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바쉬 공작의 성 =========================================================================
아드리아나는 마치 도전해오라는 듯한 공작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발렌틴이 미리 주의를 주었던 이유가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시험을 당하는 건가?’
하지만 남편의 친척이 자신을 시험하거나 비아냥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말을 심각하게 듣지 말고 편하게 대하라는 남편의 귀띔도 있었다.
“공작 저하, 이 성은 저희 식구가 관리하고 살기에는 너무 큽니다.”
아드리아나는 공작이 그냥 한 번 해본 소리일 거라고 결론짓고 겸연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공작은 눈썹과 눈이 거의 맞닿아 있을 정도로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발렌틴의 다른 친척 중에서도 그런 위협적인 인상의 이목구비를 가진 자상한 이가 있었다.
‘아, 그래, 루미아 씨와 닮으셨어.’
아드리아나가 공작의 짙은 눈썹을 바라보며 남편의 사촌을 떠올린 그때, 공작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성을 관리하는 건 아랫사람들의 일이네. 성주가 관리해야 하는 것들은 주로 성 바깥에 있지.”
공작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미소를 지우며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공작 내외가 엄숙한 얼굴로 자신의 답을 재촉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왜 이런 실없어 보이는 화제를 진지하게 이어나가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재치 있게 순발력을 발휘하여 성주가 되는 상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밖의 일이었다.
발렌틴이 다소 빠른 말투로 끼어들었다.
“송구하오나, 공작 저하. 저희는-.
그 순간 공작이 손바닥을 들어 올려 발렌틴의 말을 가로막았다. 발렌틴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라티스 양.”
공작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영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남편 될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니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그대 부부가 바쉬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이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영부인의 외모는 60대로 보였는데 조용하고 힘 있는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젊게 들렸다. 그녀가 잠시 틈을 준 후에 말을 이었다.
“왕국의 법과 전통에 의하면 공작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혈육에게 바쉬를 물려줄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공작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장손인 칼라디 루미아와 로아타르의 브란덴 웨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발렌틴 웨버가 훗날 이 성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말이었다.
그녀의 화법과 발음이 아드리아나가 익힌 것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뜻 그대로 해석한 후에도 옳게 들었는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아드리아나는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곁에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발렌틴은 고개를 반듯하게 든 채로, 조용히 공작의 발치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에게 반대 의견이 있는가?”
공작이 물었다.
아드리아나가 조금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해 전혀 들어본 일이 없기에…. 하오나 제 남편은 농사를 짓고 장사하는 일밖에 겪어본 적이 없는 분이신데, 바쉬 같은 영지를 다스리실 수 있을까요?”
공작이 입술 한쪽 끝을 틀어 올리며 웃었다. 그 순간의 표정이 아드리아나의 남편의 것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아드리아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만일 얄팍한 경험을 내세워서 이 땅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자처하는 자가 있다면 비웃음을 사 마땅하네. 장성한 자식을 가진 여자가 갓난이를 가진 여자보다 더 빨리 훌륭한 어머니가 되리라고 확신하는가? 군주의 자리는 몇 년의 경력 차이로 우열을 가려 세울 자리가 아니네.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야. 그건 피에 들어있지.”
공작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을 가진 투로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무심코 눈길을 돌려 남편을 바라보았다.
바쉬 공작의 장손이 낳은 장손. 국왕성 다음 간다는 철옹성과 이시스의 주인이 될 상속자 후보. 그게 남편의 다른 신분이라니,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
“그냥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뿐이야.”
발렌틴이 테이블 앞에 느슨히 기대어 앉아서 말린 과일을 씹으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드리아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걸 보면 내심 아내의 반응이 두려웠던 게 틀림없었다.
“당신의 외조부셨군요. 바쉬 공작님이.”
“음…. 얼핏 기억이 나는군.”
인정하기 싫어하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발렌틴이 자기 입으로 공작의 친척이라는 말을 했었다. 공작과의 관계를 속인 것은 아니다. 후계자 서열 안에 들 정도로 가까운 혈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조금 황당했지만, 알리기 싫은 친척이 있다며 결혼 전부터 봐달라던 그였다.
