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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47화 (47/140)

00047  불안한 각오  =========================================================================

두 사람이 함께 미장원을 찾은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아드리아나는 헤밀에 있을 때 커트를 하거나 염색을 할 적에도 미네타에게 맡기곤 했기 때문에 미장원에 와 볼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와 달리 쉐이드는 머리에 컬을 만들기 위해 가끔 이곳을 찾는 모양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 오전인데도 손님 하나가 앉아서 한껏 풍성해진 머리를 톡톡 만져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내는 귀족가의 여성용 응접실처럼 화려하고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들. 어머, 쉐이드 양은 벌써 컬이 풀리셨나 봐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머리가 너무 빨리 길어도 탈이에요.”

쉐이드는 가게 주인과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먼저 거울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컬을 말고 기다려야 했고, 아드리아나는 가볍게 정리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에 놓인 책을 들여다 보았다.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얇고 장당 글자 수가 적은 로맨스 소설을 한 권 열심히 읽고 나자, 어느새 머리를 다 만 쉐이드가 소파 옆으로 왔다.

“이제 오드리 양도 가셔서 더 예뻐지고 오세요.”

그녀의 말에 웃으며, 아드리아나도 거울 앞으로 가서 앉았다.

“물을 들이신 적이 있나 봐요. 색은 다 빠졌지만, 머리카락 끝에 흔적이 남아 있네요.”

가게 주인이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집어 살펴보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신분이 탄로나서 곤란한 일을 겪게 될까 봐 위장하고 숨어지냈던 옛날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많이 자르셔야 될 것 같은데 어쩌죠. 대략 이 정도?”

가게 주인이 머리카락 끝을 집게 손가락 길이만큼 잡아 보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아드리아나의 머리는 허리까지 닿았고, 그 정도 차이는 본인도 거의 눈치 채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주인이 그토록 아쉬운 표정을 하는 이유를 몰라 그저 웃으며 상관 없다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부인.”

이윽고 가게 문이 열리고, 여자 셋이 함께 우르르 들어왔다. 한 명은 30대로 보이는 부인이었고 나머지 둘은 아드리아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보이는 아가씨들이었다.

그녀들은 아드리아나와 쉐이드에게도 각각 우아한 자태로 인사하고서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추위가 조금 누그러들었네요.”

“그러게요.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에요.”

여성들과 쉐이드는 초면인 듯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손님이 많네요. 이게 다 우리 원장님의 솜씨가 훌륭하신 덕분이 아니겠어요?”

세 명 중에 가장 예쁘게 생기고 반절만 묶은 빨간 머리카락 윗부분을 높게 부풀린 아가씨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원장은 감사 인사와 겸손한 미소를 돌려준 후, 다시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에 주의를 기울였다.

“흠....”

다른 부인과 아가씨가 쉐이드와 마찬가지로 테이블 위의 쿠키와 다른 간식거리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그 아가씨만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아드리아나를 훑어 보았다. 한참을 그러더니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일행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아드리아나는 앞에서 대놓고 뒷담화를 나누는 여성들의 모습에 황당해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성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계속했다.

이내 빨간 머리 아가씨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세를 고치고 도도한 모습으로 허리를 펴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오드리 양이신가요?”

아드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에 비친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그런 반응에 자신의 짐작이 맞다고 확신한 빨간 머리 아가씨가 훗 하고 웃었다.

당황한 아드리아나는 아가씨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원장도 짐짓 눈치를 보았고, 빨간 머리 아가씨의 일행들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아드리아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쉐이드는 쿠키를 먹으며 책을 보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여러분, 들으셨나요? 지난 토요일에 우리 아이디 왕세자님이나 타실 것 같은 고급 리무진이 헤밀에까지 행차해서 저기 계신 아가씨를 내려드리고 가셨다는 소문 말이에요. 그날 월터슨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썰매를 타다가 보셨다는데, 마치 커다란 백마 같은 그 흰색 자동차에서 범상치 않은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이는 남성분도 함께 내리셨다는 거예요.”

