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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56화 (56/140)

00056  입맞춤  =========================================================================

“겨울이라 아쉽군. 거긴 여름에 물놀이를 하기 좋은 곳인데.”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발렌틴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아드리아나는 가고 싶은 곳을 다시금 물어오는 그에게 테스카의 절경 중 하나인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정이 정해진 것이다. 고대하던 광장의 나무를 보러 가는 것은 늦은 저녁이 될 것이다. 소니아의 귀띔대로라면 올해는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니라 하루 앞당긴 오늘 저녁부터 나무에 불이 켜질 터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전 수영도 못하는걸요.”

“수영이라 봤자 다들 얕은 데서 물장구 치고 애들처럼 노는 정도지.”

발렌틴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자들이 실제로 그런지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발렌틴이 그렇게 노는 걸 좋아하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편의 수영복 차림이 어쩌고 하던 소니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웨버 경은 수영을 잘하시나요?”

“어릴 때는 그랬지만, 아이넨에 온 후로는 바다에 들어가 본 일이 없소.”

“어째서요?”

“옷이 젖으니까.”

발렌틴이 엉뚱한 대답을 하기에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수영복을 입으시면 되죠.”

“집 밖에서 옷을 벗고 다니는 취미는 없어서.”

“투스미아에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곳의 바다는 관광지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야. 대개는 사내놈들끼리이니 옷을 입든 발가벗든 상관없지만, 여긴 수영복 차림을 서로 감상하기 위해서 바다에 오는 남녀가 많으니 아주 다르오.”

발렌틴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에바와 가보았던 수영장을 떠올렸다. 확실히 아드리아나가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유흥이었다.

“…그건 저도 좀 그러네요. 겨울이라 잘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작게 중얼거리다가 발렌틴을 흘끔 쳐다보았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그에게 말했다가 괜한 소리를 한다고 꾸중을 듣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드리아나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 당신이 입으신 건 조금 궁금해요.”

“그런 속옷만도 못한 건 절대로 입지 않을 거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는 그의 대답에, 아드리아나는 즐거워하며 웃었다.

“어째서요? 제 앞에서도 부끄러우신가요?”

놀리며 웃자, 발렌틴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벌써 결혼한 여자가 된 것 같군.”

“제가요?”

“부인들은 자기 남편을 놀리는 재미로 살지 않소.”

“싫으세요?”

그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자신 역시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만면의 미소로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아드리아나가 조그맣게 물었다. 발렌틴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부드러운 눈길로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차가 해안가에 도착한 것은 30분쯤 후였다. 날이 아직 흐렸지만, 뜻밖에도 관광하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준비해 온 새 옷을 입고 그에게서 받은 약혼반지도 낀 채였다. 지나치게 이목을 끄는 다이아몬드의 크기 때문에 평소에는 끼지 않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가 준 반지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행여 발렌틴이 자기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손가락질 받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

반지를 끼고 있으니 자신이 그의 여자라는 자각이 강해져서 신기한 기분이었다. 하루빨리 발렌틴이 자신과의 결혼반지를 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무진은 해변의 모래가 자갈로 바뀌는 위치쯤에 멈춰 섰고, 아드리아나는 거기서 발렌틴과 함께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모습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비 온 후의 안개가 뿌옇게 일어나 수평선이 사라진 듯 보이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나는 멀찍이 바라보이는 해안을 바라보며 차 문 앞에 기대어 섰다.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호텔 이시스에 머물게 되어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이곳을 바라보았던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시스.

아드리아나는 테스카에 처음 와 머물렀던 그 호텔을 떠올리며 곁에 있는 발렌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문득, 그보다 한참 이후에 알게 되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발렌틴이 로레인의 친오빠라는 사실이었다.

그날 호텔 예약을 해준 것은 로레인이었는데, 그녀가 말했던 ‘아는 사람’이란 발렌틴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직원의 실수로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방에 들어왔던 전후사정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갔다.

‘남매….’

그런데 바로 그 점에 뭔지 모를 찜찜함이 남았다. 기억의 바다에서 수면으로부터 그다지 깊게 가라앉지도 않은 어떤 기억 하나가, 지금 현실의 바다 위에 펼쳐진 뿌연 안개처럼 드리워진 장막 아래에 가려진 느낌이었다.

두 사람이 남매라는 접점을 가졌음에, 갑자기 왜 이런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인지 곧바로 떠오르지가 않았다. 떠올려서는 안 될 두려운 사실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드리아나는 곁에 있는 발렌틴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조용히 아드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기분이 안 좋소?”

