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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50화 (50/140)

00050  커지는 마음  =========================================================================

세 사람은 마차를 타고 소니아가 자주 찾는 상점가로 향했다. 소니아는 아드리아나에게 약혼자를 위한 결혼 선물로는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좀 더 고민해서 따로 해주고, 성탄 선물로는 같이 옷을 사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난 우리 프란체에게 귀여운 스웨터나 한 벌 사 입히려고 하는데 오드리 양도 어때요? 프란체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데 남자들치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전 제 약혼자가 어떤 취향이신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아드리아나가 자신 없어 하며 말하자, 소니아는 무슨 소리냐며 손을 저었다.

“우리 취향대로 예쁘게 입혀 놓으려고 사주는 거죠. 남자라면 부인이 입혀주는대로 네, 하고 입을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 요즘 같은 날씨에 프란체가 집에서 둥글둥글 푸근해 보이는 걸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그렇게 흐뭇해지더라고요. 스웨터나 머플러 같은 거라면 직접 데려가서 치수를 재지 않고서도 살 수 있으니 간편하고 좋죠.”

“큰일이네요. 전 체형도 잘 볼 줄 모르는데....”

아드리아나의 말에, 이번에는 쉐이드가 눈 앞에다 손가락으로 안경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끼어들었다.

“저만 믿으세요, 오드리 양. 제가 그분 실루엣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거의 맞춤옷과 같은 착용감을 느끼실 만한 걸로 골라드릴게요.”

“어머, 쉐이드 양이 안 따라와 주셨으면 우리 오드리 선생님은 어쩌실 뻔했어요? 약혼자 사이즈도 모르시다니 너무하셨어요. 이번에 만나시면 요렇게 안아보고 저렇게도 안아보고 몸으로 외우고 오세요. 그분을 너무 마음으로만 예뻐하지 마시고요.”

소니아와 쉐이드가 자기들이 한 말을 가지고 남세스럽다며 손뼉을 쳐댔다. 아드리아나는 자길 두고 자꾸 농담한다고 입을 내밀면서도 내심 소니아의 말을 의식해서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날 발렌틴과 인사를 나누며 한 번 포옹했던 일을 몇 번이나 반추했던 그녀였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을 위한 선물을 상상하며, 그가 걸치고 있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지난번 그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실내복으로 셔츠 위에다 단추로 여미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편해 보이고 인상도 밖에서보다 부드러워 보여서 무척 좋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사드린 것도 기쁘게 입으실까?’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기가 사준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면 수줍어져서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발렌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속옷이 든 선물 상자를 내민 남자가 아닌가.

“그럼 두 분이 같이 골라주셔야 해요.”

아드리아나는 기대하며 마차에서 내려 그 근방을 둘러보았다.

테스카에 살던 동안에도 와본 적 없는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상점가가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차와 마차를 위한 말끔한 주차장까지 각각 따로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두 여자가 합리적인 쇼핑에 대해 열정적인 수다를 떠는 동안, 한 상점의 유리벽을 통해 진열대에 놓인 회중 시계를 발견하고 시선을 붙들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한 눈에 봐도 좋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품격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저런 것도 멋지네요.”

홀린 듯 중얼대자, 소니아가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시계는 정말 명품이죠. 예물로도 훌륭하지만, 가격이 조금 부담될 수도 있어요.”

“가격이 어느 정도인가요?”

아드리아나의 물음에, 소니아가 조곤조곤 용도별로 대략적인 금액대를 알려주었다. 예물로 인기 있는 제품군의 경우에는 히터가 딸린 자동차 한 대 값에 필적하는 금액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잔금을 받으면 충분히 살 수 있어.’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잠깐 사이에 머릿속에서 격렬하게 고민이 되었지만, 길지 않게 끝났다. 신랑감은 아드리아나에게 달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가 그를 위한 시계 하나를 사더라도 다이아몬드 반지를 판 돈이 절반 이상 남을 터였다.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걸 보니, 설마 사실 수 있는 거예요, 오드리 양?”

쉐이드가 입을 떡 벌렸다.

“이건 꼭 해드리고 싶어요.”

“오드리 양은 역시 어딘가의 지체 높은 아가씨이면서 신분을 감추고 속세로 내려와 수행 중이신....”

정신 못 차리는 쉐이드를 끌고 들어가, 아드리아나는 시계를 고르고 예약했다. 계약금을 걸고 주문하면 한 달 후에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하실까요?”

들뜨고 긴장되어서 묻자, 소니아가 빙긋 웃으며 실토했다. 괜한 위화감을 주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게 분명했지만, 그녀의 남편에게도 첫 딸이 태어나던 해에 이곳의 시계를 선물해주어서 아직까지 지니게 하고 있다고.