“어머 어머 세상에나!”

“더 굉장한 사실은, 그 남성분이 아가씨의 배웅을 받으면서, 뭇 관중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아가씨께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계셨다는 거죠.”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결코 그런 시선을 보낸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지만, 떠드는 여성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목격담이 어떤 식으로 부풀려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실은 저도 성의 파티에 초대받아 갔을 때 리무진을 타본 적이 있답니다. 마차처럼 멀미가 나지도 않고 아주 근사했죠.”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일을 안주 삼아 떠들기 시작한 여자들의 말을 들으며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가씨께서는 분명... 그분께 청혼을 받으신 게 아닌지요?”

빨간 머리 아가씨가 넘겨 짚고 한 질문에, 아드리아나는 어쩔 수 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들 사이에서 작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저는 전부터 오드리 양에 대해 들어왔답니다. 아주 아리따운 아가씨가 계시다는 소문이 있어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혼자 설레기도 했었죠. 아가씨께서는 코니스에서 오신 분이라고 하던데....”

빨간 머리 아가씨가 짐짓 공손해진 투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줄였다.

“네, 맞아요.”

아드리아나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눈동자를 더욱 빛냈다.

“혹시 코니스의 어느 가문 분이신가요? 저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코니스에도 꽤 계시거든요.”

“아... 그냥,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영지라 아실지 모르겠어요.”

“어머, 겸손하기도 하셔라. 그래도 어지간히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이시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넨 땅에서 리무진을 타고 다니는 남성에게 청혼을 받는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죠.”

아드리아나는 만약 외가의 영지명을 말했다가, 아가씨가 그곳을 알고 있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졌다. 머뭇거리고 있자, 아가씨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함부로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가문이신가 보네요. 그러실 거예요. 제가 그동안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헤밀의 변호사 남성 분과 길에서 남몰래 포옹을 나누실 정도로 다정한 관계셨다기에,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어려운 지위에 계신 분이실까 했는데....”

아드리아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헤밀과 슈하스에서는 노아와의 일이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거울에 비친 아가씨의 얼굴은 시종 온화하고 미소가 가득했다. 그 곁의 부인과 아가씨는 또다시 열정적인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민스터 양은 장녀이시죠?”

문득 쉐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직도 오독오독 쿠키를 베어먹으며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저도 딸들 중 첫째이거든요. 제가 시집을 못 가서 동생들이 연애도 마음대로 못 하고 애환이 많답니다. 저희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로잘린 대학의 지엄하신 교수로 계시는데 위계 없는 모습을 보일 수야 없으니까요. 저도 겉으로야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처럼 시집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보면 스트레스가 많다는 걸 아실 거예요. 남의 연애사에 관심도 많아지고요. 다들 이해해줘야 해요.”

쉐이드의 말에 빨간 머리 아가씨가 입을 벙긋거리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시집을 못 가다니요? 저는 약혼을 한 몸이랍니다.”

그녀의 항변에 쉐이드가 시선을 돌려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잘 알겠다는 듯 아, 하고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그랬죠, 참. 들었던 것도 같네요. 제가 이런 결례를 범하다니.... 저도 로맨스에 높은 이상을 가진 여성으로서 누구 누구네의 신랑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교하며 타산지석으로 삼으려다 보니, 특별히 선망할 만한 조건을 가진 고귀하신 남성분이 아니고서야 일일이 기억하기가 어렵지 뭐예요? 부디 시집을 못 갔다는 제 말에는 오해 없으시길 바라요.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우리 둘 다 시집을 못 간 처지임에 우정을 느끼고 드린 말씀일 뿐이랍니다.”

쉐이드가 눈이 거의 감길 정도의 초승달로 만들며 미소 지었다.

