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예감 =========================================================================
발렌틴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아드리아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인사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아닌, 마치 입술에 하는 것처럼 지그시 눌렸다가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맞춤이었다.
“이제 진짜로 잘게.”
그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눕히고서 옅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은 채로 뒤척이다가 잠들기 편한 자세를 찾더니 이윽고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발렌틴과는 반대로 이제야 온 몸으로 상대를 생생하게 느끼며 점점 더 정욕에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더 세게 끌어안겨 밀착되었으면, 그가 좀 더 어루만져주었으면, 머리카락이나 뺨이 아닌 입술에도 키스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코끝에 닿는 약혼자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체취 때문에 가슴 속이 타들어갈 듯 뜨거워졌다. 침대에 들기 전에 들었던 그의 욕망어린 말, 슬쩍 훔쳐보았던 그의 벗은 등이 떠올라 숨이 가빠졌다. 그를 위해 옷을 벗는다거나, 관계를 갖는다거나 하는 말을 들었던 순간의 수치심을 상기하는 일조차 흥분을 부추겼다.
내가 옷을 벗는 일이 그를 위한 일이 된단 말인가, 내가 그의 벗은 몸을 보고 매혹된 것처럼 그 역시 내 몸을 보고 기뻐해 줄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자신과 관계하길 바랐으며 어떤 식으로 아기를 갖게 하려던 것이었는지, 그 부끄러운 말들이 온통 궁금해져서 타는 듯한 갈증이 솟았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지만, 망측한 상상이 계속 되었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평온한 숨소리에도 귀 옆의 목덜미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떠올라 발끝까지 짜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의 숨소리를 자장가로 삼아 잠들려 애쓰며,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
작게 들리던 숨소리가 점점 헐떡이는 듯 들렸다.
누군가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쫓아오는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렸다.
-아드리아나.
그 이름으로 불린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그 이름을 아는 이는 자신의 주변에 없어야 했다. 새 이름과 새 삶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서, 아드리아나는 늪처럼 붙잡고 놔주지 않는 지면을 밀어내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가씨, 아드리아나 아가씨.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어느새 옛 하녀의 것으로 변했다.
아드리아나는 그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리웠던 하녀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장 언덕을 뛰어 내려가 그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한참을 엉엉 울다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보호소로 돌아온 순간부터 장면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아드리아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자각도 잊고, 온전하게 카리나와 재회한 순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이넨 땅을 온통 다 뒤졌어요. 전 처음에 이곳에서 오드리라는 이름을 들은 적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아가씨를 잃어버리고 두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을 거예요. 코니스에서 손님으로 온 그런 아가씨가 있다기에 생각도 못했어요. 전 어쩜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죠? 아가씨는 어쩜 그렇게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신 거예요? 반지를 파시지 않으셨더라면 전 우리 아가씨를 대체 언제 다시 뵙게 되었을까요....”
카리나는 책망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눈가는 그렁그렁했고 얼굴은 기특해죽겠다는 듯한 눈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난 다시 스콰이어 가에 잡혀가게 될까 봐 필사적이었단 말이야. 나 변장도 했었어. 머리도 염색하고 짧게 자르고, 길을 걸을 때는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다녔어.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수상했을지....”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지나온 시간이니 이렇게 기가 막히다고 웃으며 떠들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머니가 건강히 지내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기에 더욱 가벼워진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보석상에게서 반지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갔죠. 거래증서에 아가씨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고요. 세상에 라티스라니. 오드리 라티스라고 마님의 처녀적 성씨가 적힌 걸 보자마자 전 울어버렸어요. 그 오드리라는 아가씨가 우리 아가씨였구나, 아가씨가 외가의 성을 쓰고 가짜 이름으로.... 벌써 4년이 되어가는 시간을 아가씨 혼자서....”
카리나가 다시 울먹이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쓱쓱 훔쳤다. 그러고는 품 안에 소중히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서 펼쳤다.
