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4 바쉬 공작의 성 =========================================================================
마법 같은 일이었다. 이시스가 있는 땅, 바쉬의 공작 성에서, 아드리아나는 마음에 꼭 드는 남자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발렌틴은 원래부터 아드리아나가 자기 것이었다는 듯, 손을 꼭 잡고 바라보는 시선이 당당했다. 두 사람은 며칠 전에 혼인신고를 하고 나누어 낀 결혼반지도 그대로 낀 채로 식장에 들어왔다.
예식은 왕국 안팎의 귀빈들과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영예와 호사 속에서 치러졌다. 초대할 수 없었던 가족의 빈자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카리나를 통해 이 소식을 들었을 어머니도 지금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계실 터였다.
아드리아나의 가족으로서 자리를 채워준 것은 어린 웬디였다. 웬디는 얼마 전에 아드리아나가 선물한 무릎길이의 드레스를 어여쁘게 차려입고서 소녀티가 물씬 나는 얼굴을 빛내며, 그에 어울리지 않는 헤벌쭉한 입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그 많은 하객 앞에서 부부 간의 서약을 나누었다. 가문의 보증인 하나 없이 수상쩍었던 청혼을 받았던 때에는 이렇게 성대하게 서로를 인정하는 시간이 오리라고는 내다보지 못했으니,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평생, 그런 묵직한 단어가 한 치의 의심 없이 오고갔다. 이런 맹세를 나눈 후에야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일을 생각하면 발린틴에게 미안해졌지만, 이제는 돌이키지 못할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대신 그와 함께 할 앞을 똑바로 보는 데에 매진해야 했다.
서약 후에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제의 말이 떨어지자, 발렌틴이 상체를 숙여서 아드리아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바로 어젯밤 잠자리에서 그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입술을 포개고 누르는 짧은 접촉에 수줍어져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식의 마지막 순서로 축복의 기도곡이 울렸다. 이웨리드 영부인이 직접 나서서 파이프 오르간 앞에 앉았다. 그녀가 대중 앞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것은 두 자녀의 결혼식 때, 그리고 왕세자의 즉위식 이후로 처음이라는 말이 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홀이 악기의 울림통이 되었다. 그 안에서 온몸으로 소리의 파동을 맞으며, 그렇게 현실도 아드리아나의 안으로 함께 스며들었다.
아드리아나는 투스미아에 와서 새로이 알게 된 반려자의 신분과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 발렌틴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를 도우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현실감 이상의 비장한 심상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무거웠지만 어깨가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결코 혼자서 짐을 지게 하지 않을 그가 곁에 서 있었기에.
그 후, 아드리아나는 피로연 자리에서야 지인들과 인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다 같이 만나서 오던 길에 시간이 지체되어 지각한 탓이었다.
걸음 빠른 로레인이 제일 앞장서서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오드리….”
“로레인 수녀님.”
아드리아나는 그녀를 포옹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목숨을 구해준 데에 대한 인사를 하려고 처음 찾아갔던 날, 그녀와 이렇게 포옹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렇게 그의 오빠를 차지해도 되나 염치가 없어질 정도였지만, 그녀는 오빠와 아드리아나가 너무 잘 어울리더라며 기뻐해주었다.
로레인과 안부를 나누고 나니, 웬디가 뭔가 쑥스러워하며 다가왔다.
“오드리, 엄청 예뻐.”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모습이 어색해서인 듯, 웬디가 쭈뼛대며 말하더니 이내 아드리아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키가 부쩍 커서, 이제는 머리가 아드리아나의 가슴까지 닿았다.
“너무 좋아, 오드리. 내 기도가 이루어졌어.”
“어때, 웬디. 형부가 마음에 드니?”
아드리아나가 짐짓 새침한 체하면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그러자 웬디가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발렌틴을 흘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조금 왕자님 같이 생겼어.”
“푸하하!”
로레인과 소니아가 당장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아나는 그들을 흘겨보는 시늉을 하며 웬디에게 소곤거렸다.
“다들 왜 웃는담? 그치, 사실 나한테도 그렇게 보이거든.”
“히히.”