애초에 아드리아나에게는 집안 사정을 감춘다는 이유로 남편을 괘씸해할 자격도 없었다.
“…제가 부담스러워할 줄 아셨나요?”
아드리아나가 말린 육포를 집어서 남편의 입에 물려주며 물었다. 그에게 과일보다는 더 전투적으로 씹을 것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기보다는 외조부라는 말이 잘 안 나와서. 그런 식으로 불러본 적도 없고. 몰라도 그만 알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지.”
미간을 좁히며 말하는 발렌틴을 보며, 아드리아나는 다시 허허 웃었다.
“당신 태도가 꼭 아버지한테 반항하는 사춘기 소년 같아요. 그것도 자기랑 똑 닮은 아버지에게.”
“그런 소년을 본 적은 있어?”
발렌틴이 시선을 사뭇 부드럽게 바꾸며 말했다.
“그럼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가게에서 일을 해보았는걸요. 보호소에서 투정하는 어린 아이들하고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아드리아나는 몸을 일으키고 테이블을 돌아, 발렌틴의 옆에다 의자를 붙였다. 그리고 테이블에다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발렌틴 웨버 씨가 바쉬의 후계자시라는 말씀인가요?”
“난 두 번째야.”
발렌틴이 먹던 것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럼 첫 번째는요?”
“내 어머니의 여동생 남편이 계승 서열 1위이고, 내가 2위, 그 다음으로 카네시스 루미아가 3위. 내가 중간에 끼어 있어서 조금 복잡하지. 이모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가문을 이을 예정이었는데, 내가 태어나고 정통성을 따지는 일이 되면서 그쪽하고 조금 껄끄러워졌어.”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에게 바쉬의 상속 배경에 대해 들려주었다.
투스미아가 철저히 장손 중심에 남성 중심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론도 어느 왕국에나 그런 경향이 남아 있었지만, 투스미아만큼 전통이 강력하게 효력을 발휘하는 곳도 없었다.
그들은 첫 아이를 특별히 귀하게 여겼다. 첫 아이가 부모의 혼을 담은 새로운 그릇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와 이름으로 얻을 자격 있는 모든 귀한 것이 첫째에게 물려졌다. 그들은 둘째 이후부터는 공평하게 사랑해야 할 귀여운 자녀로 대했지만, 첫 아이는 자신의 다음 생을 이어갈 후계자로서 별도의 취급을 했다. 또한 남성을 후계자로 선호하는 경향도 두드러져서, 첫 아이가 여성이 되고 둘째 아이가 나이 차 적은 아들이 될 경우에는 다툼이 생기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데 바쉬 공작의 경우에는 딸만 둘을 낳았다. 그 중 맏이가 발렌틴의 어머니인 칼리디인데, 그녀는 일찍이 가문을 잇지 않고 웨버 가의 외아들인 남편의 성을 이으면서 자발적으로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 후 공작의 둘째 딸이 남편을 데릴사위로 들였다. 그 데릴사위가 루미아의 성을 가지게 되면서 후계자 서열 1위로 올랐다. 그러다 칼리디가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첫 아이를 남아로 낳게 되자, 바쉬 공작의 마음이 순식간에 그쪽으로 기운 것이다.
발렌틴은 바쉬 공작의 장손이 낳은 첫 아이인데다 남아였다. 그가 공작의 성씨를 잇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모님 일가는 루미아라는 성을 이으면서 제대로 소양을 쌓아가며 지내왔고 나는 그렇지 않았지. 피를 가지고 정통성을 따져서, 굳이 아이넨의 장사치로 살겠다는 나를 공작의 자리에 앉혀봤자 뭐가 제대로 돌아가겠소? 난 밖에서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좋아.”
발렌틴이 말했다. 아드리아나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물론 당신 말을 잘 듣고 행복하게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자유요, 부인.”
