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51화 (51/140)

00051  커지는 마음  =========================================================================

한번 무섭다고 의식하고 보니,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며 습기를 가득 머금은 시린 공기로 찬 저녁이 그보다 더 스산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졌다. 전에는 사람보다는 사람 아닌 존재를 무서워해야 했던 시골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저도 모르게 비탈길을 오르는 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겁을 먹고 나자 갖가지 상상 속에서 공포심은 점점 배가되어 숨통을 조여 오는데 보호소는 아직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드리.....”

문득 멀리서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흐느낌이 섞여 있는 것을 느끼고, 아드리아나는 다리가 얼어붙었다. 듣고 싶지 않은 걸 들었음에도 귀는 놀란 그대로 쫑긋 곤두섰다. 그 때문인지 흐느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흙 밟는 소리와 천 자락 스치는 소리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공포심에 손가락 끝까지 마비되어서 곧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저예요, 아가씨.”

울먹이며 ‘아가씨’ 하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낯익어, 아드리아나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자가 망토의 모자를 벗었다. 그녀는 벌써 눈물범벅인 얼굴을 들고 길 위쪽에 있는 아드리아나를 올려다보며, 더욱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카리나....”

아드리아나는 몸을 돌려서, 기껏 도망쳐 올라온 그 길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

“슬슬 식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 둔 날이나 주문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게. 최대한 그대의 요청을 수렴해서 일을 진행하라 이르겠네.”

공작이 큰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듯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그다지 거들먹거리지는 않았다. 잘난 척 하며 어필하지 않아도 그가 잘난 지위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착각할 만한 이는 없으므로. 곧잘 불손한 언행을 서슴지 않는 발렌틴 또한 배알이 뒤틀릴 때는 있을망정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구하오나, 공작 저하. 성에서 식을 올리라는 말씀이십니까?”

발렌틴은 자신이 알린 적도 없는 결혼 소식에 대해 공작이 상세히 알고 있다는 점이라든지, 자신의 결혼 준비를 공작이 마음대로 나서서 하는 점에 대한 불만은 접어두고 물었다.

“내 성만큼 훌륭한 장소를 따로 알고 있나?”

“아내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덤덤하게 말하자, 공작이 흥, 하고 큰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다.

“건방진 소리. 시집올 여자 하나가 사내들이 하는 결정에 이러쿵저러쿵 거스른단 말인가? 그대는 왜 신부를 데려오지 않았나. 남들 보이기에 문제가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 혼자 다니면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발렌틴은 공작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으려 침착하게 대답했다. 공작은 한층 수위를 높였다.

“어디 출신이라고도 못 밝히는 여자라니 알만 한 일일세. 난 그대가 행여 밖에서 놀다가 자식이라도 배게 한 것은 아니길 바랄 뿐이네. 매음굴의 여자라면 마음대로 결혼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자릴 지키기는 어려울 거야. 쓸데없이 그대의 이력에 빨간 줄만 그어지는 게지.”

“그런 여자는 만난 적도 없습니다만, 공작님께서는 제게 아무나 좋으니 하루빨리 결혼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발렌틴이 시종 느긋하게 대답함에, 공작은 이내 싸움 걸기를 그만두었다. 흥미를 잃은 공작이 흠, 하고 낮게 목을 울리더니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날짜는 가장 빠른 길일을 잡으라고 이르겠네. 만약 신부가 하자 있는 여자라면 결혼해도 언제든 내쫓을 수 있다는 걸 아시게.”

공작이고 황제고, 자기들이 내 신부를 무슨 기준으로 보고 내쫓고 말고를 결정한다는 말인가, 발렌틴은 전혀 수긍할 수 없는 공작의 엄포에 대강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성을 나왔다.

로아타르로 돌아가자, 발렌틴의 부모와 남동생 내외가 반가워하며 맞이했다. 그들은 예상하던 것과 달리 발렌틴이 평온한 얼굴로 집안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저마다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튼 발렌틴과 공작의 사이가 틀어져서 공작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일가 모두가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발렌틴은 결혼 축하 인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식사하다가 양해를 구하는 말을 꺼냈다.