아드리아나는 벌써 한 달 후가 기다려졌다. 이르면 그때쯤 이미 식을 올린 뒤일지도 몰랐다.

이윽고 소니아의 단골 가게에 도착해서 다 같이 옷을 골랐다. 마치 보석을 진열해 놓듯 옷을 두고 파는 곳이 있다고 신기해하며, 쉐이드도 미래의 남편감을 상상하면서 열심이었다. 소니아는 점 찍어둔 게 있었는지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중앙에 잔잔한 무늬가 수놓인 밤색 스웨터를 골랐다.

“이걸 입히면 완전히 곰 같겠죠?”

그녀는 벌써 신이 난다는 듯 미소 지으며, 유행하는 소재로 된 얇고 따뜻한 머플러도 하나 골라왔다.

“오드리 선생님 신랑분은 어때요?”

소니아가 고른 것들을 점원에게 주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신랑분’이라는 말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져서 얼굴을 조금 붉히며 눈을 깜박였다.

“아이, 부끄러워만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어떤 스타일이 좋을까요? 키는 어느 정도세요? 덩치는요? 우리 프란체하고 비교해서 어떤 편인지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 음....”

아드리아나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한참 동안 미간을 좁히고 서 있자, 쉐이드가 얼른 답해주었다.

“꽤 크세요. 키는 185cm 넘어 보이시고, 사이즈는 어디 보자, 이 정도가 맞으실 것 같아요.”

“어머나, 훤칠하시기도 해라! 이제 보니 오드리 양이 그래서 여태 시집을 안 가셨구나.”

소니아가 또 놀려댈 기세로 웃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괜히 진열된 옷들만 이것저것 들춰보았다. 그 동안 쉐이드와 소니아가 옆에서 좋아하는 색 따위를 물어보더니 두 가지를 골라왔다. 하나는 북부의 전통 디자인 같은 무늬가 여러 색으로 섞여 있었는데 색감 자체가 차분해서 요란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회색 톤의 심플한 디자인이었는데 그쪽은 겨울옷임에도 목 부분을 덮어주지 않고 조금 깊게 파여 있었다. 쉐이드는 당장에 그 쪽이 좋겠다고 나섰다.

“이건 목이 너무 춥지 않을까요?”

“이런 게 섹시한 맛은 있죠. 밖에서 입을 때야 머플러를 하면 되고요.”

소니아가 소곤소곤대며 눈을 반짝였다. 쉐이드도 음흉한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훤칠하시고 몸매도 좋으신 남편분을 집안에서 혼자 감상하시는 기분이 얼마나 즐거우시겠어요? 남편들이 말을 잘 들어줄 때 다 해봐야 해요. 조금만 나이 먹으면 목이 다 드러내는 건 부끄럽다느니 애들 같다느니 입어주지도 않는다니까요.”

아드리아나는 두 사람이 망측하다고 웃으면서도 무심결에 발렌틴은 어떨까 상상을 했다. 옆에서 두 사람들이 떠드는 목선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며, 발렌틴에게 끌어안겼을 때 그의 가슴과 목덜미에 닿아 가슴 두근거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흐, 흠.”

헛기침을 하며 얼굴의 열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소니아가 냉큼 점원에게 가서 회색 스웨터를 포장해달라고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다른 스웨터 쪽을 더 마음에 들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욕심껏 두 벌 모두 구입했다.

세 사람은 가게를 나온 뒤에도 몇 군데를 더 구경하고, 쉐이드가 테스카에 오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구두까지 샀다. 소니아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다들 사고 싶었던 것들을 품에 안고 흡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아, 저도 어서 제 것 말고 제 신랑 것을 사러 오고 싶네요. 두 분을 보니까 빨리 결혼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요? 쉐이드 양은 혹시 테스카의 남성분도 괜찮나요?”

소니아는 또 죽이 맞아서 쉐이드와 떠들다가, 불현듯 아드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체 누구세요? 우리 오드리 선생님의 약혼자분. 존함을 못 들었네요.”

그녀가 궁금해 하며 귀를 내밀기에, 아드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발렌틴 정도의 인사라면, 소니아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이 되어서 더욱 부끄러웠다.

“저, 음... 혹시 웨버 경을 아세요?”

아드리아나가 조그맣게 목소리를 짜내서 말했다. 그러자 소니아가 잘 못 들은 듯 눈을 깜박거렸다.

“누구요?”

“웨버 경 말이에요. 여기 출신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테스카에 사신 지 몇 년 되셨다고 하시던데....”