아가씨가 허! 허! 하며 헛웃음 소리를 내는데도 쉐이드는 아랑곳 않고 눈을 껌벅이며 책장을 넘겼다. 아가씨는 이제 아드리아나는 안중에 없어진 듯, 롤을 잔뜩 말고 있는 쉐이드의 뒤통수만 따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휴, 쉐이드 양은 왜 적을 만드시고....’

아드리아나는 조금 전에 자신이 당한 일보다 쉐이드가 걱정되기 시작해서 머리카락 손질이 끝날 때까지 줄곧 거울로 소파 위만 흘끔대었다. 쉐이드는 과자 바구니를 비울 기세로 먹고 있다가, 아드리아나의 차례가 끝나자, '본판이 예쁜 사람은 역시 유행 스타일을 안 해도 예쁘다니까!' 하고 손뼉을 쳐서 아가씨들의 눈총을 받았다.

“아, 역시 제 패션의 완성은 이 컬이에요. 훨씬 보기 좋지 않나요, 오드리 양?”

“정말 예뻐요, 쉐이드 양.”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길을 걷는 쉐이드를 보며, 아드리아나느 눈썹을 찌푸리고 웃었다.

“아까 거긴 파티장을 대신하는 아지트예요. 아르본에는 저런 여자들이 수두룩하답니다. 파티에 가면 술을 먹고 여기저기 늘어져서 발에 밟힐 정도로 널렀죠. 평소에 눈엣가시가 있거든 그때 한 번 엉덩이 같은 곳을 콱 밟아주면 얼마나 고소한지.”

그녀가 너무도 명랑하게 말하기에, 아드리아나는 빨간 머리 아가씨의 일을 걱정하던 것도 잠시 잊고 소리 내서 웃으며 헉헉대며 헤밀로 가는 비탈길을 올랐다.

#포옹

“어서 오세요.”

과자점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아드리아나는 웬디에게 쓰고 있던 편지를 놓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 방문객을 확인하고는 앉아 있던 몸마저 일으켰다.

부드러운 캐시미어 코트로 몸을 감싼 커다란 남자가 아드리아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테이블 앞까지 왔다.

“발렌틴....”

“잘 지내셨소? 토요일인데도 오늘은 일을 하시는군요.”

그가 새삼스럽게 깍듯한 태도로 안부를 묻는 것을 보며, 아드리아나는 뭐지 싶으면서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어쩐 일이세요?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발렌틴에게서는 일요일에 딱 한 번 안부를 전한 이후로 5일간 소식이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에 전화가 없었기에 보통은 다들 그랬지만, 피차 통화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보니, 이 5일이 무척이나 더디게 가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음. 정신 없었소. 지금도 일을 보러 왔다가 들른 거요. 바로 로레인에게도 잠깐 들렸다가 슈하스의 성에 가봐야 해.”

그는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말투가 전처럼 간편해졌다. 아드리아나는 그런 점에도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따가 테스카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와서 좀 보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좋아요.”

아드리아나가 수줍게 대답하자, 발렌틴이 들고 들어온 종이 가방을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커다랗고 하나는 조금 작았다.

“큰 건 미네타 씨한테 주고, 작은 건 당신 거.”

미네타를 위한 종이 가방에 든 것은 안의 물품이 들여다보여 보호소 직원들을 위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반면, 아드리아나의 것은 반짝이는 포장지로 둘러싸인 선물상자여서 내용물을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을 챙겨주는 것이 기쁜 한편, 안그래도 기우는 약혼을 한 처지에 괜히 선물까지 받는 게 미안해서 쓴웃음을 지었다.

“발렌틴, 제 것은 괜찮아요. 어차피 전 곧 당신 집에 가서 당신 물건을 제 마음대로 쓰고 살게 될 거잖아요.”

“...내 속옷을 마음대로 입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허억, 하고 크게 숨을 삼켰다.

“내가 산 게 아니야. 친구 부부가... 아무튼 받아둬요. 나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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