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첫 눈 =========================================================================
아드리아나는 눈을 껌벅이며 운전석을 바라보고 있다가 작게 딸꾹질을 했다.
그의 집에 간다고?
그는 저녁을 함께 먹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전통적인 예법에 근거하면 식사를 대접할 때에는 외부의 식당이 아닌 자택으로 초대하는 쪽이 훨씬 정중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남자가 그런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자택으로 초대하는 데에는 형식과 절차라는 게 있었다.
즉흥적으로 차에 실어서 집에 가자고 하는 건 넘어가주자고 해도 그걸로 다가 아니었다. 가족들에게는 알리고 나온 걸까? 지금은 해가 일찍 지는 12월의 오후 5시이고 테스카까지는 자동차로도 두어 시간이 걸릴 텐데 무리한 일정이 아닐까?
“...테스카 말이에요, 웨버 경?”
“발렌틴.”
그는 대답 대신에 자기 이름을 다시 가르쳐주었다.
“이름을 불러요, 오드리. 난 아내가 자기 남편을 성으로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내가 웨버 부인이라고 부르면 당신도 어색하지 않겠소?”
“아....”
아드리아나는 얼굴만 붉혔을 뿐, 네, 하고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 관한 많은 상상을 해보았어도 아직은 그의 아내가 된 게 아니었고 머지 않아 웨버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우게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기에도 일렀기 때문이다. 호텔에서의 소동까지 포함해도 이제 겨우 세 번째인 만남이었다.
혼인 적령기를 지난 사람이니 지체없이 일을 진행시키려나 보다라는 생각은 했었다. 생각보다 더 거침없이 끌고 가는 것에는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지만, 맞선 상대라고 쳐도 웬만큼 안전성이 입증된 상대라서인지, 오히려 전처럼 불안한 기분을 들지 않았다.
그가 벌써 말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당신’이라고 부를 때의 느낌이 마치 자기 아내를 부르는 것 같은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는 것도 싫지 않았다. 그에게 그렇게 불리우면서 뺨이 달아오르고 가슴 속을 마구 간질여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당혹스러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왜? 혹시 차를 오래 타는 게 힘들겠소?”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머무적거림의 원인을 찾으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아, 아뇨. 전 괜찮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뵈어도 되는 걸까요? 오늘 막 약... 약혼을 했는데 너무 뻔뻔한 여자로 보이지 않을지....”
약혼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는 말이 목에서 한 번 걸렸다가 나왔다. 곁에 있는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가 되었다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아직 얼굴도 완전히 익혀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곁눈질로 한 번 보더니 전방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 없소. 당신을 불편하게 할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 혹시 내가 원래 투스미아인이라고 말했던가? 가족들은 모두 거기에 있고 나와 여동생만 아이넨에 체류하고 있는데, 여동생은 출가해 있고 내 집에는 지금 일꾼들밖에 없소.”
아드리아나는 그가 말한 이유 때문에 걱정한 게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납득한 것처럼 미소 지어주었다.
그의 국적이나 체류 형태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로레인이 그에 대해 어지간히 잘 알고 있는 듯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발렌틴이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간혹 무례하게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데 그나마 집안 여자의 말을 잘 듣는 인물이니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혼자 마음상해하지 말고 혼꾸멍을 내주라고도 말했었다.
‘혼꾸멍이라니, 이런 분을.’
작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이넨에서 사업을 하며 몇 년을 산 사람이 아직까지 이 정도면 앞으로도 바뀔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이런 사람인대로 좋게 느껴지지 않았더라면,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잠깐 창 밖을 쳐다보고 있다가, 무심한 얼굴로 핸들을 잡고 있는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겠지?’
일꾼‘들’이 있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당연히 요리사도 따로 있을 터였다. 테스카에서는 높은 부동산 가격 때문에 집들이 시골 영지보다 작고 일꾼도 적어서, 꽤 상류층에 속할 걸로 추측되는 소니아의 집에도 상주하는 일꾼은 한두 명 뿐이었지만, 어쩌면 발렌틴은 그보다 더한 부자인지도 몰랐다.
적당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그가 준 반지로만 추측해 보아도 아이넨의 공후작쯤과 견줄 만한 재벌이라고밖에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도시화가 되어 있는 지역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본토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땅에서 그런 부를 쌓는다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웨버 경은 투스미아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별생각 없이 질문을 했다. 즉각 돌아오는 시선에는 그의 심기불편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앗, 이름....’
얼굴을 붉힌 채 눈치만 보고 있으려니, 그가 마지못한 듯 책망하는 시선을 거두었다.
“농사를 지었소.”
멍해졌다가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기분이 상해서 아무렇게나 대답한 건지도 몰랐다.
“왜 웃는 거지?”
그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치만, 너무 안 어울려요. 넥타이를 매신 모습만 봐서 그런지 전혀 상상이 안 돼요. 발렌틴....”
부끄러워하면서도, 끝에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미간을 느슨하게 했다.
“...안 어울려도 어쩔 수 없소. 사실이니까. 로아타르에서 할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거든.”
“정말로 농사를 지으셨어요?”
