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커지는 마음 =========================================================================
아드리아나는 터질 듯이 달아오른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선물 상자 안에 들었다는 내용물의 민망한 정체를 의식하며, 그것을 테이블 위에서 끌어내려 의자 옆에다 살짝 감추었다.
발렌틴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깐 기다려 달라더니 판매대로 가서 빵과 과자를 잔뜩 집어 왔다. 그러고는 계산해 달라는 말도 없이 뭔가 망설이며 서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힌 채로 티 나지 않게 그에게 살짝 눈을 흘긴 후, 그가 골라온 것들을 확인하며 종이 위에 가격들을 써서 더했다.
“...미안하오.”
“뭐가 미안하신데요?”
속옷을 선물한 게 놀리려는 의도였던 건가 싶어져서 새초롬하게 웃으며 올려다보자, 발렌틴이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당신이 거기 서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이상해. 당신은 그런대로 즐거워 보이지만, 난 마음이 별로 좋지는 않소.”
그의 진지한 말투에, 아드리아나는 장난기를 거두고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그의 앞에서는 자신이 항상 초라하게 느껴졌다. 비굴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 가에서는 여전히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보다는 상속받은 재산으로 노동자를 부리는 이들이 더 고귀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인식이었다.
발렌틴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을 사람이었다. 번듯한 부와 지위를 가진 남성으로서 아내 될 여자의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 본인이 ‘경’으로 불리고 있는 신분이면서도 스스로 근로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희귀한 케이스이고 아드리아나의 원래 신분에 대해서까지는 알지 못할 거라 해도, 일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고된 일은 아니라서 오히려 건강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매일 잠깐씩은 운동을 하면 좋다잖아요.”
아드리아나가 창피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미소 지으며 말하자, 발렌틴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일이라도 쉬고 싶어지면 정리하고 내게 알려줘요.”
“네.”
아드리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총 금액이 적힌 페이지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발렌틴이 돈을 꺼내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과자들을 종이 봉투에 담았다.
“혹시 로레인 수녀님께 보내시려는 건가요?”
“음. 요즘은 날 빵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알거든.”
발렌틴이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돈을 내밀었다. 아드리아나는 로레인이 ‘삥 뜯는 불량배’라고 자칭했던 일을 떠올리며, 발렌틴이 과연 로레인에게서 심부름값은 돌려받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두 분은 우애가 아주 좋아 보여요. 친척이신 것 같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요.”
“로레인이 말하지 않던가?”
“어떤 말씀을요?”
“그애는 내 여동생이야.”
아드리아나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턱을 아래로 당기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남들에게 알려지면 서로 귀찮아져서 굳이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내가 당신에게 차이기라도 할까 봐 알리지 않은 모양이군.”
“그... 다른 동생분하고 몸싸움을 하신다는 여동생분 말씀이세요?”
“맞소.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착해졌지.”
‘착해졌다’는 정도의 표현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할 극단적인 변화가 과거의 로레인에게 일어난 모양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본인도 없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어서 속으로 삼켰다.
‘...이분이 로레인 수녀님의 친오빠라니.’
아드리아나는 빵빵해진 종이 봉투를 발렌틴의 앞으로 밀어놓으며,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부터 전신을 쭉 살펴보았다.
“...정말 한 부분도 안 닮으신 것 같아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자, 그도 부드러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서로 다행으로 여기며 살고 있소.”
그가 너무도 자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화난 로레인의 얼굴을 상상하며 소리 내서 웃었다.
약혼자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또 하나 알게 된 일, 그가 자신의 시시한 장난에 어울려주기도 한다는 사실에 흐뭇해 하며 아드리아나는 행복감으로 마음을 부풀렸다.
“참, 지난 번에 거스름돈 안 받아 가신 거 알고 계세요?”
“그랬던가.”
“제 손 위에 떡하니 놓여 있었는데도 당신은 쳐다도 안 보시고 그 위에다 반지를 올려놓으셨죠.”
아드리아나는 그때 따로 빼놓았던 거스름돈을 더해서 돌려주었다. 가끔 손님이 거스름돈을 잊고 가거나 잘못 받아가면 이렇게 따로 빼놓았다가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발렌틴에게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아주 적은 액수의 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의 것이라면 더욱 더 작은 하나라도 직접 챙겨주고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오. 난 뭔가 생각하고 있으면 다른 건 돌볼 여유가 없어져서 건성이 될 때가 많아. 앞으로 당신에게 혼나는 일이 많을 거요.”
