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5 3부- 비밀(발렌틴) =========================================================================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발렌틴이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이었다.
꿈을 꾸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어 함께 사는 꿈이었다. 두 사람은 햇빛 아래에서 온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나누었고, 달빛 아래에서는 열정과 환희로 타오르는 밤을 나누었다. 머지않아 발렌틴을 닮은 아이와 그녀를 닮은 아이가 저택의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게 되었다.
“…말씀인즉, 주무시는 동안에 심사숙고하셨다는 뜻입니까?”
전화를 받으라고 부르러 온 펜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푸념에 가까운 그의 조언에 따라, 발렌틴은 좀 더 신중하게 시간을 들여서 이 일에 대해 재고해 보기로 했다.
잠기운이 달아나고 업무에 집중하면서 정신 상태를 회복하는 동안, 이렇게 섣부르게 결정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그도 인정하게 되었다. 길에서 만나 신분도 모르는 여자에게 인생을 결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펜은 그녀에 대해 알아본 일단의 결과를 발렌틴에게 보고했다.
“오드리 양은 작년 11월에 테스카로 왔다고 합니다. 돈벌이로 찻집 일을 다니고 있는데, 가게는 은행 가 도로변에서 낮 동안만 운영하는 건전한 곳입니다. 주말에는 광장 마을의 어느 귀부인 댁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있고, 그 외의 시간은 집에서 여동생을 돌보는 게 다라고 합니다. 출신은 코니스의 라티스라는 지역으로 알려졌습니다. 본인은 고향에 약혼자가 있다고 주장한다는데, 헤밀에서의 사고와 연관 지어 봤을 때, 현재도 유효한 관계일까 회의적이긴 합니다.”
펜의 말에 발렌틴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여자가 고향에 약혼자를 두고 이쪽으로 시집오는 길이었다는 말인가? 결혼하기 싫어서 출신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얘기군.”
“그럴 가능성이 높겠습니다만, 여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코니스 쪽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거짓말할 배짱이 있는 여자로는 안 보이던데….”
“그래서 웨버 경께서 여자한테 잘 속으시는 겁니다.”
펜의 말에 발렌틴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도 펜은 가혹한 지적을 그치지 않았다.
“경께서는 정 주고 마음 주고 눈에 뭐가 씌고 나면 맹인보다 앞을 못 보시게 되지요. 지금도 제가 어떤 결과를 갖다드리게 되든, 웨버 경의 마음 속에서 이미 답이 정해진 건 아닐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1절만 하게.”
발렌틴이 말하고서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아무튼 기다려 주십시오. 코니스 쪽에 연락을 넣어 아가씨의 평판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약혼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음.”
발렌틴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혼자와는 어떤 관계였는지도 알고 싶어. 가문 간의 상황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얼마나 깊었는지. 만약 여자의 마음이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면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네.”
“바람직한 태도이십니다. 조만간 들려드리겠습니다.”
발렌틴은 자신이 그 여자에 대해 아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귀찮은 문제가 있다면 손을 뻗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다만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그녀를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에는 조바심이 생겼다. 발렌틴이 그녀의 평판을 알아보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누군가 먼저 그녀를 신붓감으로 데려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여자 혼자 살며 몹쓸 일에 노출되기 쉬운 위태로운 환경도 걱정스러웠다.
“사람을 붙여서 신변의 위협과 같은 일에서는 최소한의 보호를 하겠습니다만, 다른 간섭은 일절 안 하시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으음….”
이를테면, 누군가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려할 때에는 막아주겠지만, 그녀가 제 발로 따라갈 경우에는 두고 보기만 하겠다는 뜻이다.
발렌틴도 알고 있었다. 외간 남자를 따라 으슥한 거리의 술집 따위에 드나드는 여자에 관해 듣게 되었을 때에는 간섭하고 말리려 들지 말고 포기하고 잊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설령 그 여자가 자신의 약혼녀였다고 해도.
일주일 뒤, 펜이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었다.
“오드리 양의 이름으로는 코니스로 연락을 주고받은 전혀 이력이 없습니다. 슈하스와 헤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분도 가짜더군요. 실제로 코니스에 라티스라는 지명과 성은 존재하나, 오드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걸로 확인됩니다.”
“그런가.”
“꺼림칙하지 않으십니까?”
펜은 어떻게든 발렌틴의 흥미를 떨어뜨려 볼 셈인 듯했다. 그러나 여자를 향한 발렌틴의 흥미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날, 폭풍우 속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품 안에 안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경험했던 발렌틴만이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녀를 겁박하고 있는 공포의 대상이 무엇일지 알고 싶어졌다. 만일 그때 그녀가 조난 상황 이외의 또 다른 공포에 쫓겨 떨고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 과거마저 버린 것이라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닌 듯합니다만, 오드리 양이 아너슨 댁에 다니시더군요. 아너슨 부인께 기타 교습을 해준다고 합니다.”
펜의 말에 발렌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소니아가 귀여운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쓰긴 하지. 그 정도 미인이면 벌써 눈에 들었을 만해. 그런데 소니아가 이젠 기타까지 배운다고?”
“…미인이라 좋으신 거였군요, 웨버 경.”
펜이 지그시 발렌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란 듯 차갑게 마주하는 시선을 받아내며, 발렌틴이 말했다.
“그게 뭐. 여자는 어차피 다 비슷하니 보기 좋은 편이 나은 게 당연하네.”
펜이 말없이 계속 눈길만 주자, 발렌틴이 친절하게 보충했다.
“그래, 눈에만 좋은 건 아니겠더군. 조금만 살이 더 붙으면 촉감도 대단할 거야.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해보였지. 빨아먹으면 단 맛도 날 것 같고.”