“...웨버 경이 혹시 그 웨버인가요?”

“어떤 웨버요?”

쳇바퀴 돌아가듯 제자리에서 맴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쉐이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 웨버가 그 웨버 맞지 않겠어요?’하고 끼어들었다.

소니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마치 새끼 돼지가 꾸익, 하고 울 때같은 소리를 내며 숨을 삼키기까지 했다.

“오드리 선생님과 약혼하셨다는 분이 발렌틴이었어요? 그이하고 결혼하시는 거예요?”

소니아는 혼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가, 두 뺨을 감싸쥐었다가,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등 심신의 안정을 몹시 필요로 해 보였다.

“그분과 잘 아시는 사이세요?”

아드리아나 역시 놀라워하며 묻자, 소니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아시냐고요? 전... 그이의 엄마 같은 사람이랍니다.”

그러고는 또 뭐가 우스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소리 죽여 웃어댔다. 아드리아나는 영문을 몰라서 얼굴만 붉히고 앉아 있었다.

소니아는 한참 후에서야 생각을 정리하고 이성을 되찾았다.

“아, 미안해요. 세상에나.... 선생님, 그럼 저희가 골라드린 선물도 받으셨겠네요?”

“선물...?”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말하는 것에 대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렌틴은 그것을 주며 ‘친구 부부’가 샀다고 말했었다.

“아....”

“레이스가 정말로 아름답지 않나요? 내가 속옷이라고만 알려주고 보여주진 않았어요. 발렌틴이 보면 아주 혹해서 정신을 잃을 거예요.”

소니아가 말하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러고는 또 웃어댔다.

아드리아나는 검은색과 상아색 실크로 만들어진 속옷 세트를 떠올렸다. 우아한 레이스가 천박해보이지 않고 아름다웠지만 몸을 가릴 수 있는, 비치지 않는 천의 면적이 너무 좁았다. 그게 발렌틴의 취향에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제 그것을 받던 때보다 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나저나 아까 산 거 어떻게 해요? 오드리 선생님 신랑분께서 워낙 점잖은 걸 좋아하시는 분이시다 보니, 예전에 우리 프란체가 쇄골 그렇게 다 내놓고 다니는 걸 보고 무지 싫어했었거든요.”

“정말이세요? 두 개 다 사서 정말 다행이네요.”

“그이가 영감님처럼 고집이 있다니까요. 프란체는 그런 점이 귀엽다고 자기보다 나이도 몇 살이나 어린 발렌틴한테 꽉 잡혀서 살고... 어머, 내가 신부 앞에서 참 주책이네요. 그이에 대해서는 워낙 할 말이 많았다보니... 선생님, 지난 우정을 봐서 저를 용서해주실 거죠?”

소니아는 발렌틴이 프란체와 친구 사이이며, 자신과는 먼 친척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장난기를 거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젠 진짜 친척이 되겠네요, 우리.”

아드리아나는 이 인연이 신기하고 기뻤지만,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이 겨울에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같이 그랬다. 믿기 어려울 만큼 행복한 일들만 연달아 일어나서 어느 날 꿈이었다고 깨버리는 건 아닐지 두려울 정도였다.

*

테스카에서 돌아온 후로 보호소의 두 아가씨들은 다시 그 도시에 방문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쉐이드는 소니아가 소개시켜 주기로 한 새로운 봉사회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데리러 오기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고백도 아니었다. 데려가서 자기 호적에 넣겠다는 말이 그토록 가슴 떨리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전의 연인들에게서는 듣지 못한 말이기에 더 귀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께 선물을 드리고, 내게 연인이 있었다는 것도 고백하고....’

“...있죠, 쉐이드 양.”

아드리아나는 그날 밤, 쉐이드에게 버클리에 대해 털어놓았다. 쉐이드가 먼저 자신에게 아픔이 있었다고 은유적으로나마 고백했었고 그녀가 그런 비밀을 친구와 나눌 정도이면서도 아르본에서의 평판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버클리에게서 구했던 쾌락과 그와 나눈 행위들에 대해 전부 상세히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와 얼마만큼 관계가 깊어졌는지, 어떤 사건으로 그와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감정에 치우쳐서 사실 관계가 어긋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들려주었다.