발렌틴은 자신이 큰 결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듯 나직이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겨드릴게요.”
아드리아나가 상냥하게 대답해주었음에도, 그는 미안해 하는 듯한 표정을 금방 바꾸지 못한 채로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5시가 되기 전에 다시 들르겠소.”
“네. 기다릴게요.”
그를 보내고, 아드리아나는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의자에 앉지 못하고 가게 안을 서성였다.
발렌틴과 만나서 반갑고 기쁜 마음, 여러 걱정거리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꾸역꾸역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찜찜한 기분, 또한 발렌틴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여기 오겠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조금 불안한 예감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는 쓰다 만 편지를 마무리 짓기 위해 연필을 들었다.
웬디가 기도해준 대로 나는 아주 잘생긴 분을 만나게 되었어, 그분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등등. 아드리아나는 웬디가 신이 날 만한 말들을 편지지에 빼곡히 적어 넣었다.
오후 5시 정각이 되기 10분 전, 발렌틴이 가게로 돌아왔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차에 태우고 헤밀로 향하는 길에 바로 용건을 꺼냈다. 아드리아나가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반면에,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드리, 실은 다음 주에 투스미아에 방문할 계획인데 이번에는 나 혼자서 다녀오려고 하오.”
“네....”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기 집에 다녀온다고 하는데 소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두 달 이내로 결혼식을 올리자던 그였어서 조금 서운해졌다.
“날짜도 잡아야 하고 이것저것 의논할 일이 있어서 당신을 데려갈까 했지만, 그러면 식도 올리기 전에 당신이 우리 집안 일로 너무 피곤해질 것 같아서.”
발렌틴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에 기분이 묘해졌다. 벌써 부부가 된 것처럼 대해주는가 하면, 이런 선이 그어진다는 것이 석연치는 않았다. 한때, 가족이 될 거라고 믿었던 사람의 가족 일에서 완전하게 소외되며 지내다가 그만큼 완벽하게 그에게서 떨어져나가 혼자가 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이 불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아요.”
“아냐. 내가 불편한 게 아니라....”
아드리아나의 서운함을 느낀 발렌틴이 얼른 부정했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하다가 아드리아나를 향해 상체를 약간 돌리고 앉아서 말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겐 아주 골치 아프게 하는 가족이 있어. 그분과 당신을 아직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분이 우리 결혼을 빌미 삼아서 당신에게 허무맹랑한 요구를 하실지도 몰라. 내가 알아서 일을 처리하고 올 테니까 당신은 그분과는 결혼식 때 처음 인사하는 게 나을 거야. 그때는 뭐라고 못 하실 테니까.”
“...혹시 그분께서 절 싫어하시나요?”
아드리아나가 걱정스레 묻자, 발렌틴이 고개를 저었다.
“누굴 만나든 트집을 잡는 분이시지.”
“그래도.... 그런 이유로 피한다면 더욱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음... 애초에 그분 앞에서 예의를 차리자면 한도 끝도 없소. 그분에 대해서는 날 믿어도 돼요. 천천히 준비합시다. 식을 올리기 전에 로아타르에 모여서 다른 가족들과는 미리 인사를 할 기회가 있을 테니 이번엔 기다려 줘요.”
그런 말까지 듣고 보니, 아드리아나도 자신이 없어지기도 하고 아득바득 따라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하릴없이 알겠다고 수긍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누구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내가 최선을 다 하겠소.”
심각하게 그런 말을 하는 발렌틴을 보며 아드리아나는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 골치 아프게 하는 가족이란 분도 여간한 위인이 아닐 듯해, 혼사를 앞두고 시댁에 따라가지도 않는 자신의 몫까지 혼자 시달리고 올 그가 조금 가엾어졌다.
시간이 촉박해서 보호소 안에는 들르지 않고 돌아가겠다는 발렌틴을, 아드리아나는 차 안에서 그대로 배웅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발렌틴.”
“응. 다녀오겠소.”
그가 신중한 투로 다녀오겠다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아드리아나를 기쁘게 했다. 다녀오겠노라고 인사해 주는 것도.