발렌틴의 혈육인 여자들은 깔깔대고 웃어댔지만, 아드리아나와 웬디는 발렌틴을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다 그가 왕자들과 악수하며 인사하는 것을 보고, 웬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드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는 진짜 왕자님이래. 신기하지?”
웬디보다는 소니아가 재빨리 호기심이 이는 목표를 감지하며 눈을 반짝였다.
“아잉, 발렌틴은 좋겠다. 나도 왕자님들이랑 손 한 번 잡아 보고 싶어.”
“아너슨 씨는 어디에 계세요? 내가 다 일러야지.”
아드리아나는 놀려줄 생각으로 소니아의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발렌틴과 눈이 마주쳤다.
“오드리.”
“신랑이 부르네요. 얼른 가보세요.”
발렌틴이 부르는 대로 가자, 그가 귀빈들을 소개해주며 인사 시켰다. 아드리아나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교양 없는 여자로 여겨지지 않도록 제대로 응대하려 애썼다.
왕자들과도 막상 인사를 해보니 부정적이었던 첫인상이 사라졌다. 바쉬 공작보다 더 큰 키에 겁 먹게 만드는 인상을 가졌던 둘째 왕자는 무척 온화했고 예의가 발랐으며, 거만해 보여서 별로라고 생각했던 왕세자도 훤칠한 용모만큼이나 언행이 시원시원하고 위트가 있어서 여간해서는 남의 미움을 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고국의 이상이나 가치관, 풍경은 물론이고 그곳의 왕족들에게마저 마음을 사로잡혔다. 양 왕국간의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가졌다던 영부인의 말이 완전히 사실이었다고 홀딱 넘어갈 참이었다.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하객들과 다 인사를 나누려면 오늘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대부분은 신랑이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고 신부에게는 휴식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지체 높은 귀족들이 결혼을 하면 며칠씩 피로연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드리아나도 절감할 수 있었다.
“신랑이 신부 아버지랑 한 판 겨눠야 하는데 아쉽구먼.”
이상하리만치 가문에 대해 묻는 이가 없었지만, 발렌틴의 지인들 쪽에서 딱 한 번 그런 말이 나왔다. 뒷말로 수군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발렌틴의 사촌과 친구들이 그를 놀리지 못해서 안달하며 하는 말 같았다.
아무튼 소문난 전투민족이라고 그런 의례가 있을 법도 했다. 아드리아나는 상상 속에서 마른 체구의 클로제 남작이 발렌틴과 겨누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아버지 쪽이 너무 가엾어져서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밉고 원망스럽고, 조금은 걱정이 되는 아버지.
“내가 대신 할까.”
문득 아드리아나의 옆에서 손을 드는 이가 있었다.
제시카였다.
“신부 아버지는 아니지만, 신부 친구로서 말이야.”
아드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이 얼굴에 만연해 있었다. 발렌틴의 친구들 쪽도 그랬다.
“맨 손이라면 몰라도, 검이라면 내가 웨버 경 상대로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사람들 사이에서 흥미어린 웅성거림이 일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발렌틴도 그 말을 듣고 있었던지, 그의 시선은 자기 손님들을 향해 있었지만,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의 손님들의 눈길이 발렌틴에게 머물다가 스르르 아드리아나에게로 미끄러져왔다.
“할까?”
아내에게 기사 노릇을 해줄 사람이 있다면 환영이라며, 발렌틴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펜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드리아나도 당황해서 일어났다.
“거, 검이라뇨.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게다가 제시카는 여자인데….”
벌써 우르르 밖으로 나갈 태세인 사람들을 두리번대며 안절부절 못하는 아드리아나에게 로레인이 말했다.
“제스는 검술 대회에서 해마다 상위권에 랭크되던 사람이에요. 남녀 구분하지 않고 때려눕히는 실력자니까 우리 오빠를 걱정해줘야 할 걸요? 둘이 키 차이도 몇 센티미터밖에 안 나네요.”
“하지만 몸무게는 수십 킬로 차이 날 것 같은데요.”
아드리아나가 조바심을 내며 쫓아나갔지만, 이미 여흥거리에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다 찬물을 뿌릴 타이밍은 놓친 듯했다. 1월의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결투라는 말에 다들 흥분해서 열기를 뿜어댔다.
