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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46화 (46/140)

00046  불안한 각오  =========================================================================

아드리아나는 이번에야말로 반쯤 얼어붙었다. 쉐이드의 말뜻을 재확인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지금 과거의 아드리아나에게 한 침대를 쓸 정도의 연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제가 그래보이나요, 쉐이드 양?”

“아...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 드릴게요. 별로 깊은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에요. 그냥 오드리 양이 순진하고 정숙한 아가씨라는 것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남성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요.”

그녀가 자못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지만, 한 번쯤 약혼한 경험이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잖아요? 인생에 성공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러는 실패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저는 아르본에서 친구들과 가끔은 이런 고민을 나누기도 했답니다. 제가 철이 없었던 탓에 일찍 큰 아픔을 겪어봐서 힘들었거든요.”

새빨개진 얼굴로 겸연쩍게 웃으며 말하는 쉐이드를 보며, 아드리아나는 굳었던 표정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저기, 화 나신 건 아니죠? 오드리 양.”

눈썹꼬리를 내리고 눈치 보며 묻는 세이드를 보며, 아드리아나가 좀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건 알겠어요. 그냥 전... 조금 무서워요. 이런 화제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요.”

아드리아나는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단지 어색하고 어렵다는 뜻을 전하려 애써 웃으며 의자 위에 몸을 웅크렸다.

“그야 물론 그러실 수도 있죠. 누구든 싫고 좋음이 있고 자기 비밀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걸요. 전 혼자 끙끙 앓는 걸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럴 뿐이에요. 서로 믿고 비밀을 나눌 친구들이 없었다면 답답해서 화병이 났을 거예요.”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건 부럽네요.”

아드리아나가 진심으로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자, 쉐이드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에요. 저도 아무한테나 막 떠드는 건 아니거든요. 오드리 양이 제 비밀을 소문내실 만큼 한가한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랍니다.”

그녀가 쉽게 마음을 풀고 베개에 머리를 비비며 뒤척이기에, 아드리아나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불을 끈 뒤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 속에서 반듯하게 몸을 눕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용하게 심호흡을 했다. 생각할 일이 많았던 것 같은데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갑자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남성을 아는 것처럼 보이나요?”

작게 묻자, 맞은편 침대에서 다시 뒤척이는 기척이 났다.

“그렇다기보다는 조금 예민하신 것 같아서요. 아니, 예리하다고 해야 할까요? 뭔가 알고 피하시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어요. 남자들이 오드리 양에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냄새를 멀리서 은근슬쩍만 풍겨도 번개 같이 도망치시더라고요.”

그녀의 말 뒤에 둘 다 키득키득 웃었다.

몇 번인가 안 좋은 경험도 있었고, 한때는 좋았지만 끝에 가서 상처로 남은 기억도 있었다. 그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남성들에게서 약하게라도 성적인 신호를 느낄 때면 뒤도 안 보고 피해 왔는데, 쉐이드가 그런 모습을 보며 경험에서 우러난 예민함이라고 알아챈 듯했다.

“쉐이드 양은 친구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나 봐요.”

“아르본은 젊은이들의 사교가 활발한 지방이라 별별 이야기가 다 귀에 들어오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고 끼기 싫은 자리에도 나가야 해요. 빠졌다가는 그날의 맛있는 안주거리로 오르내릴 테니까요.”

아드리아나는 그런 무서운 곳이 있느냐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쉐이드가 소위 말하는 ‘여자의 날카로운 육감’을 발휘해서 그런 말을 한 거였다면, 발렌틴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자신의 몸가짐에 대한 인상을 염려하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하지만 정말 그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아직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과거나 순결 여부에 대해 확인하려 든 적이 없었다. 그가 여성의 순결을 문제삼지 않는 드문 부류의 사람이라서 확인하지 않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순결할 거라고 생각해서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귀족 가에서는 혼담이 오가게 되면 그 부분에 대한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가문에서 당사자들의 순결을 보증하거나, 또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시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드리아나는 신랑이 될 본인에게 직접 청혼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 있어서 생략된 것이 많았다. 서로의 순결함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당사자들이 터놓고 논의하기 민감한 부분이었다.

단지, 아드리아나는 결혼 전에 스스로 과거에 연인이 있었다고 밝히고 그의 판단을 기다릴 셈이었다. 아마도 그 시간이 오기까지 수없는 각오를 거듭해야 할 터였다.

‘버클리와의 일만 없었더라면, 나도 발렌틴이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나마 희망을 갖는 한 가지 이유는,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에 대해 ‘알 만큼은 다 알고 있다’고 단언하는 표현을 쓰고 딱히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가 아드리아나의 모든 경험을 알고 있을 리도 없고, 모두 알고 난 후에도 용서해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에게 어디까지 고백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쉐이드는 고민을 공유하던 친구들이 있다고 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렇지 않았으며 누군가와 공유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내가 혼자 알아서 정해서 그분과 상의해야 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아드리아나를 바라보고 있던 쉐이드가, 문득 속삭였다.