“음.”
그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농부였으되 적어도 소작농은 아니었을 거라는 결론에 만족해야했다.
‘농부셨어도 좋을 것 같아. 나도 헤밀에서 작은 열매들을 수확하는 건 해봤는데.’
그를 도와서 열매를 수확하는 미래의 한때를 상상하다가 수줍어져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다.
“로아타르에도 곧 데려가겠소.”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나직이 말했다.
“네.”
아드리아나는 그를 향해 웃어보이고 머리를 시트 받침대에 기댔다. 그가 고향에 데려가겠다는 말이 기뻤다. 그가 농사를 지었을 땅도 보고 싶었다. 가족에 대해 숨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마냥 기뻐해서도 안 될 터인데도.
조만간 발렌틴에게는 밝혀야 할 것이다. 가족에 대해, 고향에 대해. 들춰내기 두려운 과거를 드러내버리는 결과가 된다 해도.
‘오늘 말할까. 식을 올리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부러 속였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
멍하니 있다 보면 또 의심이 솟았다. 이것이 정말 현실인가 하고. 어디서 이런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선택했을까. 역시 꿈인 것 같아. 내가 이다지도 이 남자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기쁘게 여기는 것만큼 이상한 일도 없겠지만....
어둠에 묻혀 흐리멍텅해진 차창 밖의 풍경은 아드리아나가 지금 있는 곳을 알아볼 수 없게 했다. 현실에 있는 것인지 꿈 속에 있는 것인지조차 흐릿했다.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눈을 좀 붙여요.”
발렌틴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언젠가 궁금해했던, 히터가 있는 자동차란 정말 대단한 발명감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드리아나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 눈을 감았다.
*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아드리아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발렌틴이 조수석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피곤하오?”
“아, 아니에요. 자버려서 죄송해요.”
속으로 ‘아휴, 주책스러워.’를 연발하며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따뜻한 차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살벌한 추위가 느껴졌다.
“오늘 정말 춥네요.”
창피함이 가시지 않아 조그맣게 말을 걸며 발렌틴을 따라 걸었다.
발치에는 테스카의 길 대부분이 그러하듯 포장된 길이 좁게 이어져 있었고 양 쪽으로는 겨울이라 마른 잔디가 깔려 있었다. 폭신한 흙이 있는 그쪽 길로 걷고 싶었지만, 신발을 더럽히며 걸어도 되는 건 더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저택의 입구를 발견했다. 발렌틴의 집은 소니아 부부의 집과 비슷한 규모의 2층 건물이었다. 집 안에는 듬성듬성 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창문 한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잠시 후에는 현관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와서 마중하고 섰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상주하는 일꾼들은 사실상 가족이나 다름없이 서로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그들의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신붓감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게 잘한 일인지 다시금 회의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나요?”
조금 겁 먹은 목소리로 묻자, 한 발짝 앞서서 걷던 발렌틴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만 돌아가려고?”
희미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의 질문이 적절치 않기도 했고, 아드리아나는 긴장 때문에 입만 벙긋거려야 했다.
발렌틴이 가만히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서 아드리아나의 두꺼운 코트 위로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마치 늘 그래왔던 듯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아드리아나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건가?”
그의 말투에 아주 조금이나마 무심함 대신 다정함이 묻어났다. 아드리아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긴장을 잘 해서....”
“만약 당신이 가족들하고 살았더라면 당신 집에 가자고 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여기로 오자고 했소. 처음부터 식당 같은 곳에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어. 여긴 이제 당신 집이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그치만... 우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 걸요.”
아드리아나 웃었다. 그가 마음대로 말을 놓고 자기 아내 취급을 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똑같이 그를 남편 취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긴 한데.”
잠시 후 발렌틴이 순순히 수긍하며 의기소침해졌다. 아드리아나가 그를 보고 또 웃자, 그도 표정이 풀어져서는 아드리아나의 코트 위로 손목을 잡았다.
“들어가지.”
“네.”
그를 따라 현관을 향해 걸었다.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해갔다. 그는 보호소에 있던 루이와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사람으로, 집안인데도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있었다. 리노아스에 있던 집사장과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긴장한 아드리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미소를 띤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웨버 경.”
“안녕하세요.”
아드리아나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리노아스에 살 때는 집안을 드나들 때마다 이보다 많은 하인들이 절을 했었지만 이제는 이런 대접이 너무도 쑥스럽게 느껴졌다. 괜히 발렌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현관 안으로 들어가며 누군가를 찾는 듯 안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내 어디선가 계단을 내려오는 듯한 심상치 않은 발소리가 들렸다.
“웨버 경.”
그는 발렌틴을 부르며 순식간에 현관까지 당도했다. 얼굴이 보이자, 아드리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작게 탄성을 지르며, 자신 앞에 있는 발렌틴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덩치가 큰 남자는 아드리아나의 놀란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듯, 발렌틴에게 붙잡혀 있는 손목만을 내려다 보며 두려움 가득한 기색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웨버 경. 정말로 납치해오신 건....”
“말 같은 소릴 하게.”
