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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49화 (49/140)

00049  커지는 마음  =========================================================================

발렌틴이 다녀간 다음날, 아드리아나는 아침 일찍부터 테이블 앞에 정자세로 앉아서 신중한 필치로 편지 한 통을 썼다. 일요일이라 공사도 없고 늦잠을 자는 이가 많아 조용한 가운데에서 집중하기가 좋았다.

편지의 형식은 구호 시설 단체로부터 각 영지의 인사들에게 해마다 자선 모임에 초청하기 위해 보내는 양식을 땄다. 해가 바뀌기까지 2주도 남지 않은 연말이라 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아드리아나는 수신인이 결코 거절하지 못할 말들을 적었다. 사회적인 명망과 존귀함을 지닌 분들의 자애와 인정어린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스스로는 도저히 겨우내 난로를 지필 장작조차 구할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시고 반드시 짧은 시간이라도 이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을 굽어살피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식으로 호소했다. 또한 차마 적기 어려워 끝까지 망설였던 말도 덧붙였다.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가, 당신의 연약한 딸에게도 그와 같이 베풀어지리라 믿습니다.

‘어머니....’

흔히 하는 그 표현이라도 클로제 부인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잔인한 짓을 하고 있다고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아드리아나는 어떻게든 그냥 지나치지 못할 편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경애하는 마음을 담아 클로제 부인께’라고 끝인사를 적어넣을 때에는 기어코 편지지를 적시고 말았다. 종이를 휴지로 꾹꾹 눌러 물기를 닦아내고 나서, 꿋꿋하게 겉봉투에 주소까지 적었다.

이제 편지는 발신처를 아르본의 시설로 하여 쉐이드의 이름으로 보내질 것이다. 어젯밤 미리 쉐이드에게 허락을 구해두었다.

아르본은 리노아스에서 너무 가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한때 미네타와 함께 가기를 포기하게 했던 영지인데, 이번에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르본의 자선 모임이 열릴 연초에 그곳에 가서 클로제 부인을 기다렸다가, 기회를 엿봐서 직접 만나볼 셈이었다. 지금 발렌틴이 일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봐서는 결혼식을 위한 일정에도 머지 않아 돌입하게 될 듯했지만, 아무리그래도 성탄 전에 겨우 아이넨에 돌아오기로 한 그이니 연초부터 투스미아에 가기는 어려울 터였다.

‘어머니가 오실까....’

요즘처럼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시기에, 더군다나 외출을 달가이 여기지 않는 남편을 둔 어머니가 이 초대에 응할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최소한 관심을 갖고 후원자가 되리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 후로는 언제든 서로 사정이 될 때 초대하여 만날 수 있게 되리라.

아드리아나는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초조해져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서 어머니에게 딸의 결혼 소식을 알리고 예식에도 모시고 싶었다.

‘내가 무사히 살아서 결혼까지 하게 된다는 걸 어머니도 아셔야 할 텐데....’

늘 ‘공작 부인’을 주입시키던 아버지가 또 이상한 곳에 시집 보낼까 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드리아나가 발렌틴과 결혼함으로써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이제 걱정하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그날 버클리와의 일이 아버지뿐 아니라 리노아스 전체에 알려졌었는지의 여부였다.

‘먼저 어머니를 뵙고, 리노아스의 상황이 어떤지도 파악해 보고....’

아드리아나는 성급하게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초조한 마음을 달래가며 하루 일을 준비했다.

오늘은 딴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쁜 일정으로 차 있었다. 나가는 길에 편지를 부치고, 또 반지를 팔아서 선물 사는 일까지 전부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큰맘 먹고 소니아에게 전화도 걸었다. 그녀는 매우 반가워하며 아드리아나의 청을 듣고 오늘 오후에라도 당장 만나자고 말해주었다.

“아아, 드디어 저도 테스카에 가보는군요. 너무 너무 기대 돼요.”