아드리아나는 손수건 안의 물건들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테스카의 보석상에게 판 다이아몬드 반지와, 그와 같은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귀걸이 한 쌍이 거기 있었다. 고향을 떠나기 직전에 잃어버렸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마티아스 경과 결혼식을 올리시기 전에, 제가 아가씨를 데리고 코니스로 도망치려고 했어요. 다른 보석들보다는 작으니까 눈에도 덜 띄고 한 짝씩 쪼개서 팔기에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빼돌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가씨는 산속에서 그렇게 없어져버리시고....”
카리나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이 귀걸이를 가지고 온 보석상을 찾아다녔어요. 세트인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팔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비싼 값을 쳐줄 테니 꼭 연락을 달라고 다짐을 받고 다녔어요. 엊그제 테스카의 보석상에서 연락이 왔을 때에는 꿈인 줄로만 알았어요. 마님도 저도 정말로 연락을 받게 될 줄은....”
“카리나.... 네가 정말 많은 고생을 했구나. 그런데 대체 돈이 어디에 있어서 반지를 다시 산 거니?”
“저희 걱정은 마세요, 아가씨. 마님의 본가에서도 몰래 도움을 받았어요. 마님께서는 스콰이어가 우리보다 먼저 아가씨를 찾을까 봐 걱정이 말이 아니셨어요. 그들과 남작님도 분실된 보석의 보증서를 가지고 수배를 했으니까요. 스콰이어에서는 아가씨의 초상화도 붙이고 다녔을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슈하스에 붙어 있던 전단을 떠올리며 마른 침을 삼켰다.
“마티아스 경은 그 뒤에 곧 결혼을 했다고 들었어. 이제 그분들 문제는 괜찮은 거겠지?”
“모르겠어요, 아가씨.”
카리나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가씨를 잃어버렸을 당시에 남작님과 약속을 하셨어요. 책임이 스콰이어 가에 있으니 아가씨를 찾아서 꼭 처로 맞이하겠다고요. 새로운 부인을 들일 적에도 그런 사정에 대해 양해를 구하겠다고 말이에요. 정말 낯짝도 두꺼운 사람들이 아닌가요?”
“하, 하지만 난 약혼을 했어.”
“약혼을 하셨다고요?”
카리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깨를 높게 들썩였다.
아드리아나는 수줍어하며 자신의 약혼 소식을 알렸다. 약혼자가 번듯한 사업가에 성실하고 평판 좋은 남자이며 올해 안에 정식으로 그와 혼인할 예정이라고 알려주자, 카리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아가씨가 상인과 결혼을 하시다니.’하고 몇 번이나 서럽게 중얼거렸지만, 마티아스보다 훨씬 나은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냐고 달래는 아드리아나에게 겨우 수긍하며 표정을 풀었다.
아드리아나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신다는 말에 기뻐져서 카리나의 손을 맞잡고 그간에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가씨, 그런 말 아세요? 두 문제를 찍어서 한 문제 맞추면 점술가로 먹고 산다는 얘기 말이에요. 정말이라니까요. 아가씨가 음란한 피를 가졌다느니 열여덟에 사생아를 낳을 거라느니 했던 엉터리 점술가가 이번엔 아가씨가 살아 있다고 한 거예요.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우리가 그걸 의지하고 살아왔으니 이번엔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그 예언 때문에 처음엔 무섭고 속상했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더 신경 쓰고 조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지도 몰라. 지나온 곳이 전부 안전하지만은 않았거든.”
“우리 아가씨는 그런 분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딴 예언이 아니었으면 남작님께서 그렇게 쫓아내듯이 시집을 보내셨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게든 그런 가문이라면 날 보내셨을 거야. 항상 공작 가의 여자가 될 거라고 입에 달고 사셨는걸.”
“아아, 아무튼 아가씨가 이리 건강하신데다 곧 결혼을 하신다니....”
카리나가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결혼’을 말할 때에는 순수한 감탄 외의 난처함도 엿보였지만, 그녀의 기준으로 보아 비천한 환경에서 살게 된 주인 아가씨가 알아서 남편감을 골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말 좋은 분이셔.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걸. 카리나나 어머니도 보시면 깜짝 놀랄 거야.”