맞대결에 나선 선수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앞자리가 아드리아나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계단에 앉았다. 마당을 둘러싸고 세워진 건물들의 출입 계단이 관중석을 대신했고, 신랑과 신부 친구는 어느새 검 한 자루씩을 받아 들고 있었다.
“저거 진짜 검 아닌가요?
“걱정 마세요, 마님. 적당히 하다가 신부 쪽이 져주는 거예요.”
엘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신부를 내주기 싫어하는 장인이 져주지 않으려는 일도 있지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이는 제시카가 점지해 준 남자거든요.”
아드리아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리고는 코트의 털소매 안에 시린 손을 감추고 앉아서 시합을 구경할 준비를 했다.
제시카는 여성이지만, 키가 180cm를 넘는데다 워낙 전투력 충만해 보이는 외모를 지녔다. 검술대회 상위권자라는 말을 증명하듯 검을 든 모습이 근사해보일 정도로 어울리게 느껴졌다.
하지만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에게 있어서 집에서도 신문과 서류를 들여다보는 회사원 남편이었다. 그가 투스미아의 예복 차림에 검까지 들고 있는 모습은 무척 낯설고 신선했다. 그러나 발렌틴 본인에게는 검이라는 게 낯설지 않은 물건이었던 듯, 그는 가볍게 검을 잡고 휘두르며 제시카와 맞부딪쳤다.
제시카가 완력에서 크게 밀릴 터였지만, 그녀는 유연하게 회피하며 빠르게 파고들었다. 아드리아나는 두 사람이 생각보다 거칠고 과감하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흠칫거리며 애를 태웠다.
처음부터 결말을 정하고 하는 결투임에도 관중은 즐거워하며 응원하고 함성을 질렀다.
“요즘 시대에 진검을 가지고 놀면서 자라는 민족이라니 놀랍네요.”
아드리아나가 중얼거렸다.
아이넨에서는 치안대원 정도가 검을 차고 다녔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왕실에도 더 이상 기사 제도가 남아 있지 않았고, 기사란 명예로서 주어지는 작위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드리아나의 말을 들은 로레인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세요, 나의 언니. 여기선 흔한 일이죠. 저도 왕년에는 한 칼싸움 했답니다.”
수녀복이 눈에 띄는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같은 투스미아인들도 낄낄대고 웃었다.
몇 번인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시합의 결과는 정해진 대로 발렌틴의 승리로 끝났다. 아드리아나는 새신랑과 신부를 향해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답례로, 한껏 우아한 체하며 앞으로 나가서 두 선수를 격려해주고 각각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떠들석한 분위기에 하루가 정신없이 금방 지나갔다. 저녁 식사를 하고난 후에도 얼마간은 접대로 바빴다.
아드리아나가 발렌틴과 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7시가 지나서였다.
테라스 밖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저녁이 되니 밖이 너무 추워져서 침실 안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 오늘, 발렌틴이 술을 많이 먹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그는 무리해서 마시고 있는 게 아니니 염려 말라며 둘이서 한 잔만 더 하고 싶다고 술을 가져오게 했다.
이내 샴페인 한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술을 잘 모르는 아드리아나라도 그것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 병째로 해치웠던 바로 그 샴페인이었다.
“당신이 이걸 좋아한다기에.”
태연하게 말하며 잔을 채워주는 그를 흘겨보며, 아드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땐 제가 잘 몰라서 그랬던 거예요. 한두 잔 마셔서는 저도 아무렇지 않다고요.”
“물론 그래야지. 당신이 취해서 잠들어버리기라도 하면 나 혼자 쓸쓸해서 안 돼. 잠든 당신 끌어안고 불쌍하게 울 거야.”
발렌틴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키득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당신 울어보신 적은 있어요? 상상이 안 돼요.”
“음. 스무 살 이후에는 없는 것 같아.”
그가 억지로 기억을 짚어보는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때는 무슨 일로 울었는데요?”
아드리아나가 턱에 손을 짚으며 묻자, 발렌틴이 표정을 살짝 굳혔다. 그는 ‘글쎄.’하고 시선을 잔 위로 떨어뜨렸다가 닫혀 있는 창문 밖으로 돌렸다.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당황하며, 아드리아나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아까는 정말 놀랐어요. 왕자님들이 오시다니.”
