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입맞춤 =========================================================================
테스카에 온 셋째 날 아침은 크리스마스 당일이고 토요일 휴일이었다. 저택에는 집 주인인 예비 부부 외에도 집사와 요리사 한 사람과 펜, 엘레나 네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2층 응접실의 벽난로 앞 한구석에 앉아서 혼자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레코드의 곡을 틀어놓았고, 정원 풍경이 잘 보이도록 창가의 커튼도 활짝 개어 놓았다. 눈이 없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이번 휴일은 예년보다 기온이 높아져서 덜 추웠고 눈도 오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집중하여 뜨개바늘을 움직이며 맹렬한 기세로 담요를 완성해갔다. 웬디에게 주려고 그녀가 좋아하는 옅은 분홍색과 아이보리색을 섞어서 도톰하게 만들고 있었다.
약혼자의 집에서 보내는 평화롭고 느긋한 한때였다.
만약 지금 이 모습을 제시카가 보았더라면, 자기 조언대로 집에서 뜨개질이나 하고 있다고 반겼을지 모를 일이다.
사소한 불평거리가 있다면, 지금 약혼자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지금도 곁에 없고, 어젯밤 자는 동안에도 곁에 없었다.
발렌틴은 어제 같이 자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광장에서의 입맞춤 이후, 앞으로 그와 자기 전에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나누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지만, 그는 입술이 아닌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잘 자라고 인사한 후에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그분도 피곤하셨을 거야. 그저께 나 때문에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 한데다가 저녁 늦게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셨으니까.’
이해하는 만큼 서운하지도 않아야 했건만 ‘오늘은 제 방에서 안 주무시나요?’ 하고 물었다가 ‘그냥 편하게 자요’라는 말을 들었던 것은 솔직히 치명타였다. 아드리아나는 오늘은 그를 만지작대며 귀찮게 하지 않고 얌전히 끌어 안겨서 자는 것으로 만족하겠다고 다짐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도 따로 주무시려나.’
그럼 내일은? 모레는?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확인하면 간단할 일을 묻지도 못하고 고민했다. 간접적으로라도 한 번 함께 자자고 청했다가 퇴짜를 맞은 이후로는 재차 물어보기가 어려워졌다.
‘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매일 같이 잘지 따로 잘지를 서로 확인해야 하는 거야?’
아드리아나는 어휴, 하고 한숨짓고 있다가, 어느새 곁에 나타난 발렌틴을 보고 놀라서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렇게 놀라?”
“으, 음악 소리 때문에 올라오시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아드리아나가 겸연쩍게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발렌틴이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더니,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아너슨 부부가 점심을 먹으러 오겠다는군. 그러라고 했는데 괜찮지?”
“그럼요. 좋아요.”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에게 자신이 소니아와 알던 사이라고 밝혔었다. 그때 그는 신기해하는 한편, 뭔가 꺼림칙한 듯 한순간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었다.
“소니아 씨가 당신을 아들 같다고 말했었어요.”
아드리아나는 재미있어서 말했지만, 발렌틴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아들은 무슨…. 소니아가 올해 서른은 넘었나? 서른다섯 정도 먹었나? 나보다 몇 살인가 많긴 했는데 잘 모르겠군.”
“그분과 친척이시라고 하셨죠?”
“음. 무슨 친척인지도 잘 모르겠어. 프란체와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라고 인사를 받았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내 친척이 소니아의 친척이란 걸 알게 된 것뿐이라서. 내 아버지 쪽 어딘가겠지.”
발렌틴은 아너슨 부부에 대해 말할 때면 인상을 잘 찌푸리고 무심하게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들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느꼈었기에 그런 점에도 웃음이 나왔다.
“소니아 씨는 아너슨 씨가 당신한테 죽고 못 산다던대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발렌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은 사람들이지.”
말과는 달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에, 아드리아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문제의 부부와 조우하게 된 것은 11시가 되어서였다.
“이야, 발렌틴! 하하하!”
프란체는 나타나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감격에 겨운 듯 발렌틴을 끌어안고 등을 마구 두드렸다.
“자네가 드디어 장가를 가는구먼. 이제 자네도 부부 동반 모임에 어울릴 수 있겠어.”
“어머, 어디 봐요, 부인은 어디 계세요? 이 댁 주인께서 미모의 부인을 들이셨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요?”
소니아는 두리번거리며 아드리아나를 찾아와서 와락 안아주었다.
