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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76화 (76/140)

00076  봄의 소식  =========================================================================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마음이 산란해져 사람들과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남들이 웃는 때에 웃고 다들 고개를 끄덕일 때에 얌전히 눈을 깜박였지만, 정신은 온통 리노아스에서 보내왔다는 편지로 가 있었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발신인은 어머니가 맞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쉐이드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고 싶었다.

“연애편지라도 기다리시나 봐요, 부인?”

소니아가 짓궂게 웃으며 귀엣말을 했다. 아드리아나는 남편에게서는 편지 같은 거 못 받아봤다며 웃어 넘겼다. 연회가 끝나자마자 테스카로 돌아가서 쉐이드에게 전화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

“오드리! 안 그래도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드리아나가 집에 돌아와서 보호소로 전화를 건 것은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서였다. 쉐이드는 아드리아나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워하며 짧게 안부를 묻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리노아스 남작저의 부인께서 보내신 거예요. 어서 전해드리고 싶어서 제가 테스카로 갈까 생각도 해봤는데 이번 주는 일이 많아서 움직일 수가 없겠더라고요. 우편으로는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서 부치지 않았어요. 만에 하나 분실이라도 되면 큰일이잖아요.”

“고마워요, 쉐이드 양. 제가 내일 하인을 보낼 테니 그 편으로 보내주세요. 당분간은 저도 멀리 외출할 틈이 없을 것 같아요.”

“네, 편하신 대로 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데….”

쉐이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지난주에 ‘오드리 라티스’가 누구냐고 찾으러 온 사람이 있었어요. 리노아스에서 왔다고 자기소개를 하면서요. 어떻게 된 걸까요? 어머니께서 편지를 주시고 따로 사람을 보내신 걸까요?”

순간, 아드리아나는 숨을 멈추고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에게는 카리나를 통해 안부를 전했고 편지로 연락할 수 있었으니, 굳이 따로 사람을 보낸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게다가 어머니에게는 오드리 라티스라는 가명을 알린 일도 없었다. 카리나도 함구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가.

“쉐이드 양이 직접 보신 건가요?”

“네. 카리나 씨가 시킨 대로, 오드리 양은 여기 잠시 머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떠나고 없다, 어디로 갔는지까지는 모른다고 말했죠. 그런데 그 남자가 헤밀과 슈하스를 돌아다니면서 오드리 라티스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고 다녔다는 거예요.”

쉐이드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드리아나는 침착하게 생각해 보려 애썼다.

오드리 라티스라는 가명과 헤밀 보호소와의 연결점에 대해 아는 이는 특정 부류로 좁혀졌다. 보호소의 일부 직원들, 아드리아나가 거쳐 가며 일했던 가게의 주인들, 슈하스의 공문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만약 리노아스의 아버지가 그들을 통해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면 복잡하다. 무엇보다도, 그 중에는 오드리와 아드리아나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리노아스의 사람들이 얼굴을 보았을 리도 만무했다.

‘아냐. 말론…. 말론과 얼린이 날 봤으니까….’

얼린은 평판이나 그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아드리아나의 이야기를 전했을 것 같지 않았다. 말론이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주소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만약 리노아스에서 슈하스로 문의를 넣었다면, 말론을 만났던 날 바로 서류가 옮겨졌으니 헤밀 주소를 알기 어려웠을 터였다.

‘…마을을 돌면서 나에 대해 아는 이를 찾았다는 건, 아직 나를 확신할 수 있는 이와 접촉하지는 못했다는 거겠지. 이름과 주소만 알고 멀리서 찾아온 걸 거야.’

반지.

테스카에서 반지를 팔 적에 아드리아나는 그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그때 아버지에게도 연락이 들어간 건가?’

당시 카리나도 그 반지 때문에 아드리아나를 찾아냈다. 그녀는 갖고 있던 세트 귀걸이와 보상금으로 그것을 수배했다고 알려주었다.

‘…보증서가 있었겠지.’

아드리아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굳은 뺨을 문질렀다.

최근에 발렌틴에게서 약혼반지의 보증서라는 서류를 넘겨받은 일이 있었다. 고가의 물건이라 혹시 분실을 하게 되더라도 물건이 어딘가에 나타나면, 보증서와 반지 안에 새겨진 인식 번호를 통해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가 준 그 다이아몬드 반지에도 보증서라는 게 딸려 있었으리라. 그 서류에는 실물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도안까지 그려져 있었다.