“약혼녀를 데려오지 않아 죄송합니다. 하자 있는 여자인지 아닌지 조사하겠다고 귀찮게 하실 것 같아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래, 네 일이라면 워낙 걱정하시고 야단스러운 분이니 아가씨를 놀라게 할까 걱정할 수도 있겠지. 이해하마.”

브란덴이 아들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며 너그럽게 말했다.

발렌틴은 공작이 그의 성씨을 물려받은 루미아들에게나 관심을 갖고 쫓아다니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어중간한 입장인 자신의 불편함을 토로해보았자 부모를 서운하게 할 뿐이라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내 아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간에 내 소유인 사람이니 회사나 돈과는 다릅니다. 아내에게까지 간섭하시면 다시는 바쉬 땅에 발도 들이지 않을 겁니다.”

과거 공작이 실제로 그들 자식의 혼사를 찢어놓은 일을 의식하며 못을 박아두려는 듯 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달래고 나섰다.

“아무렴, 공작님께서 정말 나쁜 생각으로 말씀 하셨을까. 그분도 예전 같이 앞뒤 없이 끓어오르실 연세도 아니시란다. 여차하면 우리도 힘을 보태줄 테니 염려 말거라.”

발렌틴도 공작이 정말로 아드리아나와의 사이를 찢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드리아나가 뜻밖의 근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 또한 무슨 이유로든 그녀를 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에라도 아내에게 괜한 얘길 해서 쓸데없는 근심을 만드시는 건 아닌지도 걱정이 됩니다. 마음이 약한 여자라 영감님 앞에서는 말이나 한마디 할 수 있을지....”

“형님은 대체 어떤 여성을 만나신 겁니까?”

갑자기 스테판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물론 제게는 세상에서 형님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이름도 가문도 나중에 가르쳐 주신다고만 하시고 얼굴조차 보여주시지 않으시니, 솔직히 어떤 위험한 여자한테 홀리신 건 아닌지 하는 걱정도 들어요.”

발렌틴은 막내 동생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면서도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별로 숨기려는 건 아니야. 단지 여기에 첩자가 있으니, 내가 괜한 정보를 발설했다가 다음 날 공작께서 사람을 보내서 내 약혼녀를 닦달하고 괴롭히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거지.”

가족들은 발렌틴의 말을 굳이 부정하려 하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눈치 보며 웃었다.

“아무튼 어서 만나보고 싶구나. 우리 아들이 그렇게 쫓아다닌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그냥 좋은 여자입니다, 아버지.”

발렌틴이 말하자, 어머니가 동그란 눈을 흘기고 쳐다보았다.

“쟤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더니 아는 척하는 것 좀 보세요, 여보.”

“보시면 어머니도 금방 아실 겁니다.”

“어쩜 누굴 닮아서 저렇게 팔불출인지.”

그러나 브란덴은 기쁜 듯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하면 네가 제일 먼저 손주를 낳아줄 수도 있겠구나. 속이란 속은 다 썩이고 장가는 꼴등으로 가지만 말이다.”

발렌틴은 아버지의 말에도 그저 미소 지어보였다. 순서 따위야 상관없었지만, 이미 자신은 첫 아이를 낳기에 나이도 너무 많았으니 아버지의 기대대로 해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 아직은 없니?”

어머니가 물어왔다.

“뭘 그런 걸 물어요, 당신은. 몇 번 만나지도 못 했다잖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한 번만 만났어도 생기려면 생기는 거지요.”

“딱 보면 아니구먼. 애 아픈 델 찌르는 거야, 지금.”

“안 아픕니다.”

발렌틴이 조용히 끼어들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대답이나 기분 따위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청혼까지 하고 집에서 잠도 재웠다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거다. 얘, 발렌틴, 혹시 그 애가 네게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못 느끼는 것 같지는 않든? 이건 여자를 너무 오래 쉰 부작용일지도 몰라.”

“당신은 착하게 잘 지낸 아들한테 무슨 소릴 하시는 게요?”