테스카로 가는 마차 안에서, 쉐이드는 완전히 들뜬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제 아드리아나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자기도 함께 데려가달라고 했다. 테스카에 도착해서 아무 데나 떨어뜨렸다가 돌아갈 시간에 만나서 같이 오자는 말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에게 친구를 데려가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같이 다니기로 했다. 초행길인 아가씨를 혼자 풀어놓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가는 곳은 비교적 평범한 거리예요. 기대하셔도 생각보다 재미 없으실지도 몰라요.”

“아녜요, 오드리 양. 저는 거기 공기만 맡고 와도 좋을 것 같답니다.”

쉐이드가 깍지 낀 손을 가슴 앞에 두고서 킁킁거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아, 예쁜 구두를 사고 싶어요. 여기서는 구하기 어려운 최신 디자인으로 말이에요. 게다가 언제 민스터 양의 발을 밟아줄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뒤끝 있는 그녀의 말에 웃으며, 아드리아나는 민스터에 대한 측은함마저 느꼈다.

“그렇게 너무 미워하지는 마세요. 제가 분수에 넘치는 분과 약혼을 한 건 사실이고, 그 아가씨도 제 또래의 미혼이시니 질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요.”

“말도 안 돼요. 저도 오드리 양 또래의 미혼이지만 질투는커녕 신이 나기만 하는 걸요.”

“쉐이드 양은 제 친구이니까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쉐이드가 순간 입을 벙긋거리다가 입술을 오므리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뭐 어쩔 수 없네요.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본 건 아니지만 오드리 양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저도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런 사이라고 받아들이겠어요.”

그 후 쉐이드와 장난치며 뜨개질을 하다 졸다 하는 동안, 마차가 테스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소니아의 집 앞에서 내려 초인종을 누르자, 일하는 가정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내해주는대로 안으로 따라들어가니 응접실에 있는 거울 앞에 붙어 있는 소니아가 보였다.

“오드리 선생님, 어서와요! 친구분도 어서오세요! 잠깐만 나 다 했어요. 오랜만인데 이쁘게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잘 지냈어요? 갑자기 결혼이라니 웬일이야 글쎄.”

소니아가 흥분해서 떠드는 동안, 그녀의 남편이 방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점잖게 묵례하는 모습을 봐도, 워낙 소니아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았던 터라 그를 보면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그는 직접 갓난아기를 안고 우유를 먹이고 있었다.

“아아, 헤이즐의 동생이군요. 너무 귀여워요.”

두 손님이 꺄꺄 조그맣게 비명을 지르며 아기에게 인사하고 달라붙는 모습에 부부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프란체도 잠시 아기를 유모에게 맡겨놓고 대화에 끼었다.

“축하드립니다. 오드리 양도 곧 좋은 분과 결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테스카로 시집오신다고 제 아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 아너슨 씨.”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인사에 답했다.

그들처럼 화목하게 살게 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들만큼의 부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마저 가진 신랑을 얻게 된 덕분에 현실적으로 소니아 일가와 어울리는 일에 부담이 적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부부와 쉐이드를 서로 인사시켜준 후, 상점가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프란체를 따라 나섰다.

선물은 뭘로 정했냐고 묻는 소니아에게,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보이며 답했다.

“뭐가 좋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뭐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만한 걸 드리고 싶어요. 가격은 전혀 상관 없어요.”

“어머나, 우리 오드리 선생님, 신랑감이 정말 마음에 드시나 봐.”

소니아가 놀리기를 시작하자, 쉐이드도 가세해서 자기가 보기에도 예비 부부가 너무 뜨겁다며 보탰다. 아드리아나는 근엄한 체 하며 앉아 있는 프란체를 보기가 부끄러워서 눈치를 보았지만, 사람들이 사이가 좋다고 놀리는 것이 싫지만도 않았다.

“대체 어떤 남성분이에요?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또 테스카 치맛자락 아닙니까.”

소니아가 귀를 바짝 들이대며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웃느라고 얼렁뚱땅 넘어가고 말았다.

“아참, 잠깐 들를 데가 있어요. 반지를 하나 팔려고 하거든요.”

