖에 없어요. 겸손하게 인정하고 배워나가면 됩니다. 그보다 여자가 진정으로 가문과 남편의 이름에 먹칠하는 실수는 따로 있죠. 그건 남자 문제를 덜미 잡히는 것입니다.”
아드리아나의 교사는 아주 자상한 듯하면서도 시니컬한 여성이었는데, 여자가 경계해야 할 실수를 가리켜 ‘남자 문제’라고 하지 않고 ‘남자 문제를 덜미 잡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남자는 여자 문제를 좀 일으킨다고 큰 흠이 되지 않지만, 여자는 다르죠. 우리가 일처다부제가 아닌 일부다처제를 존속하고 있는 한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뒤탈이 없도록 처신할 필요가 있어요.”
“전 외도하지 않을 거라서 들키지 않고 뒤탈 없이 외도하는 법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어요, 캐롤.”
아드리아나가 천진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캐롤의 게슴츠레한 눈이 긴 속눈썹으로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움직이지 않다가 느릿하게 깜박였다.
“…아무튼 마음이 변해 필요성이 생겼을 때 가르쳐달라고 하시기는 곤란하실 테니 알려만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완벽한 회피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기미가 있는 친구를 알아보고 피하시면 지금의 마음가짐을 지키시는 데에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겠지요.”
캐롤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은 기본이 되는 궁정 예절 외에도 최근의 사교에서 유행하는 예법이나 문화, 놀이를 가르쳐주었고, 일부 특정한 모임에서 요주의 인물을 일러주기도 했다.
“방금 말씀드린 인물들은 단지 소문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자타공인 난봉꾼들입니다. 곧 누군가에게는 듣게 되실 거예요. 사실 웨버 부인께서 아너슨 부인 무리와 어울리신다면 거의 무시하셔도 될 사람들입니다. 레빙턴 부인을 필두로 테스카 교회파인 아너슨 부인을 포함한 쪽은 역사 깊은 보수파로 이름이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레빙턴 부인 쪽은 신분도 높으시니 함부로 하기 어렵겠죠. 말 많은 여성들은 그쪽 관계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캐롤이 말하다가, 뭔가 거슬리는 점이 있었는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말 많은 여성이란 게 수다가 많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다라면 오히려 아너슨 부인 쪽의 압승일 거예요. 레빙턴 부인도 더 하시면 더 했지요.”
“그건 저도 그래요. 친한 분들과 만나면 말이 아주 많아지거든요.”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말하자, 캐롤이 한쪽 입 끝을 치켜 올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럼 오늘은 수도에서 유행하는 다도에 대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왕비께서 관심을 가지셨다고 알려지신 후로는 뭇 사교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과목이 되었는데, 쓸데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서 영애들이 골치를 썩고 있죠.”
“으음…. 차가 잘 안 넘어가겠네요.”
“이 또한 자기 자랑을 얼마나 은근하게 하는가가 관건인 요즘 놀이의 일종입니다. 고대어로 된 시가 핵심이지요. 부인께서는 여러 언어에 박식하시니 다루시기가 훨씬 수월하실 겁니다.”
말하자면 요즘의 사교란 놀이와 교양을 접목해서 즐기며 은근하게 자기 자랑을 하는 말이었다. 허영에 차 보여도 안 되고 지나치게 겸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어려웠다. 적당하고 은근하게 자랑하기 위해 이상한 다도까지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존재들은 대체 누구인지 혀가 내둘렸다.
고대 언어라니, 그런 걸 익힌 부인은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터였다. 대학에 갈 수준이었던 소수 지식층에 속한 아드리아나는 그 기초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그 놀이 구조를 반도 익히지 못한 채로 그 날의 수업이 끝났다.
“아, 머리 아파. 옛날에 공부하던 역사나 외국어가 훨씬 쉬웠던 것 같아.”
아드리아나는 잠시 방에서 쉬었다가, 곧 다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시댁에서 만든 육포가 도착하기 전까지 로빈의 간식을 대체할 식료품 등을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당부대로 잊지 않고 오언도 동행했다.
장보는 일 정도는 하인을 시켜도 되었지만, 지금은 뭐든 직접 따라다니며 배우는 게 좋았다. 오랫동안 바람을 쐬고 걷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 편이 상쾌하기도 했다.
장보기는 엘레나가 도와주었다.
“로아타르에서 가져온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육포는 이 가게의 것도 맛있어요. 주인님이 이런 걸 잘 드시지 않아서 사본 일이 별로 없었는데, 앞으로는 저희도 만들어볼까 봐요.”
“그래? 그이가 로아타르의 집에서는 잘 드시던데.”
“어머니 음식이라 다른 모양이네요. 그럼 마님께서 우리 집에서 만들게 하셔도 좋아하실지 몰라요.”
“아, 재미있겠다. 난 음식을 만드는 일이 좋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나도 도울 수 있어. 빵 만드는 거랑 잼 만드는 걸 도와본 적도 있어.”
아드리아나는 엘레나를 따라다니며 장보는 것을 구경하고, 사고 싶은 것들을 골랐다. 지나다가 꽃집 앞에서 요주의 인물이라는 젊은 부인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며, 캐롤에게 들은 일 때문에 공연히 흘끔거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갈 때는 마차를 타야겠다. 짐이 너무 많네.”
집안에 상주하는 일꾼을 포함해 6인분의 며칠 치 식료품과 아드리아나가 사들인 물건들까지 포함하니 양이 꽤 되었다.
아드리아나 일행은 근처에서 손님을 실어주고 돌아온 마차를 한 대 발견하고 그것을 빌렸다.
“날씨가 정말 좋네요, 마님. 바람도 꽤 따뜻해졌어요.”
엘레나가 마차 창밖을 바라보다 아드리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말에 주인님과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면 어떠세요? 해안가에 꽃도 많이 피었을 거예요.”
“정말, 그러자고 해봐야겠어.”
아드리아나는 발렌틴과 오랜만에 멀리서 데이트할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와 함께 테스카 성 근처 바닷가에 간 일이 있었다.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밖에서는 절대 수영복 같은 걸 못 입게 하겠다고 말했었다.
아드리아나는 온갖 상상으로 싱글거리고 있다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집 앞에 누가 와 있습니다만.”
오언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려서 고했다.
그의 큰 덩치에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아나와 엘레나도 오언의 뒤를 따라서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가 선 곳에서 대문까지 이어지는 길이 수십 걸음 정도 되었는데, 오언이 짐을 내리는 동안 아드리아나와 엘레나는 집 앞에 서 있는 손님을 확인하려고 힐끔거렸다.
남자 둘이었다. 한 명은 단정한 하인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훤칠한 뒷모습만 보였다. 머리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전히 뒤로 붙여서 넘긴 뒤통수가 낯이 익었다.
집주인이 돌아오는 기척에 그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조금 뚱뚱해 보이는 하인이 아드리아나를 발견하더니 먼저 작게 외쳤다.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마른 남자, 클로제 남작의 젊은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올렸다.
“바르테즈입니다, 아드리아나 아가씨. 이런 곳에 계셨군요.”
그의 목소리에서 드러나는 잔잔한 감격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정이 없는 사람이었고, 아드리아나와는 특히 친밀함이 없었다. 아드리아나의 기억 속의 그는, 리노아스 가에 오랫동안 봉사해 온 늙은 집사를 밀어내고 집사장이 될, 클로제 남작 한 사람만의 충신일 뿐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몇 번인가 상상해 보았던 이 순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침착하게 자세로 하인들을 거느리고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바르테즈. 들어오세요.”
============================ 작품 후기 ============================
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