그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쉬 공작에게 보낼 편지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펜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남았습니다. 남성 혐오증이 의심된다고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다가 남성과 둘이 되면 거부감을 보이고 굉장히 날카로워진다고 합니다. 영애들이 보이는 경계심과는 좀 다르다고 합니다. 이성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남자를 보고 ‘손대면 할퀼 기세로 도망쳤다’고 하더군요.”
발렌틴은 그 말을 시시하게 흘려들으며 웃었다.
“애들도 아니고.”
“웃을 일이 아닙니다. 웨버 경께도 그렇게 하면 어쩝니까? 애초에 약혼자 설도 거짓이고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서 회피 중일지도 모르죠.”
“남편이 될 사람한테는 다르겠지. 내가 안아봤을 때 괜찮았네.”
발렌틴은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고, 쓰고 있는 편지지와 그가 받은 편지를 번갈아 보며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펜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푸념했다.
“웨버 경, 아시다시피 그때는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경께 안기느냐 벼랑 아래로 떨어지느냐 양자 택일이나 다름없었죠.”
“결혼도 충분히 특수한 상황이야. 배우자로 삼고 의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면 낯선 남자가 아니라 자기 남편으로 제대로 보이지 않겠나.”
“…전 오드리 양이 웨버 경을 본 순간 ‘아, 이 남자가 내 남편으로 내정 받고 태어나신 분이구나.’ 하고 깨닫지 못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펜이 중얼거렸다.
발렌틴은 긴장감 없이 미소 짓고만 있다가 잠시 펜을 내려놓았다. 이제 절반을 채운 편지지가 아닌 다른 생각으로 조용해졌다.
중대한 흠결이 있지 않는 한, 그녀를 아내로 맞으리라.
아름답고 상냥하고 귀여운 데다, 몇 년을 보호자 없이 떠돌면서도 아무데나 섞이지 않겠다는 오만한 고집을 지키고 있는 여자다. 테스카와 같은 도시에서 배경도 없는 어린 여자가 온갖 유혹에 굴하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녀의 영혼이 무사할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또한 그녀의 가문 수준과 교양 또한 긍정적으로 짐작되었다. 뭐든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는 여자는 드물다. 그녀가 투스미아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호텔에서 들었던 그 지저귀는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녀는 그 상냥한 목소리로 발렌틴의 아이에게 아버지의 고향 언어를 가르쳐줄 수도 있으리라.
“음….”
잠시 이마를 감싸며 눈을 감고 신음하자, 펜이 기다렸다는 듯 ‘생각해 보시니 역시 그 아가씨와는 어렵겠지요?’하고 물어왔다.
“그게 아니야. 그녀가 나 때문에 침대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일을 떠올렸더니 그 말랑말랑한 몸이 얼마나 아팠을지 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그러네.”
발렌틴의 말에, 펜은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허리를 숙이더니, 마음대로 물러가려고 몸을 돌렸다.
“펜.”
“예, 주인님.”
“그 여잘 주운 날짜를 기억하나?”
발렌틴의 물음에 펜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당시부터의 사고 기사와 실종자 명단을 살피고 있습니다만, 양이 방대해서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잠시 후 펜이 물러가고, 발렌틴은 생각에 잠겼다.
여자는 코니스의 라티스 출신이라고 밝혔다지만,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뜻밖에 앙큼한 데가 있다. 사실은 어딘가의 귀족 가로 시집가던 아이넨 내부 가문의 영애라고 보는 게 맞을 듯했다.
그녀는 사고 이후로 몇 년 째 위험하고 고된 생활을 하고 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서라 추측해 보더라도 보통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이 시대의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일이, 싫은 남편과 사는 일보다 결코 낫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겁 없고 철모르는 어린 여자가 모험을 동경하기라도 했던 걸까.
어쨌든 석연치 않은 점은 미리 풀어놔야 했다. 혹여 왕실 관계자의 정부가 될 여자였다든지 하면 골치 아프다. 아름답고 순진한 외모에 화려한 밤 실력을 가진 여자들이 주로 왕실로 보내졌다. 후환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더라도, 성에 관해 보수적인 발렌틴으로서는 그런 여자까지 포용할 마음은 없었다.
그로부터 2주 후, 펜이 헤밀의 사고를 추적한 최종 결과를 내놓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염려했지만, 발렌틴은 별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시간이 너무 지났고, 벌써 예전에 물 건너 간 일이었다. 찜찜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 역시 그녀와의 결혼 의지를 꺾어놓을 정도는 못되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고….’
발렌틴은 며칠 후 슈하스 성에 용무가 있어 방문했을 때, 성주의 친척 얼린이 보이기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얼린 경은 리노아스 출신이시니, 그쪽 이야기를 많이 아시겠군.”
“고향을 떠나온 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지금도 웬만큼 소식은 전해 듣고 있습니다. 리노아스로 일을 가십니까?”
얼린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순전한 호의와 정보 수집욕에 의한 관심일 뿐, 그가 떠들기보다는 혼자만의 비밀을 즐기는 남자라는 사실을 발렌틴은 잘 알고 있었다.
“사적인 호기심이오. 리노아스의 남작 가가 여러 가지로 떠들석했더군.”
“아아….”
얼린이 눈매를 좁히며 입술 끝을 미세하게 끌어올렸다. 발렌틴은 그에게서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는 들을 수 있게 되리라고 여기며 질문을 던졌다.
“평판이 극과 극이던데, 얼린 경이 가지셨던 인상은 어땠는지 듣고 싶소. 특히, 아드리아나 클로제 양에 대해.”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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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