“약혼까지 한 사이에 쟤가 색시한테 자자고 말이나 한번 해봤겠어요? 집안에 저런 인물이 없는데 혼자 무뚝뚝해가지고,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계속해서 공격해대는 통에 발렌틴도 계속 웃고만 있을 수가 없어져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두 분 아들인데 왜 자꾸 누굴 닮았냐고들 그러십니까? 저야 두 분 사정을 모르죠.”

“제가 보기엔 형님은 바쉬 공작님을 닮으신 것 같아요.”

스테판이 해맑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걸로 투스미아인들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방법의 일환이던 시비 나누기가 정리되었다.

그때까지 정색하고 맏아들을 놀려대던 웨버 부인이 조용히 막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말은 하지 마라, 스테판. 그러다 네 형이 이제 집에도 안 온다고 해.”

“결혼식은 그냥 아이넨에서 올릴까 봐요.”

발렌틴이 술잔을 다시 채우며 중얼거렸다.

아닌게아니라 그 말을 한 순간 갑자기 아이넨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순전히 아내 될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진 탓이었다. 얼굴을 보면 안고 싶어질 테고, 안으면 입을 맞추고 싶어질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곁에 두고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연신 들이켠 탓에 조금 감정적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침울하게 앉아 있다가, 발렌틴이 입을 열었다.

“...아내될 사람이 코니스계인데.”

나직이 말하자, 빛나는 8개의 눈동자들이 발렌틴을 향했다. 발렌틴은 그들 중 누구라고 짚지 않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뭔가 공부를 해두는 게 좋을까.”

이제 곧 바쉬 공작의 귀에도 발렌틴의 약혼녀가 코니스계라더라 하는 소식이 들어갈 터이지만, 당장 그 정도는 상관 없었다. 발렌틴의 가족들은 장남의 신붓감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에 크나큰 기쁨으로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코니스와의 오랜 동맹이자 그곳의 여성들에 관한 작은 환상마저 가진 투스미아인들로서 특별히 더욱 환영할 만한 그 정보에 놀라워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발렌틴은 가족들이 마음대로 떠들도록 내버려두고, 조금 편안해진 기분으로 의자에다 팔을 걸치고 기대어 앉았다.

“그래, 코니스계라고? 공부도 해야하고 말고. 그것 참 훌륭한 생각이구나.”

“아주버님은 어서 침실 매너부터 습득하시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그쪽 아가씨라면 대단히 섬세하게 다뤄줘야 할 거예요.”

나이 열다섯만 넘으면 자리나 위 아래를 막론하고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화통하게 나누는 민족이다 보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의기투합해서 곧 장가갈 시숙의 부부생활에 참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문화로부터 꽤 오래 떨어져 지낸 발렌틴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스테판의 아내는 이내 자기 남편의 사이즈와 모양새를 거론하며 남편에게 듣기로 시숙의 것은 어떻다더라, 그도 우리 민족의 사내라는 그 증거 때문에 각별히 아내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자기 생각에는 이런 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과정의 묘사를 시작했다.

“아가, 쟤가 들어봤자 그걸 첫날밤에 기억이나 하겠니? 무조건 신부한테 맞춰주는 수밖에. 알겠니? 아들아, 너 좋을 대로만 하지 말고 신부가 좋아하는 취향을 꼭 물어보면서 하렴.”

“예....”

발렌틴의 대답에서 혼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님도 참. 거기 여자들은 수줍어서 밤일에 적극적이지가 않대요.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은지 말도 못할 걸요? 자기가 자기 취향에 대해 알기나 하면 다행이죠. 남자가 다 알아서 해줘야 해요.”

“그건 참 큰일이구나. 쟤가 어떻게 알아서 하겠니? 성질은 누굴 닮아서 불 같아가지고 과연 천천히나 살살이라는 말은 알는지....”

웨버 부인의 말에 다들 같은 상상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발렌틴은 이 화제를 괜히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아니 아내 될 여자가 보고 싶어서 그녀를 생각하다가 그녀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 하나를 알려주었을 뿐인데, 왜 이 지경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이런 자리에는 아직 안 데려오길 잘 한 것 같다고,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며 그것을 위안 삼아야 했다.