‘아, 어떻게 되는 거지? 아버지에게도 연락이 간 걸까? 그럼 반지를 다시 사들인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내 행방을 알게 되신 걸 아버지에게 들키셨을까?’

아드리아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헤밀까지 다녀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쉐이드 양, 그 편지를…, 아니, 아니에요. 아아….”

“괜찮아요, 오드리?”

수화기 너머에서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아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차분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쉐이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내일 하인에게 편지를 전해주길 부탁한다고 당부해놓고 전화를 끊었다.

‘괜찮을 거야. 아버지라면….’

일단 리노아스에서 온 자라면 아버지의 심부름꾼임이 틀림없었다.

아드리아나가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이유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아드리아나를 끔찍한 상대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으니, 스콰이어 공작의 막내아들 몇 번째 부인이 되거나,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상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런데도 다시 클로제의 영애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찜찜하고 무거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버클리 때문에?

그는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과거로 봐도 될 것이다. 발렌틴은 옛 연인 따위는 캐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세하게 뒷조사를 한 건 아니라는 농담조였지만, 적어도 아드리아나의 옛 연인 문제가 발렌틴에게 있어서 차마 언급조차 못할 정도로 민감한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리라. 더욱이 다행스럽게도,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처음을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었다. 혹시나 리노아스에 자신의 나쁜 루머가 퍼져 있다 해도 어느 정도 결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괜찮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괜히 불안해져서 스스로 평화를 망쳐서는 안 돼.’

아드리아나는 혼자 망상에 빠지다가 우울한 과거로 돌아가는 꼴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 고민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를 남편과 상의해야 하는지, 어디까지를 스스로 해결해서 남편을 부담스럽지 않게 해줘야 할지, 그 경계를 정하는 일이었다.

잠시 후, 아드리아나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나와서 벽난로 앞에 앉았다. 이제 3월이 되었지만, 흐린 날 같은 때는 가끔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 산 허브차를 우려내, 잔 위에다 코를 대고 퍼져 올라오는 향긋한 허브 향을 맡았다. 피로를 풀어주고 긴장을 완화시켜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효능으로 알려진 차였는데,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주려고 산 것을 아드리아나가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언제 돌아오시려나.’

남편이 너무 늦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 시작하려던 때, 차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발렌틴, 다녀오셨어요?”

아드리아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인사했다.

발렌틴은 가방과 코트를 하인에게 건네주면서 곁눈질로 계단을 살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잘 있었소?”

“네, 여보. 당신도요?”

아드리아나가 활짝 웃으며 두 팔로 그의 목에 매달리자, 그가 오른쪽 팔로 아드리아나의 허벅지를 감싸 안고 위로 올려들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눈을 올려다보며 다시금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었고?”

“네. 당신도요?”

아드리아나가 똑같이 되묻자, 그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들려가며 그의 머리에 살짝 기댔다.

조금 전 쉐이드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그와 의논할 생각이었지만, 하루를 건너뛰고 재회한 남편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까 봐 먼저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발렌틴은 기분이 좋은 듯 아드리아나를 안고 걸으며, 그의 얼굴 높이에 있는 아드리아나의 가슴 위에다 코를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집안에서라도 사람들의 눈이 있을 때에는 비교적 점잔을 떨었지만, 왜인지 이런 식으로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이나 목덜미에 대고 냄새를 맡는 행위를 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만 내려주세요. 계단 위험해요.”

아드리아나가 계단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그는 순순히 말을 들어주었다. 곧 둘만의 장소에 가서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2층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아드리아나를 뒤에서 낚아채 안아들고 침실로 직행했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 위에 엎드리며 자기 몸무게를 고스란히 싣고 짓눌렀다. 아드리아나가 작게 신음하자, 그가 옆자리로 몸을 뒤집으며 두 사람의 위치를 역전시켰다.

“…집에 오니까 좋다, 여보.”

그가 나른하게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등과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드리아나도 가만히 그의 팔과 어깨를 어루만졌다. 한없이 듬직하다가도, 한없이 약하게 느껴지는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는 잘 하셨어요? 잠도 잘 주무시고요?”