아드리아나는 충실한 남편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여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쩐지…. 전 당신이 어머니와 성이 같은 친척을 성으로 막 부르시기에 별별 상상을 다 했어요. 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신가, 같이 안 사시는 건가 하고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발렌틴이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어차피 우리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웨버였어.”
“그건 그렇겠지만요.”
아무래도 발렌틴은 외조부의 유산을 상속받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실 아드리아나로서도 남편이 공작위에 오르는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농사짓고 장사하며 살았다는 사람이 무슨 수로 흥미도 없는 정치를 하겠는가.
‘공작님이라니….’
아드리아나는 남편이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모만큼은 첫눈에 반할 정도였다. 공작보다는 왕자님이라고 생각했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새삼 창피해졌다. 신장 2m를 넘는 현 바쉬 공작과 비교하면 덩치로 아랫사람들을 압도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회사를 잘 다스리고 있고,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줄 것 같은 남자다. 공작의 말처럼 피로 물려받는 자리라면 무리일 것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수상쩍은 미소를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드리아나는 공작님보다는 다른 특정 지위의 이름이 더 어울리겠다고 말하려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속마음을 말했다가는 이런 때에 긴장감도 없이 속없는 소리를 한다고 놀림을 받게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발렌틴이 시간을 확인하고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식사하러 가지.”
그는 몹시 내키지 않는 내색을 보였지만, 문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감쪽같이 평소의 날카롭고 단정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공작의 성에 있으면서 특별히 주눅 들거나 더 근엄한 체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아무튼 공작을 마주하고 있거나 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면, 아드리아나가 알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진로를 변경해서 공작이 되시든 농부가 되시든, 당신이 행복하시면 저도 좋아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발렌틴은 감동을 느낀 듯했다. 그가 한참을 다정한 미소로 바라봐주고 머리카락 위에 입을 쪽 맞추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행여 영감님 앞에서는 절대 말하지 마, 여보.”
그래도 내심 기분이 좋았던지, 그는 아드리아나의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아드리아나는 아이넨에서 엘레나에게 주의를 받았던 터라 조금 신경 썼지만, 이번에 펜은 주의를 주지 않았다.
점심 식사 자리에는 발렌틴의 이모 가족도 함께했다. 바쉬의 후계 서열 1위라는 장본인, 카네시스 루미아의 아버지와 그의 작은 아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카네시스의 붙임성과 웃음기를 쏙 빼고 빚은 듯한 남자들이었다.
그들 일가는 발렌틴 부부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 별 대화를 하지 않았다. 식사 하는 내내 다들 과묵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발렌틴의 작은 사촌의 시선에서는 감추지 않은 경계심과 적의마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굳은 얼굴의 청년은 인상을 쓴 채로, 아드리아나의 반지낀 손을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투스미아에서는 아직 약혼 관계로만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아드리아나도 벌써 결혼반지를 나눠 낀 모습이 어찌 보일지 걱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반지를 뺄 수는 없었다.
‘아휴….’
아드리아나는 최대한 그들을 불편하게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발렌틴과 눈이 마주치면 그가 보고 있다고 챙겨주듯 조용히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러면 아드리아나도 안심하며 남편에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식사 중에 영부인은 몇 번이나 아드리아나를 관찰하듯 지그시 바라보곤 했다. 발렌틴의 어머니보다 훨씬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부드럽게 응시하는 시선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전부터 발렌틴도 그런 식으로 아드리아나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공작이 타고나는 거라면, 아마 영부인도 그럴 거야.’
영부인의 마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도 남편의 것 못지않았다. 많이 나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남편 옆에서 움츠러들고 순종하는 여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부정적인 생각은 일절 머릿속에 묶어두지 않고 흘려보내며 얌전히 식사를 했다. 멋대로 ‘자상한 친척 분들’이라는 이미지를 머리에 심어왔던 덕분인지, 공작 내외는 이모 일가에 비해 차라리 편안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자, 영부인이 아드리아나를 따로 불러냈다. 그 사이에 발렌틴은 이모 일가와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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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많이 늦었습니다ㅜㅜ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