아드리아나는 머뭇머뭇, 세간의 가족들이 여행으로 잠깐 이별을 나눌 때에 으레 그렇게 하듯이 두 팔을 내밀어서 포옹을 청했다. 이 행동을 하기까지 제법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내기 전에 한번 안아주고 싶어서 차 안에서 인사를 하겠다고 한 마음을 벌써 들켰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발렌틴은 바로 안아주지 않고 눈을 껌벅이다가, 아드리아나가 아랫 입술을 조금 내밀었을 때에야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두 팔이 천천히 아드리아나의 몸을 감싸 안고, 이내 커다란 손은 아드리아나의 작은 어깨와 등 위에 조심스럽게 놓였다.
“...이번 휴일은 당신과 함께 보내겠소. 그 전에는 무조건 돌아와서 당신을 내 집으로 데려가 함께 지내고, 해가 가기 전에 당신을 내 호적에 올릴 거야.”
그가 말한 휴일이란 이제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아드리아나가 네 번째로 맞이하는 성탄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해가 가기 전이라면, 그로부터 고작 며칠 내의 이야기가 된다.
아드리아나는 약혼자의 품 안에 뺨을 기댄 채, 몸의 온도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미네타에게 '마른 편이신 듯하다'고 말할 정도로 짐작했던 터라 예상보다 훨씬 두터운 몸과 팔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힘에도 당황한 데다가, 그가 한 말이 몹시 의식되었다.
함께 지낸다는 건 얼마간을 말하는 것일까. 호적에 올린다는 것은, 그의 아내가 되어 그 이후로 줄곧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일까. 그것도 바로 일주일 뒤에.
심장 뛰는 소리가 발렌틴이나 운전석의 펜에게까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발렌틴은 필요 이상으로 아드리아나의 몸을 밀착시키지는 않고 있었지만, 인사치고는 조금 길게 안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를 놓아주면서는 그가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의 뺨이 아드리아나의 귀에 닿기까지 했다.
아드리아나는 그에게서 떨어진 후, 마치 남자와 처음으로 포옹해본 여자처럼 빨개진 얼굴로 경직된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웃지도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는 그녀를 보며, 고요했던 그의 표정에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
“...그분께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요.”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아드리아나가 쉐이드에게 말했다.
“전 그분께 반지를 받았는데 아무것도 드리지 못했어요. 뭘 드리면 기뻐하실까요? 결혼할 남성에게는 보통 어떤 선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에게 정식으로 예물을 보낼 수 없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가문 간의 합의를 통해 결합하는 것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는 말했지만, 아드리아나가 스콰이어 가로 실려가던 마차 안에 실렸던 만큼을 발렌틴에게 해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드리 양.”
무릎 위에 이불을 덮고 앉은 쉐이드가 수상쩍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드리 양을 선물로 가지시라고 말하면서 오늘 받으신 속옷 차림을 감상하시게 해드리면 어때요?”
그녀는 말하고서 근사하지 않냐며 양쪽 눈썹을 까닥 치켜올렸다.
“망측해요, 쉐이드 양.”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아드리아나가 몸을 내밀어 쉐이드를 베개로 두들기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이불로 몸을 가려 숨기며 까르르 웃었다.
“당장이 싫으시다면 첫날밤에 하시면 되잖아요. 결혼식도 조만간 올리실 게 아닌가요?”
“그래도... 그런 것까지는 못 할 것 같아요.”
“오드리 양도 참, 그 정도면 아주 조신한 유혹인데 뭘 그러세요? ‘포장은 당신이 직접 풀어보세요.’ 하고 속옷 끈 정도는 쥐여드려야 선물다운 느낌이 들지 않겠어요?”
아드리아나는 새 소리처럼 작게 끼야, 비명을 지르며 이불로 몸을 더욱 감쌌다. 쉐이드는 그런 모습을 보며 왠지 뿌듯해하다가 곧 정색하고 말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잘 사는 집안의 남자를 만나본 일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테스카에 친한 부인이 계시다면서요? 그분께 조언을 구해보면 어떨까요? 그분께서도 남편을 위한 선물 고르는 일에는 도가 트셨을 테죠.”
“그럴까요?”
아드리아나가 소니아를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이자, 쉐이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금액은 상관 없는 거예요? 그런 분들께 쓸 만한 물건을 선물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괜찮아요. 저금해둔 돈이 있어요.”
사실 은행에는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아직 큰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반지 한 개 정도는 눈에 띄지 않고 가볍게 소지할 수 있으므로 허무하게 도난 당하는 일 따위는 없을 터였다. 아드리아나의 아버지가 딸의 혼인을 위해 준비했던 물건이 결국 남편을 위해 쓰이게 되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테스카에 가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더 해둘 생각이었다.
“저기, 쉐이드 양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