아드리아나는 약혼자의 사는 곳이나 그가 가진 회사, 그가 지역에 베풀고 있는 일 등을 거론하며 카리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카리나가 아는 대로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 테니 더더욱 신경 써서 그녀의 의심을 지워주려 애써야 했다.
“그리고 리노아스의 사정이 괜찮다면 어머니를 뵈러 가고 싶었는데... 결혼하기 전이라면 좀 위험할까? 혹시... 내 이야기가 나쁘게 소문나거나 하진 않았어?”
“제 생각에는요, 아가씨....”
카리나가 말끝을 흐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는 당분간 이대로 지내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니, 여길 떠나셔서 지내시는 게 나을 거예요. 스콰이어 가에서는 이제 일부러 추적하지는 않고 있지만, 아가씨가 살아 계시다고 알려지면 나서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요.”
“난 금방 결혼할 거야. 그럼 아마 테스카에서 살게 될 거야.”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진짜 이름 같은 건 꺼내시지 마세요. 마티아스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임자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 파렴치한인 걸요.”
“며, 며칠 있다가 발렌틴이 날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아드리아나는 초조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오히려 당장은 괜찮을 거라고 아드리아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보석을 판 이의 이름이 ‘아드리아나’가 아니었기에 스콰이어에서 간섭하기를 미룰 가능성이 높고, 아드리아나의 외모가 지난 4년 동안 상당히 변해 있어서 가족이 아닌 이상에야 길에서 알아보는 건 무리라는 말이었다. 다만, 옛 이름이나 고향을 찾는 것은 아직 생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만약 우리가 여기 머무는 동안에 수상한 사람이 찾아와서 ‘오드리 라티스’를 찾는다면 저를 지목하도록 일러두세요. 보석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핑계를 댈 테니까요.”
카리나는 아드리아나의 환경과 신랑감을 보고 가겠다며 보호소에 함께 머물렀다. 그녀는 솜씨 있는 하녀답게 일을 대단히 잘해서 그곳에 오래 머문 아드리아나보다도 훨씬 도움이 되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라티스’를 찾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헤밀에는 여느 때와 같은 평화가 지속되었고 아드리아나는 평소처럼 생활하며 발렌틴을 기다렸다.
밤마다 그의 꿈을 꾸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데도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문득 주변이 어두워지고 적막에 잠겼다. 아드리아나는 지금 자신이 자는 중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투스미아에 간 발렌틴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데, 날짜가 어느 정도나 되었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다시 어둠 속을 걸었다. 헤밀의 언덕인 듯도 했고, 모르는 숲 같기도 했다.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길이 질척질척해서 걷기가 힘들었다.
이내 인기척이 느껴져 앞을 올려다보니 멀리서 마차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길을 비키려고 한쪽으로 물러섰으나, 마차는 지나가지 않고 아드리아나 앞에서 멈추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 스콰이어 가의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길을 돌아서 뛰어 내려갔다.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했다. 진창에 빠져 붙들린 신발을 벗어 던지고 계속해서 도망쳤다.
콰르릉, 마차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쫓아왔다.
아드리아나는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어딘가로 뚝 떨어져서 넘어졌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이제 다 끝났다고 겁을 먹고 떨고 있을 때에, 누군가 아드리아나의 몸을 안아들었다.
-아아, 발렌틴.
아드리아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꼭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뺨을 문질렀다. 둘 다 비에 젖어 있었지만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차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아드리아나 양, 마티아스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보내지 마세요.
스콰이어의 사람들이 재촉했지만, 발렌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 싫어요. 가지 않겠어요. 저는 이분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했어요.
이윽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렸다.
-넌 공작 가에 가야한다. 넌 마티아스 경의 네 번째 아내가 되어야 해. 버클리와 한 짓을 그 남자가 알아도 좋으냐?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옷자락을 꽉 쥐고서 두려움으로 숨을 헐떡였다.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를 보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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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코멘 센스는b
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자님들도 즐거운 설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