“아뇨.”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살며시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어쩐지 멍해져서, 밀려들었다가 부서져가는 파도 거품을 응시했다. 뽀얗게 일어난 거품이 푸른 물결 속에 녹아 사라지다가 그 위로 또 새로이 밀려든 파도에 묻히고, 또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아이넨의 토속신인 루나 여신의 신화에서는 바다가 루나의 모태이며 인간을 잉태한 자궁이라고 묘사되었다. 인간이 바다에 끌리는 이유도 그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이넨을 포함한 론도 세계의 태초 신화 역시도 비슷했다. 거기에서는 투스미아의 북쪽 바다 너머에 숨겨진 거인의 낙원이라는 게 등장하는데, 그들 거인의 요람 역시 바다를 통하고 있었다.

“…투스미아에 가보고 싶어요, 발렌틴.”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가 다정하게 눈을 맞춰주며 입을 열었다.

“며칠만 있으면 싫어도 그러기 위해 짐을 싸야 해요, 오드리.”

아드리아나는 밝게 웃고서 그의 팔에 다시 머리를 기댔다.

그곳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다를 건너며 한 번은 그 안에 침몰했다가 다시 떠올라 새로운 생명으로 무결하게 태어날 수 있다면. 오직 곁에 있는 이 한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온 것처럼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꿈속에서는 늘 새로 태어났다. 그 전의 꿈과 현실에 대해서는 잊은 채, 새로 태어난 아드리아나가 새로 태어난 한 영혼을 만났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곁에 있는 이 남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 발렌틴을 올려다보았다.

“바쉬라고 하셨던가요?”

결혼식 장소라고 들었던 지명을 확인하자, 발렌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이 있어?”

그야 세계 지리라면 속세의 찌든 면면들과 어느 정도 동떨어진 거리를 갖고 있는 덕택에 리노아스에 있을 때부터도 삼가지 않고 학습했었고, 바쉬는 아드리아나에게 남다른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이시스가 있잖아요. 그렇죠?”

“바쉬 산 말인가?”

발렌틴의 되물음에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어요. 전 어릴 때 매일 그 산을 보면서 자랐거든요.”

“거길 봤다고?”

“제 방에 이시스가 보이는 방향으로 창문이 나 있었어요. 산꼭대기가 보였죠. 눈이 쌓이면 정말 예뻤어요.”

“흠…. 리노아스가 바쉬에서 가까운 편이던가. 그럴 수도 있겠지.”

발렌틴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서 심각한 생각에 잠기는 듯한 기색이 있기에, 아드리아나는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내 그가 표정을 풀고 말했다.

“바쉬 산은 멀리서 보면 멋있다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험하기 이를 데 없이 커다랗기만 한 산이야.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면 데려갈 줄게.”

아드리아나는 약혼자의 말에 얼굴이 환해졌다. ‘데려가 준다’는 그의 말이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우울해졌던 기분은 금세 털어버리고,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팔에 기대어 바다를 구경했다.

두 사람은 저녁 시간을 조금 앞두었을 때에 다시 차에 올랐다. 저녁 식사는 근처에 있는 후작의 성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했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광장으로 가면 해가 저물어 있어서 인공조명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에 딱 좋을 터였다.

교회 광장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오렌지색 노을이 펼쳐졌다. 아드리아나는 먹먹함에 잠겨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옆자리의 발렌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감상적인 생각에 빠졌다. 하루해가 저물고 사라지는 것처럼, 이 사람과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서글픔이 느껴졌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고개를 돌리고 그를 찾아보면 눈에 보이는 곳에 그가 있기를, 그와의 약속이 지난 연인과의 것처럼 변해버리는 일 없이 끝까지 지켜지기를, 지금만큼의 평화가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하게 유지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곧 결혼식을 올리며 이런 약속을 나누게 될 거야. 좋을 때나 그렇지 못할 때나, 평생 노력하고 지키겠다고 이 사람에게 약속해줄 거야.’

혼자 속으로 거창한 다짐을 하고 있는 아드리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렌틴이 그윽한 시선으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한 가지 말 안한 것 같은데….”

그의 표정이 조금 더 숙고하는 빛을 띠었다.

“나는 상당히 많이 보수적인 편이야. 아이넨의 남자들과 비교하면 답답할지도 몰라. 앞으로 당신이 여행을 하고 싶다면 나랑 해야 할 거고, 나 역시 타당한 사유가 없는 한은 멀리 떠날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을 데리고 갈 거야.”