쉐이드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드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제 행실이 부적절했다는 걸 알아요. 변명이라면... 전 그때 남녀가 입을 맞추고 어떤... 감각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런 걸 했으니 머지않아 그와 결혼하게 되리라고 믿었어요. 아무튼 결혼한 사이였던 건 아니었는데... 약속이 깨질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석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을 뿐, 이제 와서 슬프지는 않았다. 그런 남자를 가려내지 못한 자신이 나빴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분이 용서해주실까요? 테스카에 있는 제 또래 친구가 그러는데, 그곳의 남자들은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대요. 물론 저는 웨버 경이 그런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분이라면 솔직히 두려울 것 같아요. 저와 가치관이 너무도 다르니까요. 하지만 저 자신이 흠 없이 살아오지 못했으니 그분이 순결성을 중시하는 분이라면 절 용서하지 않으실까 봐 두렵고요. 웨버 경이 어느 쪽이신지 알고 싶은데....”

“웨버 경은 전혀 안 물어보셨어요? 돌려서 묻지도 않으시던가요?”

쉐이드가 조용히 물었다.

“네. 그런 느낌의 대화는 일절 나누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만약 그분이 혼인 여부를 뒤집을 정도로 여성의 순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벌써 물어보시지 않았을까요? 수줍어서 묻지 못하셨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오드리 양이 지내오신 환경이... 우리 같이 잘 아는 사람이 아닌 이상 현실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음을 그분도 아신다니 더더욱 확인하지 않으셨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쉐이드는 조용하지만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라면 그분께서 물을 의향이 없으신 거라고 믿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런... 연인이란 지위를 이용해서 여자를 희롱하고 겁탈하려던 짐승에 대한 기억 같은 건 진작에 없던 일이라고 지워버렸을 거예요. 나중에 처녀성을 의심받게 되더라도 잡아떼겠어요. 내가 그 누구에게도 처녀성을 바친 일이 없는 데다 오직 남편을 위해 순결하게 살 작정인데, 정직하겠다고 해서 그런 나쁜 놈에게 당한 일을 털어놓아봤자 행실 나쁜 여자로 오해받거나 남편마저 괴롭게 하면 어떡해요?”

아드리아나는 남편마저 괴롭게 한다는 그녀의 말에 지금까지 결심하고 있던 일이 망설여졌다. 발렌틴이 자신을 용서해주고 대신 괴로워한다는 상황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 구질구질한 남자는 어디서 뭐하고 살지 궁금하네요. 낯짝 한번 보고 싶어요.”

“전 다시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아요.”

“전 보고 싶어요, 오드리 양. 없느니만 못한 거기를 콱 밟아주고 오게요. 제 새 구두의 굽이 얼마나 뾰족한지 보셨죠?”

아드리아나는 쉐이드가 그 일을 실현하는 것을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겁탈이라며 분노해주는 그녀 덕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살아왔던 자책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답을 구하게 되리라던 기대는 채워지지 못했다. 아드리아나는 약혼자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더욱 갈등하게 되었다.

*

어떤 답도 내리지 못한 채로 일상을 보내며 조금씩 보호소의 짐을 정리했다. 많지 않은 짐이라 미리부터 수선을 떨 필요는 없었다.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아예 조금 서둘러두는 편이 나았다.

“자동차가 있는 남편을 두게 되었으니 자주 놀러 와. 마차로 오는 시간의 반 밖에 안 걸릴걸? 그나저나 이젠 오드리의 힘을 빌려서 연말 모임 같은 때 웨버 경도 모실 수 있겠어.”

미네타는 미안해하고 서운해 하는 아드리아나에게 시종 웃는 얼굴로 북돋아 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오토에게도 전에 알려둔 대로 결혼하게 되어 곧 헤밀을 떠나게 될 것을 알렸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행복하게 살라는 투박한 인사가 가슴을 적실 정도로 고마웠다.

발렌틴이 언제 와서 갑자기 데리고 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서 미리 모두와 인사를 나눠두었다. 전에 일하던 찻집,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가게들에도 찾아가 인사를 했다. 다만, 로레인을 만나러 갔을 때는 타 지역에 출장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허탕을 쳐야 했다.

월요일, 화요일이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저녁 무렵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날씨가 흐려서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다녔는데, 헤밀의 언덕배기에 이르러서 아무도 없는 길목에 들어서자, 문득 평소와 다른 오싹한 기분이 느껴졌다.

마음이 심란해서인가 하고 딴생각을 해보며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뭔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 익숙한 곳이라고 너무 안이했어.’

겨울인데다 날까지 흐려, 저녁 6시가 된 것만으로도 한밤중인 것처럼 깜깜했는데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지 말았어야 했다.

헤밀은 가로등도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은 시골이었지만, 딱히 사고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보니, 테스카에서 살던 때의 경계심 같은 것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누군가 앞을 배회하는 일꾼이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보호소 쪽을 두리번거리며 급하게 길을 올랐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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