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약속 =========================================================================
여보. 내가 이 남자를 여보라고 불렀어.
입에 담아본 그 호칭이 감격스러웠다. 품 안의 남편은 그저 조용했다. 아드리아나는 가슴 속에 흘러넘치는 애정을 느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당신 몸의 일부라면 전부 예뻐해 드릴게요. 그런 걸로 눈 밖에 나시다니 말도 안 돼요. 제가 사람들에게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하셨다니까 마음이 아프잖아요.”
“당신 마음 아프게 할 정도로 고민한 건 아니야. 어차피 샤워하고 얼굴을 면도하면서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이지. 여자가 날마다 화장하는 일에 비하면 대단한 노고라고 말할 수도 없어.”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허리 뒤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내가 조금 우는 소리를 했다고, 바로 조금 전에 본인이 밝힌 아침마다의 애환을 평가절하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녜요. 이제 그러시지 마세요. 앞으로는 한 올 한 올 소중히 생각해 드릴게요.”
역시 웃음이 나와서 참지 못했다. 그를 풀어주며 내려다보자 눈을 살짝 치켜뜨고 흘겨보는 얼굴이 보였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소니아인가요?”
아드리아나가 그를 놓아주고 애정이 듬뿍 담긴 손길로 그의 어깨와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곁에 앉았다.
“...소니아는 아니야.”
“그럼요? 당신이 쉐이드 양이나 미네타와 그런 이야기까지 나누시지는 않을 테죠.”
“다 아는 수가 있소. 그런데 생각보다 당신 취향을 아는 이가 많은가 보군.”
어쩐지 밝히지 않고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가 수상쩍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에게 그 일을 일러바쳤을 인물이 누구일지 추측해보았다. 후보가 적지는 않았다. 로빈의 가슴털에 관해서는 남들과 종종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역할의 배우가 워낙 인기 배우였고 여자들 간의 대화 소재로서 심심치 않게 오르내렸기 때문이었다.
“그치만 당신과도 아는 사이인 친구라면 소니아 외에 딱히 떠오르질 않아요. 대체 누굴까....”
“생각해 봐도 소용없어. 내가 누누이 말했잖소. 당신에 관해서는 알 만큼 안다고.”
“정말 놀라운 분이시네요. 당신은 저를 항상 지켜보고 계신 건가요?”
장난스럽게 묻자, 발렌틴이 묘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럴 때도 있고.”
그의 대답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팔을 내밀기에 도로 품에 안겼다.
발렌틴이 어깨동무하듯 아드리아나의 팔을 감싸 안고 나른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만일 그가 정말 자신의 일을 다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 꿈 같았던 청혼. 아드리아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꿈 속의 이가 현실로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어쩌면 어젯밤 잠을 적게 자서, 또는 오늘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를 만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혼인 신고를 하고 ‘웨버 부인’으로 불리게 된 날이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 있나?”
문득 발렌틴이 나직이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에게 기대고 있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의 손가락은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다정하게 만지고 있었다.
현재의 아드리아나로서는 그에게 보인다고 조금 창피스러운 일은 있을지언정, 떳떳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그를 최초로 만났던 테스카에서의 시간부터 통틀어 헤아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의 고동이 희미하게 속도를 높였다.
“난 당신의 모든 걸 알고 싶어. 다 보고 싶어.”
아드리아나는 잠잠한 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당신이 내 몸을 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도 전부 보고 싶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굵고 긴 손가락이 아드리아나의 얼굴 옆선을 타고 턱으로 내려왔다. 목을 쓸어내리고 더 내려가서는 부드럽게 오르내리고 있는 젖가슴 위에 머물렀다. 아드리아나는 호흡이 가빠져서 상체를 들먹였다. 발렌틴의 말이 단순히 성적인 의미의 것이었는지, 또는 다른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발렌틴이 몸을 숙이고 입술을 겹쳤다. 벌어진 채로 닿은 그의 입술 안에서 뜨거운 혀가 움직이며 아드리아나의 입술을 핥았다.
“으음....”
등줄기가 짜릿해져서 아드리아나는 눈을 꼭 감고 신음했다. 발렌틴은 여느 때처럼 손으로 머리를 받쳐주지 않고 입술과 혀만 댄 채로 키스했다. 손은 가슴 위를 가만히 감싸 덮고만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손바닥의 온도가 몸으로 스며들어 미열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입맞춤에 몰두했다. 그전까지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은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그가 한쪽 팔로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들어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혀놓았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약하게 밀어냈다. 의도치 않았는데도 앙탈 부리는 듯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발렌틴은 아내의 어설픈 반항을 무시하고, 그의 얼굴을 눈앞에 위치한 여린 목으로 가져갔다.
그의 뺨과 코와 입술이 아드리아나의 목덜미를 가볍게 스치며 훑었다. 아슬아슬하게 닿는 접촉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발렌틴....”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과의 이런 접촉을 피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급작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해가 지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다.
커다란 손이 아드리아나의 가슴 위에서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찰했다. 봉긋한 언덕의 정점이 그의 손바닥 안에 비벼지며 뾰족하게 일어섰다.
“흑.... 그만....”
환한 대낮의 후원이 뻥 뚫린 곳에 보이는 1층 테라스였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의 2층과는 달랐다.
발렌틴은 아랑곳 않고 아드리아나의 가는 팔과 다리를 잡고 들어올려서 자기 무릎 위나 어깨 위로 옮겨놓으며 느긋하게 애무했다. 여유로운 손길로 상체를 어루만지고, 다리의 위치를 바꾸어 앉히며 엉덩이를 주물렀다. 제법 힘을 주고 버티며 버둥대고 있음에도 몸이 솜인형처럼 허무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에 아드리아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며칠 전에는 아드리아나가 마음대로 하는 동안 무력하게 견디고만 있던 사람이었다.