“아유, 세상에.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니까 너무 좋다.”
“어서 오세요, 소니아. 여기서 뵈니까 기분이 이상하네요.”
“후후.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소니아와 프란체는 너스레를 떨며 인사하고서, 가져온 와인부터 부랴부랴 세팅하기 시작했다.
“아직 식사 준비가 다 안 됐네만.”
“뭐 어떤가. 먼저 한 잔씩들 하자고.”
프란체는 벌써 식탁 위에 늘어놓은 잔들을 채우고 있었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앞에 놓인 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염려해주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이 사람도 술을 못 해서….”
발렌틴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머, 부인 걱정해주는 것 좀 봐, 프란체!”
“그러게나 말이야. 발렌틴도 나만큼이나 애처가가 되겠는데?”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부끄럽나?”
발렌틴이 뭐라고 타박하든, 아너슨 부부는 아랑곳 않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떠들었다. 소니아는 원래부터 그런 편이었지만, 프란체가 친구 앞이라고 허물없는 모습인 것이 신기해서 아드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서 두 사람을 구경했다.
“저런 거 보면 안 돼, 오드리.”
발렌틴이 말하며 사과를 찍은 포크를 손에 쥐여 주었다. 아드리아나가 맞은편의 부부를 구경하느라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걸 가지고도 그들은 또 놀려댔다.
“어머, 눈꼴셔! 자기 부인만 챙겨주는 것 좀 봐. 우리한테는 먹어보라고도 안 해주고!”
“우리 부인은 연약해서 포크를 쥐게 할 수 없으니 내가 먹여줘야겠군. 아, 해요, 소니아.”
아드리아나는 주먹을 입 앞에 대고 웃음을 참으며 대신 기침을 했다. 지난번에 소니아에게 발렌틴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그동안 자기네 부부가 발렌틴에게 많은 것을 보게 하고 가르쳐놨기 때문에 그가 부인에게 잘할 거라고 말했었는데,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지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분이 저러시는 건 상상이 안 돼.’
요리가 나오고 테이블 위에 놓이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곁에 있는 발렌틴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와인을 홀짝이고 있다가 아드리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며 ‘당신도 저렇게 해주는 게 좋소?’ 하고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발렌틴은 몹시 안도하는 표정이 되어서 아드리아나가 좋아하는 것들을 접시 위에 덜어주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와 둘이 있기를 피하려는 듯 도망 다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손님들이 있어서이겠지만, 아드리아나를 바라볼 때면 어제처럼 다정했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도 꾸며낸 것 같지 않았다.
“부인이 계시니 집안이 훤하네.”
프란체의 말에 발렌틴은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소니아도 짓궂게 거들었다.
“남편과 같이 지내니까 좋아요, 웨버 부인? 뭐가 제일 좋아요? 신혼이니까 안 좋은 게 없겠지만.”
아드리아나는 살짝 눈치를 보고 있다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치만 아직 결혼을 한 건 아니라서요.”
그 말에 손님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혹시 방을 따로 써요?”
소니아가 먼저 소곤소곤 아드리아나에게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도 따로 자나?”
속삭임이라고 해도 다 들려서, 이번에는 프란체가 목소리를 낮추고 발렌틴에게 물었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발렌틴이 대답했다.
프란체는 그럴 줄 알았다느니, 자네도 그리 대단한 신사는 아니었다느니 단단히 오해를 하고 떠들었지만 소니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아드리아나의 표정을 보고는 말하지 않아도 진상을 다 알겠다는 듯, 착각에 빠진 남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자들끼리 체스라도 하라고 내보내 놓은 후, 여자들끼리 식당에 남았다. 소니아는 얼마 전에 낳은 둘째와, 학교에 있는 웬디와 헤이즐의 근황에 대해 들려주었다.
“다 컸다고 자기들끼리 공부하고 놀고 하느라 바쁜가 봐요. 주말에도 집에 잘 안 오려고 한다니까요. 웬디는 어쩜 거기서도 성적이 최상위권이라던데 정말 대단한 아이예요.”
“그 애는 환경이 마음에 들면 뭐든 더 열심히 해요. 학교에서 헤이즐이랑 같이 지내니까 너무 좋은가 봐요. 언제는 졸업하고 저랑 살겠다더니 이젠 헤이즐하고 같이 킹스턴 기숙사에 가겠다던걸요.”