아드리아나는 그가 또 입에 담은 ‘데리고 간다’는 말이 기분 좋아서,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더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게 말해요. 일 때문에 다 이루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재촉하는 것 정도는 좋으니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그럴게요.”

그가 요구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어릴 때부터 여자란 저택 안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남편의 일만 도우며 한평생을 바치는 것이 유일하게 지향해야 할 삶이라고 배우고 자랐는데.

발렌틴이 그 정도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를 고지식하다고 답답해하는 여자도 있겠지만, 아드리아나의 기준에서는 아주 관대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고, 어쩌면 그토록 원해왔던 ‘조용히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얌전한 성향 때문에 만나고 맺어지기조차 어려운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혹시 수영을 해보고 싶어지더라도 남들 앞에서 수영복은 입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내가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아.”

혼자 자조하는 말처럼 들린 마지막 말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어떤 의미로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지는 잘 몰라도.

“당신이 걱정하시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아너슨 씨 가족과 수영장에 소풍이라도 가는 일 정도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냥 옷을 입고 있을래요. 저도 남들에게 맨살을 많이 보이는 게 내키지 않거든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발렌틴이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옷을 입었더라도 물에 들어가면 젖으니까. 그런 곳에서 당신에게 눈길을 주는 놈들은 가만 안 둘 거야.”

“유부녀에게 눈길을 주는 나쁜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어떻게 하실 건데요?”

“사는 곳을 알아내야지.”

발렌틴이 눈을 내리깔고 한쪽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장난스러운 말도 한다고 놀리며 마냥 웃어댔지만, 그때 펜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백미러를 올려다보고 심란한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펜이 주인과 약혼녀를 교회 광장에다 내려준 후, 교회에서 제공하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아드리아나는 떠나는 리무진을 쳐다보며 새삼 미안해져서 말했다.

“제가 너무 큰소리로 웃고 떠들어서 펜 씨가 운전하시는데 힘드셨을 것 같아요.”

“로레인 떠드는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 당신 같이 목소리 작은 사람한테는 안 놀랄걸.”

발렌틴이 말하더니, 팔을 들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광장 중앙을 가리켰다.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군.”

그는 나무가 잘 보이는 쪽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아드리아나를 앉혔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앉을 자리가 충분하지 않았다.

“추운 데서 떨며 기다리면서까지 볼 장관은 아닌데, 괜찮겠소?”

발렌틴이 머플러를 목 위로 높이 끌어올리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차 안에서 벗고 있던 장갑을 다시 끼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장식 나무보다 훌륭한 볼거리가 있는 장소들을 돌아볼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이 정도도 환상 같은 일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영지가 반 이상인 아이넨 땅 한곳에 광장을 환히 밝힐 만한 조명을 두른 아름다운 나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사실 테스카에서 바라던 것들은 거의 다 이루었다. 아직 남은 무언가가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사람이 많아지는군.”

서서히 광장으로 모여드는 인파를 보며 발렌틴이 말했다.

불이 켜지는 시간에는 호기심으로 몰려드는 이가 많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는 몇 시간 전부터 꼬마들이 나무에 불 켜지는 모습을 보겠다고 자전거를 타고서 광장을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아이들, 가족들, 드물게는 연인들도 그 속에 있었다. 광장 마을은 은행가와 달리 부부가 아닌 연인들이 공개적으로 함께 다니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우리도 연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직은 정식 가족이 아니니까.’

연인이라는 말이 어색하고 수줍기 짝이 없었다. 발렌틴과의 만남은 어디까지나 결혼을 전제로 갓 시작된 만남이었고, 아드리아나는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펜에게 뭔가 질문을 했다가 그의 주인이 ‘연애’라는 말 자체를 질색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는 증언을 들은 바가 있었다.

연인까지도 과하다. 발렌틴이 식구들과 이웃들에게 아드리아나를 약혼녀라고 당당히 소개해주는 것을 듣고 있는 이상에야.

문득 광장을 비추고 있던 가로등이 꺼졌다.

그 순간 사람들의 대화도 끊기고 정적이 감돌았다. 얼마지 않아 웅성거리고 꺅꺅 소리죽여 환호하는 소리가 일기 시작했지만, 어둠은 그대로였다.

“불을 켜려나 봐요.”