엉덩이와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이 위험한 깊이까지 들어왔다. 드레스의 도톰한 천자락 위로 그의 손가락이 축축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중심부 주변을 건드렸다.
“아학....”
아드리아나는 펄쩍 뛰어오를 듯 움찔하며 몸을 도사렸다. 그러자 발렌틴이 손을 떼고 허벅지를 팔로 안더니 바짝 끌어당기며 달래주듯 등을 쓸었다. 일부러 속을 타게 만들어놓고 다정하게 구는 그의 얼굴을, 아드리아나는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화내지 마. 당신이 뭐든 상을 주겠노라 약속하지 않았소?”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당당하게 아드리아나의 몸을 어루만졌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발렌틴이 그 입술을 빨았다.
“우음... 뽀, 뽀뽀해 달라는 뜻이 아니란 말이에요.”
조그맣게 말하고, 그의 가슴을 도로 밀어냈다.
“안 되는 것도 아니잖소, 부인.”
그가 다시 몸을 누르며 입을 맞추었다.
아드리아나는 마지못한 척 눈을 감았다. 그의 입맞춤과 손길, 목소리, 눈빛, 자신을 부르는 이 호칭까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언제까지나 나를 이렇게 바라봐줄까, 늘 이런 애정을 담아서 불러줄까 하는 생각에 가슴 속이 젖어들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가 몸 앞에 교차하여 가리고 있는 두 팔을 내버려두고 그 외의 부분을 어루만지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가슴 앞을 가린 채로 불끈 쥐고 있는 작은 두 주먹까지 어루만지며 입술을 대보고 나서는, 미처 가리지 못한 가슴의 볼록한 일부분을 꼭 눌러보았다. 거기에 코를 들이대고 숨을 들이마셨다.
“읏....”
수치심을 자극하는 행동에 몸을 더욱 가리며 울상 지었지만, 발렌틴은 이제 아드리아나의 손목을 잡고 팔마저 치우려 했다. 아드리아나는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몸은 달아올라서 헐떡이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멈춰주지 않을 터였다.
“너무 창피해요, 정말로요. 그만.... 나중에....”
꺼질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발렌틴이 순순히 팔을 놓아주었다.
“그럼 침실로 가지. 안아서 데려갈까?”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하는데 오늘 거사를 치룰 작정이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만일 그가 또 자기 학대를 하며 어느 선에서 참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거라면 그 또한 두려운 일이었다.
“아직 싫소?”
그가 묻더니, 고심하듯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당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모호한 표현만 던져놓고, 확실히 해두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은 ‘뭐든’이라고 말했소. 그건 내가 멈추든, 설령 멈추지 못하든 괜찮다는 뜻이지.”
아드리아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오늘도 따로 자게 될 줄 알았어요. 내일 바로 헤밀로 가라고 하셨고....”
“그랬소. 당신이랑 며칠씩 자다보면 나 혼자 못 자게 될 것 같으니 빨리 다녀오는 게 나아.”
발렌틴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쁨으로 찡해지는 가슴을 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당신을 끌어안고 잘 거야.”
그는 거절이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두 볼을 물들이며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아직 잘 시간이 멀었어요.”
발렌틴이 옅게 웃더니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고 말했다.
“지금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소, 부인.”
아드리아나는 열 때문에 마른 입술을 적셨다. 숨이 턱 막혔다. 정중하게 청한다고 한 말인 게 분명했지만, 그에게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흘리듯 대수롭지 않게 말해버린 그 단어가, 감정 표현으로 쓰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었음에도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아드리아나는 지금까지 그가 자신을 부인으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서 청혼했다는 사실만 알았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필수는 아니었다.
멍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가 아드리아나를 안고 일어났다.
“...발렌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머리를 기댔다.
“저를....”
사랑하시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그렇다고 대답해주리라. 그는 성실한 결혼관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에게나 아드리아나에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절절한 연모의 마음을 담아 고백하는 그것과 같지는 않게 느껴진다 해도 가치가 덜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한때 노아에게 들었던 그 가슴 저미는 고백의 말보다 열정이 덜하고 투박해도 좋으니 부디 한결같이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 속이 뭉클하고 갈증이 일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발렌틴은 잠시 아드리아나의 말을 기다리다 척척 2층까지 올라갔다. 두 사람의 방 사이에 있는 응접실 앞에 왔을 때, 그는 아드리아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세워 주고서, 눈을 깜박이며 뒷말을 채근하는 듯 바라보았다.
“...저 목욕하고 싶어요.”
그것이 용건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자, 발렌틴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에 했지 않소?”
“그래도, 또 하고 싶어요.”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마치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발렌틴은 말없이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와요.”
“알겠어요.”
아드리아나는 허둥지둥 방에 들렀다가 욕실로 가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급한 손길로 머리를 묶어서 말아올려 놓고, 아침보다 여러 번 비누칠을 하고 헹궈낸 후 몸을 닦았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욕실 문을 나오기 전, 발렌틴의 취향임이 틀림없다며 선물 받은 그 속옷 세트를 들고 망설였다. 너무 노골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지고 들어온 게 이것뿐이라 이제와서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잠시 후 잠옷까지 입고 나와서 자신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인기척이 없기에, 이번에는 발렌틴의 방으로 가서 노크를 하고 다시 문을 열어 보았다.
방 안에서 젖은 머리를 닦으며 서 있던 발렌틴이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발견하고서 손을 내밀었다. 아드리아나는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시간을 끄는 일 없이 바로 침대로 이끌었다. 아드리아나는 어색해 하며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서 대신 가운을 벗겨주는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누워요, 오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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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털 면도 정도야 금방 하겠죠^^
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감동..ㅜ//ㅜ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