“그랬소. 펜이 그런 건 철두철미하게 챙겨주니 걱정 마. 밥시간과 잠시간이 제때 안 지켜지면 나보다 더 짜증내거든.”

“든든하네요.”

아드리아나는 웃으며 남편의 몸을 더듬다가, 이내 그의 하반신이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기색을 느끼고 웃음을 거두었다.

그동안 둘이서 매일 밤 사랑을 나누어 왔다. 발렌틴의 출장 등으로 떨어져서 잔 다음날은 둘 다 서로에게 더 쉽게 흥분했다. 껴안고 체향을 맡으며, 서로의 몸을 조금 만지며, 금세 달아오르고 젖어들었다. 특히 발렌틴은 풀지 못한 만큼을 누적해두었다가 가산해서 쏟아내려는 듯, 더 격정적으로 더 오랫동안 아드리아나를 안으려 들었다.

“나 금방 씻고 올게.”

그가 누운 채로 아드리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서 비켜주었다.

*

목 뒤에서 느껴지는 후끈후끈함이 불편해, 아드리아나는 뒤척이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잔잔한 문양의 벽지와 가구였다. 그리고 뒤에서 자신을 껴안고 있는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허리 위에 팔을 두르고 껴안은 채로 더운 숨결을 뿜어대는 남편의 기척이 느껴져 작게 웃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그쪽에서 자야겠어. 당신은 그 방향을 보고 누워서 잘 때가 많더군.”

발렌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드리아나는 목 뒤로 손을 올려서 그의 뺨을 만져주려 했다. 그러나 약간의 간격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닿지 못했고, 대신 그가 혀를 내밀어서 아드리아나의 손가락을 핥았다.

“간지러워요.”

몸을 돌리고 그를 꾸중하듯 바라보았다. 입모양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모양이어서 효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신 피곤했어? 아침 먹을 시간 다 되었는데 안 일어나더라.”

“오랜만에 멀리 나갔다 와서 그런가 봐요.”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들어 올리게 하고 쪽쪽 입을 맞추었다.

적당히 서늘한 기온과 포근한 이불의 감촉, 가장 좋은 것은 남편의 따뜻한 품과 그의 애정이었다. 아드리아나는 행복감을 만끽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계속 하며 허리 뒤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남편의 앞이 단단하게 일어서서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밤늦게까지 정사를 벌이고도 아침이면 이렇게 되어 있는 날이 많았지만, 그가 욕정하고 있는지 단순한 생리현상을 겪고 있는 것인지를 아드리아나도 점차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발정 상태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하는 간단한 문제였다.

“…부족하셨어요?”

부끄러워서 작게 속삭이듯 묻자, 입맞춤이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찌푸려진 듯한, 그의 뜨거운 눈길이 와 닿았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당신 아침을 먹이고 할지 지금 할지 생각하는 중이야.”

아드리아나는 어처구니없어 하며 웃고는 그를 꼭 껴안았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는 못 해요.”

“…뒤로 돌아 누워요.”

이내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편하게 눕히고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몸을 연결했다. 달거리가 다가올 때나, 격렬한 정사로 허리에 통증을 느낄 때에는 무리해서 애정 행위를 강요하지 않고 사정하는 데에 집중해서 아드리아나를 일찍 해방시켜주었다. 그럴 때면 아쉬운 듯 후희의 애무가 길어지고 도로 달아올라서 관계하게 되는 일이 많아서 사실 피로도는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도 나름대로 많이 참고 있는 듯해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10분 쯤 허리를 움직이다가,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안에 파정하고 성기를 빼냈다. 그는 그대로 아드리아나를 꼭 끌어안은 채 나른함에 빠져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도 그의 팔을 어루만져주며 가만히 누워 있다가, 여운이 조금 가신 후에 입을 열었다.

“…있죠, 어머니께 편지가 온 것 같아요. 오늘 헤밀로 사람을 보내서 가져오게 하려고 해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듣고 있다고 대답하듯, 발렌틴이 뒤에서 살짝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찾으시는 것 같아요.”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쉐이드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짐작도 함께.

============================ 작품 후기 ============================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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