“어머, 과연 우리 헤이즐이 킹스턴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모이면 자식들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들처럼, 두 사람도 딸과 의자매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에게 둘만 남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또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소니아는 곧 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두 분은… 아직인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럼 프란체랑 내가 오해를 한 거였군요. 두 분 결혼식이 다다음주라더니 벌써부터 같이 사신다기에, 식만 천천히 올리는 건가 했거든요.”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잠시 휴가 온 건데 일정이 그렇게 되었어요. 모레 혼인 증명을 받으러 같이 성에 갔다가, 금방 또 투스미아에도 가야 해서요.”
“아하! 결혼 전에 같이 봐야 하는 일이 많아서 그러신 거였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 때야 부모들이 다 대신 해주었으니까 신랑 신부는 결혼식 당일에 처음 얼굴을 보기도 했지만요.”
소니아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도 그녀의 그런 이해의 과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런 결혼을 하게 될 줄 알았으니까. 보통 혼처가 정해지면 양가에서 예식을 준비하고, 신랑 신부가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혼인 증명은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드리아나도 지금처럼 따로 먼저 신고한다는 방식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럼 이 경우에는 언제부터 부부가 되는 거라고 봐야 하는 걸까? 식을 올리고 하객을 초청한 적이 없으므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류상의 증빙을 미리 받았다고 ‘여보’ 하고 부르기라도 했다가는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럼 저희는 지금 부부인 건가요? 아니 모레부터요.”
아드리아나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미심쩍어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니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제게 물으시는 거예요?”
그녀는 배를 잡고 웃고 있다가 남자들이 나간 방향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남편분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니, 약혼자분.”
“모르겠어요. 우린 그런 이야기를 일일이 자세히 정하지는 않거든요. 순서가 좀 이상한데 언제부터 부부냐고 물어보고 확실히 선을 긋는다는 것도 좀 어색한 것 같고요.”
아드리아나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소니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긴 그래요. 뭐, 정식으로 부부라고 인정을 받으려면 증인 앞에서 예식과 서약을 마쳐야겠죠.성에서 작성하는 혼인 증명이라는 건 그에 대한 증명인 후속 절차에 불과하잖아요. 하지만… 지금처럼 현실적인 사정으로 같이 지내면서 혼사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경우라면 사실상 이미 가족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튼 전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소니아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해 숙식시키는 문화가 자연스러웠던 시골 영지에 살았다보니, 발렌틴의 집에 머무는 것의 의미를 어느 쪽으로 봐야할지 알쏭달쏭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잘 살라고 말하며 음흉한 눈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손 쳐도.
“왠지 좀 부끄럽네요.”
“아이, 뭘요. 두 분은 일을 해주실 가문과 떨어져 계시니 어쩔 수 없잖아요. 전 두 분이 뭔가 자주적이라는 느낌도 드는데요?”
소니아는 아무래도 호의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보다….”
그녀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우리 오드리 선생님께서 아직 웨버 씨의 부인 노릇을 해주시지 않은 이유가 그 시기에 관한 고민 때문이었다는 말씀이군요. 다른 이유는 없으시다는 거지요? 전 모쪼록 두 분이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랍니다. 힘내세요. 지금 프란체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과 지식을 전수해주고 있을 거예요.”
“뭐, 뭘 주의하는데요?”
아드리아나가 두려워하며 묻자, 소니아가 순식간에 근엄했던 표정을 바꾸며 팔꿈치로 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아잉. 그걸 제 입으로 어떻게 말해요? 아직 미혼자이길 고수하시는 듯하니 우리 그런 부끄러운 대화는 나중에 따로 나누어요.”
소니아가 부끄러운 대화라고 말했기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버리고 얼굴을 붉혔다.
그 짓궂고 소탈한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아침보다 더 어색해졌다.
사실 발렌틴은 더 어색해졌다기보다는 아침과 마찬가지로 피하고 있었을 뿐이고, 아드리아나는 그를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져서 그가 이리저리 도망치는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대체 발렌틴이 프란체에게 무슨 조언을 들었을지 별별 상상이 다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머릿속의 외설적인 단어들을 몰아내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며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에 담요 하나를 다 완성시키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오드리, 잠깐 차 한 잔 마실까?”
일하는 사람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고 헤어져 있다가, 8시가 넘어서 발렌틴이 부르러 왔을 때에는 그만 심장이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고 가슴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