“어머, 반지까지 팔아서 선물 하시려는 거예요?"

“아뇨, 이건 전부터 계속 처분 하려던 건데 테스카에 온 김에 팔려고요.”

아드리아나는 전에 에바에게서 값을 정직하게 쳐준다고 들었던 가게의 위치를 프란체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소니아가 그곳을 잘 안다며 더 쉽게 가르쳐주었다.

이내 목적지에 도착해서, 프란체는 여자들을 내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드리아나가 반지를 파는 동안, 소니아와 쉐이드는 근처 옷가게를 구경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아드리아나는 혼자서 보석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은 일부러 옷도 가진 것중에 제일 좋은 것으로 입었다. 반지를 내밀 때에도 전처럼 쭈뼛거리지 않고 떳떳하게 내밀었다.

보석상은 아주 신중하게 반지를 살폈지만, 물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어떤 흠도 잡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반지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알려주며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확인하고 양도증서를 작성해준 뒤, 거기에 주소와 이름 등을 적고 서명하게 했다.

아드리아나는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본 뒤에 주소란에는 보호소의 주소를, 이름란에는 ‘오드리 라티스’ 라는, 외가가 있는 영지명을 더한 풀네임을 기재했다.

“금액이 크니 잔금은 절차를 거친 후에 적어주신 계좌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중에는 입금이 완료됩니다. 우선은 선금을 받으시고 영수증을 작성해 주십시오.”

아드리아나는 반지 값의 일부를 먼저 현금으로 받고, 받은 금액을 영수증으로 만들어주었다. 태연해 보이려 애썼지만, 큰 돈이 들어온 것에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당장 주어진 액수만 해도 테스카에서 1년 내내 벌었던 액수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거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금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거든 언제든 가게로 확인해 주십시오.”

아드리아나는 가게 주인에게 인사하고 그곳을 나왔다.

이번에는 사고 없이 무사히 일을 해냈다. 가게는 오래되어 신용 있는 곳이었고, 최악의 경우 잔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 해도 지금의 돈을 얻은 것만으로 위안 삼을 수 있을 정도로 여겨졌다.

아드리아나는 벅찬 마음으로 일행들과 합류하여 고급 상점가로 이동했다.

“있죠, 역시 성탄 선물은 부담없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드리 양의 사정을 알고 결혼하자는 분인데, 너무 큰 선물을 받으면 기쁘기보다 약혼녀를 무리 시켰다고 가슴 아파할 수도 있어요.”

소니아가 배려 넘치는 다정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그럴까요...?”

“그럼요. 게다가 결혼 준비를 하다보면 뜻밖에 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기도 해요. 신랑되실 분께서 다 알아서 하시겠다고는 하셨다지만, 꼭 자기 돈을 써야만 하는 일도 있죠. 만약 그분께 형제자매가 있는데 그분들이 마음에 들어서 양말 한 짝씩이라도 선물하고 싶어질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면 자기 침실 베개 커버가 취향에 안 맞아서 슬쩍 사서 바꿔놓고 싶을 수도 있는 거고요.”

“으음....”

“아무튼 수중에 비상금은 조금 남겨두는 편이 좋아요. 남편과 힘을 합쳐서 뭔가를 벌이는 것도 재미있답니다.”

“알겠어요. 그치만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어도 되니까, 이번 선물도 되도록 좋은 걸로 추천해 주세요.”

아드리아나가 수줍어 하며 말하자, 소니아와 쉐이드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하신 말씀을 그분이 들으셨으면 잠 못 주무시겠어요, 오드리 양.”

“안그래도 지금 새색시 놓고 어디 가셨다면서요? 안달나서 못 주무시고 계실 게 틀림없다니까요.”

여자 셋이 모이면 어떻다더니, 깔깔대며 주고받는 두 사람 사이에 있으려니 귀가 따가웠다. 그래도 아드리아나는 그들이 자신과 약혼자의 이야기를 하는 게 마냥 기분이 좋아서, 뭐라고 놀려대든 웃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팔아 치웠더니 제 속이 시원하네요.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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