***

카리나가 헤밀에 온 지 이틀이 지난 목요일. 아드리아나는 여느 때와 같이 과자점의 일을 하러 나와 있었다. 어제는 소니아에게 부탁하여 보석상에서 잔금을 넣어준 것도 확인했다.

‘카리나를 만나게 될지 알았더라면 어머니께 그런 이상한 편지는 보내질 말았을 걸.’

어머니를 괜히 놀라게 해드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해서 가슴이 메었다. 하지만 새로운 편지를 통해 카리나와 어머니가 미리 정해둔 약속대로 비밀스럽게 전해질 소식은, 앞선 이상한 서신으로 인한 불쾌감 따위는 상쇄하고도 남게 되리라.

카리나는 잠시 이곳에 남아, 직접 눈으로 아드리아나의 사는 모습과 남편감을 보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본대로 생생히 옛 마님에게 전하겠노라는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예전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에는 누추하고 남루하다고 할 수 있는 차림으로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 미안해서, 자상하고 부유한 남자를 만나 곧 결혼하게 되었으니 걱정말라고 카리나를 거듭 안심시켰다. 약혼자의 부를 자랑하는 일이 속물처럼 느껴지고 그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몸 고생하는 여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것보다 안심하게 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내일쯤은 오시려나.’

발렌틴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휴일 전에는 반드시 오겠다고 했고 이제 23일이 되었으니, 늦어도 내일은 데리러 올 터였다.

아드리아나는 문 닫을 시간이 된 것을 확인하고 가게 안을 정리한 후,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카리나가 과자점에까지 따라와서 일을 돕겠다는 것을, 차라리 보호소 일을 도와달라고 극구 만류해 그곳에 두고 왔다.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 미천한 사람들처럼 살고 계시다니’하고 울먹이던 그녀에게,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고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고작 몇 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때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뺨 위로 떨어지더니, 그다지 흐려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아앗.”

순간적으로 시야가 뿌예져서 휘청대다가, 아드리아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지붕이 있는 처마 밑의 벽으로 몸을 피했다.

“웬 비야....”

날씨가 크게 따뜻해진 것도 아니었는데 차라리 오려면 눈이 오지 않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외출하기가 더 어려웠다. 내일은 어쩌면 약혼자와 밖에서 데이트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드리아나는 마른 하늘에 내리는 소나기가 금방 그쳐주기를 기다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그치더라도 길이 미끄러워져 자전거는 탈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헤밀까지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했다. 그나마도 비가 그칠 생각을 않고 5분 이상 이어지자, 이러다가는 카리나가 자신을 찾겠다고 나와서 엇갈리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가슴 속에 심란함이 쌓여갔다.

‘추워....’

손이 시려웠지만 자전거를 붙잡고 서 있느라 주머니 속에 넣고 따뜻하게 할 수도 없었다. 몸이 벌벌 떨려와 열을 내려고 혼자 제자리걸음을 해보았다. 그러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다시 멈추어 섰다.

그때 길 한쪽에서 빛이 비춰 들어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였다.

이윽고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운전석과 뒷좌석에서 각각 남자들이 내렸다.

“발렌틴!”

아드리아나는 얼굴이 환해져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아드리아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나쁜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발렌틴이 우산을 받쳐주고, 펜은 자전거를 가지고 가서 차에 실었다.

“잘 지내셨어요? 투스미아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이리 와.”

그가 나직이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감싸고 차로 데려갔다. 차 안에 타고 나서도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고치지 못하고 있기에, 아드리아나도 미소를 거두고 태도를 수그렸다.

“죄송해요. 걱정 끼쳐드려서.... 갑자기 비가 왔어요.”

발렌틴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아드리아나의 젖은 머리카락과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어서 닦아냈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 시중을 들 사람이라도 붙여줬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나 카리나나 자신을 걸맞지 않게 연약한 영애 취급한다는 생각에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발렌틴.”

“응.”

“당신을 빨리 뵙고 싶었어요.”

============================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uu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