발렌틴은 남자의 말에 일갈하고 아드리아나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아드리아나가 남자를 계속 흘끔거리자 그가 비로소 아드리아나의 존재를 깨닫기라도 한 듯 웃음기를 떠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발렌틴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펜. 그의 이름이오. 내 노예니까 편하게 대해줘.”
“노, 노예요?”
아드리아나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렌틴에게 끌려가다시피 식당으로 따라가는 동안, 그가 겸연쩍게 입맛을 다시며 뒤를 따라왔다.
식당 안에서는 요리사 둘이서 저녁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두 명의 자리만 세팅되어 있었다. 펜의 반응을 봐서는 그가 즉흥적으로 아드리아나를 초대한 거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침착한 것이나 척척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또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발렌틴은 일꾼들을 간단히 소개해주고나서 아드리아나를 식탁 앞에 앉혔다.
곧 리노아스에서와 같은 만찬이 차려졌다. 생활수준이 비슷해 보이는 소니아네서도 이 정도로 차려놓고 먹지 않는 듯했다. 그 집에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드리아나는 테스카에서도 모두 이렇게 성대하게 식사하는 줄로 오해했을 터였다.
“...제가 올 거라고 아셨던 건가요?”
조그맣게 물어보자, 발렌틴이 정리를 하고 나가는 요리사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런 건 아니고, 저들의 염원이었소.”
발렌틴이 그들에게 시달린 일이라도 생각난 듯 손가락으로 가볍게 이마를 문지르고는 물을 마셨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만들며 웃었다.
그의 일꾼들이 아드리아나를 기다려주었다는 말에, 이후 발렌틴이 감흥 없는 얼굴로 정해진 의무를 이행하듯 열심히 먹고 마시다가 아드리아나의 잔이 비었는지 확인하고 채워주는 것에, 익힌 고기 요리에 들어 있던 커다란 파인애플 조각을 접시에 더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입술을 끌어올리는 그 모습에, 긴장 대신 다른 설렘이 마음을 차지했다.
“전부 맛있네요. 이렇게 먹어보는 건 정말 얼마만인지....”
아드리아나는 옛날 생각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발렌틴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아차 싶어져서 미소를 거두었다.
만일 그가 얼마만인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곤란해졌다.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그가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입에 대고 있던 샴페인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시간을 벌려는 듯 그렇게 한 후 입을 열었다.
“리노아스예요.”
미네타는 코니스라고 말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했었다. 아드리아나도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해서 고향을 떠난 이후 줄곧 자신의 고향이 코니스의 어디라고, 외가의 영지 이름을 대왔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약혼자였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성을 물으면, 그것조차 밝힐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리노아스는 테스카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영지이고, 클로제라는 성은 아이넨의 어디에서나 흔했다.
발렌틴이 그의 깍지 낀 손을 매만지며 아드리아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클로제 남작의 영지 말이군.”
아드리아나는 포크를 놓칠 뻔했다. 순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발렌틴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별 의도가 없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웠던 말투 역시 이상한 점이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가슴을 들먹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뺨이 타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무릎 위로 내렸다.
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었다. 도망쳐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막다른 골목에 갇힌 기분이었다. 발렌틴이 시골 영지의 남작의 이름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드리아나가 아버지의 사교를 위해 인사를 했던 일이 극히 드물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당신이 집안에 대해 얘기하기 싫어한다고 들었어.”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내게도 숨기고 싶은 가족 한두 명쯤은 있어. 언젠가는 소개를 해야겠지만 미룰 수 있을 때까지는 미루고 싶은 심정이랄까. 당신과 만나게 했다가는 당신이 질색하고 도망갈지도 몰라서 보여줘야 하나 아직도 고민이 돼.”
그가 와인이 든 잔을 살짝 돌렸다.
“아무튼 당신을 괴롭히지는 못 하게 할 테니까... 내 가족이 좀 이상하다고 해서 나를 두고 도망치지는 마. 미리 말하는 거야.”
아드리아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겨우 웃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하고 자신이 웃을 수 있다는 게 왠지 마음 아팠다.
“...그리고 나중에, 당신도 말하고 싶어지면 얘기해줘.”
아드리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야 할 타이밍을 고민하고 있을 뿐, 밝히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발렌틴이 어중간한 책임감으로 자신을 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에게 용서받아야 할 부분마저 털어놓아야 하게 될지도 몰랐지만, 그것이 두려워서 도망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을 두고 도망치게 되면 그때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
“저...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두 사람은 식탁을 치우도록 자리를 비켜주고 거실 발코니로 나가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가로등으로 밝혀진 후원 풍경이 썩 마음에 들어, 아드리아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밖을 구경하자고 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사실 진즉부터 그랬다.
“피곤한가?”
발렌틴이 난간 위에 팔을 기댄 채로 물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만 잘까?”
아드리아나는 다시 웃고 말았다. 어쩐지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 작품 후기 ============================
그만 불 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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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자님들은 어쩜 벌써 엉큼한 생각을 하시는지'///'
하루 늦을 수도 있고 내일 올 수도 있어요. 평안한 밤 되세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