살짝 흥분하며 손바닥에 땀이 나려 해서 장갑을 벗었다. 근처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대에 찬 아드리아나를 보며, 발렌틴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벤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꼬마와 가족들이 어둠을 헤치고 우르르 나무 앞으로 몰려갔다. 아드리아나는 그들을 따라가 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고 포기했다.

아드리아나는 곁에 서 있는 약혼자를 올려다보고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곧 발렌틴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아드리아나는 나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의식중에 두 손으로 약혼자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두꺼운 점퍼 차림의 남자들이 광장 한복판으로 다가가더니 나무 장식 옆의 장치 상자를 열었다. 그들이 뭔가를 조작하자, 수십 개의 작은 전구들이 일제히 밝혀졌다가 점멸했다.

“꺅!”

어디선가 아이가 짧게 소리 지르고 꺄르르 웃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아드리아나도 헤헤 웃으며 방금 불이 켜진 걸 보았느냐고 약혼자를 쳐다보았다. 대답도 하지 않고 즐거운 듯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구경하는 발렌틴에게 눈을 곱게 흘겼다가, 슬그머니 그의 팔을 붙들었다.

한 차례 더 불빛이 점멸했다가, 그 몇 배는 되어 보이는 전구들이 색깔별로 깜빡 깜빡 밝혀졌다. 금은 종과 반짝이는 구슬, 별, 갖가지 장식으로 한껏 치장된 나무 하나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수수했던 광장의 어둠 속에서 그들의 축일을 기념하는 상징이 빛으로 환해졌다.

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불빛이 닿아 드러나는 사람들의 감회에 젖은 표정을 볼 때마다, 아드리아나의 머릿속에서는 지난 일들이 무수히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4년간의 일들이 꿈처럼 떠오르고 사라졌다. 겹겹이 쌓이고 사라지는 파도 거품처럼.

기쁨도 괴로움도 있었다. 괴로움만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소중한 사람을 만나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함께 이곳에 와 있었다.

'이만하면 훌륭해. 난 행복한 사람이야.'

아드리아나는 높다랗게 솟은 장식 나무를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희미한 불빛이 비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맘때면 테스카 교회에서 여기저기에 걸어놓는 문구 중 하나였다.

그저 진부한 교훈의 말일 수도 있고, 이 도시 곳곳에 만연한 일탈자들에게 간청하는 말일지도 모를 문구였다. 한 때는 혼자인 채로 고독했던 아드리아나 역시 쓴 마음을 삼키며 멀리서 들여다보았던 말.

-모든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 있기를.

한참 동안 눈을 깜박이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서 곁을 바라보았다.

발렌틴이 내리뜬 시선으로, 조금 전 아드리아나가 보고 있던 바닥의 그 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팔에 매달려 있던 아드리아나의 차가워진 손끝이 그의 따뜻한 손에 감싸였다. 얼었던 손가락이 녹았을 즈음에는 그가 조용히 손가락을 겹치며 손을 맞잡았다.

아드리아나는 앞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혼자의 손은 크고 따뜻하며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지만, 생각보다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쾌활하게 나누는 인사말이 들려왔다. 뜻도 모르는 그 인사를 입에 담기는 겸연쩍었지만, 그냥 이 순간에는 다른 가족들처럼 기쁜 듯 들리는 인사를 주고 받는데에 동참해보고 싶어졌다.

부끄러워하며 인사말을 입에 담으려던 때에, 갑자기 발렌틴이 상체를 아드리아나 쪽으로 기울이며 가까워졌다.

순간 눈앞에 빛이 넘쳐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뜨거워져 있던 눈시울만큼 가슴도 뜨거워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드리.”

이윽고 그가 눈앞에서 속삭였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이 하려던 인사를 가로챈 것에 대해서는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의 입술에 닿았던 입술의 녹아내릴 듯 달콤한 감촉과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그의 목소리의 여운에 잠겨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발렌틴은 넋이 나가서 앉아 있는 아드리아나의 몸을 슬쩍 그에게로 기대놓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약혼녀의 몸에 온기를 나누어 주며,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 작품 후기 ============================

휴일 둘째날 편 끝! 메리 발렌타인이 다가오는데..휴. 애초에 연재할 적에는 이번 편을 작년 크리스마스 때 맞춰서 올릴 수 있을 거라고 두근두근 기대했었답니다 흐엉ㅠㅠ(크리스마스의 뜻도 잘 모르고 휴일 좋아하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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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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