발렌틴이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분들 오늘 처음 봤어.”
“정말요? 왕세자님이 당신께 너무 친근하게 구셔서 잘 아시던 사이인지 알았어요.”
“그분은 원래 그런 성격이셔. 왕실과 바쉬의 관계가 좋은 이유도 있을 테고.”
“그렇군요.”
다행히도 화제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에게 투스미아가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연합 왕을 모시고 있던 때부터 이어진 현 왕실과 바쉬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반란이 일어나 현 왕실의 선조였던 국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바쉬 왕이 자신의 성에 국왕을 피신시키고 불리한 전투에 대신 뛰어들어 왕위를 되찾아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신의 깊은 관계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바쉬 공작의 정식 후계자도 아니고 같은 성을 물려받지 않은 발렌틴의 결혼식에 왕세자 일행이 직접 행차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바쉬에 대해 이야기하는 발렌틴에게서 선조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영감이니 어쩌니 공작만 보면 피해 다니기 바쁜 그였지만, 공작과 그 선조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멋진 일이네요. 왠지 바쉬 공작님도 더 멋있어 보여요.”
“그분도 젊었을 때는 출전을 많이 하셨지. 지금은 왕국이 평화로워지니까 심심하신지 나를 들볶는 일에까지 열심이시지만.”
“펜에게 들었어요. 그분이 당신 장가 안 가신다고 회사 자금줄까지 막으셨다면서요?”
“테스카 은행장도 공작님과 한통속이야. 집안 사정 같은 사사로운 일로 남의 계좌를 건드리는 위험한 인간들이지. 당신 거기다 돈 맡기고 있지 않나?”
아드리아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발렌틴은 자기도 그렇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아드리아나는 오늘 조금 놀랐다. 발렌틴의 외모가 다른 투스미아인들과는 많이 다른데도 그들과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여서.
아이넨에 있을 때의 발렌틴은 어딘지 고독해 보이고 회의적인 표정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드리아나에게는 늘 다정하고 자상한 약혼자였을 뿐이지만, 지금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 때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의 가족들의 영역 안이어서?
“…당신은 아이넨에서의 생활이 더 좋으세요?”
아드리아나가 물었다.
발렌틴은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만족하고 있어. 무엇보다 당신을 만나기도 했고.”
진지하기만 한 그의 대답에, 아드리아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리고 줄곧 망설여왔던 고민을 떨쳐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반응을 지레짐작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그와의 맹세를 믿으며, 그에게 보다 진실해지기 위한 고백을 하려고.
샴페인을 몇 잔 마신 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발렌틴, 저 할 말이 있어요.”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발렌틴과 처음 스쳐 지났던 열일곱, 그 해에 자신에게 급작스럽게 혼처가 생겨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배경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연인이 있었다든지, 혼처가 어디였다든지 하는 상세한 요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알리지 않더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야기해줄 수 있었고, 발렌틴에게 필요 이상의 공개로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발렌틴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계셨나요?”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제게 리노아스 남작에 대해 말씀하셨던 때에…, 혹시 제가 털어놓길 바라셨던 건 아닌가요?”
그때 바로 사실을 말해주지 못했음이 마음에 걸렸었다.
발렌틴이 입술 끝을 부드럽게 올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오래지 않아 내게 말해주리라고 생각했어.”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왜 모르는 척 해주셨어요?”
“당신을 잃기 싫어서.”
발렌틴이 담담하게 말하고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고 당신의 진짜 신분이 외부로 알려지는 게 꺼려져서. 당신을 찾는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아드리아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들으며,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오늘 당신의 고백을 듣고 처음 이 사실을 안 걸로 할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당신과 부부의 연을 맺은 선의의 피해자인 셈이지.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이유로든 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지 않을 거야.”
아드리아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켜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지게 될까 봐, 나도 당신에게 이런 말 하기가 조금 어려웠어.”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아뇨. 제가 미안해요. 빨리 말하고 싶었지만, 당신을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어 서먹해서….”
“알아. 그랬을 테지.”
그가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드리아나는 더욱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제 진짜 이름도 아셨나요?”
발렌틴이 고개를 들고, 다정한 눈으로 아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가는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대답하듯 이름을 불렀다.
“아드리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