“...그런데 말예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던걸요? 동화에서 튀어나온 커플처럼 아름다웠어요. 대체 그 넓은 땅에서 어떻게 두 분이 만나시게 된 건지 신기해요. 테스카에는 사람도 물건도 별별 것들이 다 있다더니, 거기에 가면 저도 제 짝을 만날 수 있을까요?”

꿈에 빠진 소녀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쉐이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미소 짓고서 눈을 감았다.

바깥 세상을 몰랐던 아드리아나에게는 헤밀과 슈하스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테스카는 그 이상이었다. 은행가나 호텔 이시스처럼 이국의 최신 문물이 범람하는 구역이 있는가 하면, 주셉 후작의 성처럼 아이넨의 전통이 남아 있는 예스런 분위기 속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깃털 부채를 팔락이는 숙녀와 제비 꼬리 같은 정장을 한 신사를 만날 수 있는 구역도 있다.

아드리아나는 그 중의 몇몇 구역 밖에 가본 일이 없었지만, 테스카의 유흥가와 광장 마을 두 곳만을 비교해 봐도 그들 간에 얼마나 극명한 생활수준과 문화의 차이가 존재하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가고자 마음 먹으면 어디로든 발을 들일 수 있고, 조금 방심하면 어디로든 빨려들어갈 수 있는 도시. 테스카는 다양한 대륙의 문화와 시간이 섞여 있는 신기한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그런 곳에서 발렌틴이 마침 바로 자신을 찾아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펜에게도 그 말을 했었다. 발렌틴이 자신을 찾아서 청혼한 게 믿기지 않는다고.

-의심을 떨쳐 버리십시오, 오드리 아가씨. 전 웨버 경께서 이 나이를 드시도록 장가를 못 가고 계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생각하면 뭐든 믿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드리아나는 아무려면 어떠냐던 펜의 대답을 떠올리고는 무심결에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

다음 날은 볕이 좋아서, 아드리아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불을 끌고 나와 먼지를 털고 햇빛에 말렸다. 온수는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끓여서 써야 하다보니, 겨울에는 이불 빨래를 자주 하지 못했다. 원래 그런 것인 줄로만 알고 지내던 옛날에는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레버를 돌리고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온수가 펑펑 나오는 욕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이런 부분에서도 아쉬움이 생겼다.

‘돈을 많이 벌어서 여기에도 온수가 나올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테스카에 가서 살게 된다면, 문명의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져 그곳의 젊은이들처럼 방탕하고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할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을 깨우며 흡, 하고 숨을 멈춘 채로 이불을 털었다.

점심 식사 준비가 시작되고 조리 당번 외의 여자들은 욕실에 모여서 내의들을 빨았다. 시시한 수다를 떨며 대야 안의 빨랫감들을 주무르는 동안, 오랜만에 전화벨이 울렸다.

쉐이드가 전화를 받으러 가더니, 잠시 후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여러분, 제가 무슨 전화를 받았게요?”

“글쎄. 누가 쉐이드 양한테 잘생긴 총각을 소개시켜준댔나?”

미네타가 비누칠을 하던 손등으로 콧잔등을 긁으며 말했다.

쉐이드가 눈을 살짝 흘기더니, 아드리아나에게는 제법 잔망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어떡하죠? 오드리 양한테 받으시라고 할걸 제가 괜히 미안해지네요. 어쩜 세상에, ‘오드리 양’ 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미묘하게 달콤해지는 그 음성이라니!”

그녀의 말에 여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꺄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서로를 어깨로 밀어대며 웃어댔다.

“웨버 경이셨어요?”

아드리아나는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러나 잔뜩 뺨을 붉힌 채로 물었다.

“네. 어젯밤에 댁에 잘 도착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미네타 씨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다시 여길 방문하시겠다던데요? 그건 다 그분의 약혼녀를 만나러 오실 핑계일 게 틀림없지만요.”

쉐이드가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자기들끼리 여보 부인 부르며 능청을 떠는 여자들 틈에서 입을 앙다물고 빨랫감을 두드렸다.

“참, 오드리 양 저랑 머리 손질 받으러 가지 않으실래요?”

쉐이드가 말했다.

“머리카락 끝이 너무 가늘어져 있어서 조금만 다듬으시면 훨씬 보기 좋을 것 같아요. 가끔은 전문가의 손길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답니다. 어때요?”

아드리아나는 새삼 외모에 신경 쓰기가 부끄러웠지만, 발렌틴이 매일같이 지나치며 보고 있을 테스카의 세련된 여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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