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41화 (41/140)

00041  첫 눈  =========================================================================

“잘 지내셨소?”

흔하게 듣는 그 짧은 인사말에도 아드리아나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그가 안부를 궁금해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찡해졌다.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데에 몰두하느라 미소 짓는 것조차 잘 되지 않았지만, 호의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애써 입술을 가로로 당기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남자의 말투와 표정은 내내 고요하기만 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잘 알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

“웨버 경께서도 로레인 수녀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용기를 내서 물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밝은 투로 들렸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이제는 심장이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경솔한 생각이라고 자각하면서도 당장 청혼에 대한 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럼, 저는 나중에 와도 되니 말씀 나누고 가십시오.”

돌연 그가 말했다. 그러더니 과자점에 왔다가 떠나갔던 때처럼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아드리아나는 곁을 그냥 지나쳐 가는 그를 보고 당황했다.

“아, 저....”

그의 귀에까지 닿을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남자를 붙잡은 것은 아드리아나의 뒤에서 터져나온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어! 웨버 경 어디가요!”

로레인이었다. 그녀는 건물에서 나와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그새를 못 참고 가 버리려는 거예요? 뭐 바쁜 일 있어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수녀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시니 어서 가보십시오.”

“오잉?”

로레인이 아드리아나를 돌아보고 있는 사이에, 남자는 교회 입구에 서 있던 차 운전석 안에 몸을 싣고 금방 시동을 걸었다.

“아... 안녕하세요, 로레인 수녀님.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저 때문에 가 버리신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로레인의 눈빛에 두려움의 기색이 스쳤다.

“그게...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드리아나가 청하자, 로레인은 자동차가 떠나간 길을 흘끗 흘끗 뒤돌아 보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아드리아나는 따뜻했던 차가 미지근해질 때까지도 망설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사실부터 자신의 생각까지. 그를 향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전부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로레인의 표정을 봐서는 자신의 솔직한 의사가 어느 쪽인지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발렌틴은 각 영지에서 발행한 오늘자 신문들 중에서 가장 두꺼운 수도의 소식부터 집어들었다. 수도의 소식이라고 특별히 테스카의 것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닌데 두께는 거의 두 배쯤 되었다. 지방분권화가 뚜렷하고 영주들의 기가 센 아이넨이다보니 왕실은 별 쓰잘데기 없는 데에서도 자존심을 내세웠다.

매일 8부나 되는 신문들을 소화하는 것이 하루의 첫 일과였다. 그 일을 이렇게 해가 넘어간 저녁 시간까지 미루는 일은 드물었다. 오늘 아침에는 도저히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신문을 내려놔야 했다.

“글자가 보이십니까? 좀 쉬시지요.”

펜이 자못 부드럽게 말했다.

발렌틴은 아직 시력 감퇴가 일어날 만큼 나이를 먹지는 않았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펜이 요즘 유난히 나이 얘기를 자주 들먹이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상태가 발렌틴 본인보다 울적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것도 없는데 쉬기는.... 잘 때가 다 되어가니 이미 많이 늦었네.”

“그래도....”

펜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는 발렌틴에게서 슈하스에서의 일에 대해 들은 후부터 아주 다정해져서 한마디 잔소리도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로레인 아가씨께서 잘 말씀해주셨을지도 모릅니다. 당사자가 직접 반지를 건네는 행위가 우리 고향에서 무례한 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만 알아도, 마음이 상냥하고 너그러운 여성이라면 이해해 주리라고 전 생각합니다. 가문의 사람을 보내서 다시 정식으로 혼담을 넣으시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조금 우스워서, 발렌틴은 무심코 코웃음 치는 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조그만 여자 하나 잡아와서 사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웨버 경.”

펜이 인상을 찌푸렸다.

발렌틴이 농담이라는 뜻으로 미소 지어 보였지만, 그는 울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날, 혼담을 넣기 전에 로레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슈하스를 찾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심부름으로 과자점에 들렀다. ‘제발 무사히 빵만 사오십시오.’라는 펜의 말에는 명심하겠다고 대답도 했다.

하지만 여자의 발그레해진 뺨과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보니 이성이 머릿속을 탈출하려 했다. 빵과 과자를 담아주고 돈을 받는 그녀를 쳐다만 보다가, 발렌틴은 서둘러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지금이라도 해치우고 싶었다. 당장 그녀를 안고, 뜨거워져 있을 뺨을 손과 입술로 식혀주고, 작고 붉은 그 입술을 열어서 안쪽까지도 열기로 가득 차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을 구속할 반지와 테스카의 자택까지 그녀를 실어나를 차도 바로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저주 받을 거인놈들의 피라고 한탄하면서도, 발렌틴은 도로 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왜인지 점원용 테이블을 빠져 나와 있었다. 발렌틴은 그녀가 내밀고 있는 작은 손 위에다 덥석 반지를 올려놓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작은 머리통을 붙잡고 성급하게 내 여자라고 입술 도장을 찍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걸 상상 밖에서 실행하는 일이야말로 무식하고 답 없는 거인 놈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그 이상 신사적일 수가 없었는데.”

자평하는 말을 중얼거리자, 펜이 눈썹을 움찔했다.

“일단 조금 기다려보십시오. 아무래도 본가에 연락을 취하는 게-.”

펜이 말을 끝맺기도 전, 2층에서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음량을 늘려놓았을 리도 없건만, 화가 난 듯 쨍쨍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발렌틴은 미간을 좁힌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거기가 이 나라의 예의도 모르는 무지한 외국인이 산다는 그 댁인가요?”

로레인의 힐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렌틴은 벽에 등을 기대며 수화기를 쥔 손을 바꿔들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너한테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그럼 기다려야지! 10년을 기다렸는데 잠깐을 못 기다렸어?”

로레인은 발렌틴이 얼마나 무례하고 경우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인지 상기시켜준 후에야 자신에게 볼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발렌틴은 그저 여자가 찾아가서 로레인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를 되물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그저 떨며 긴장하고만 있었기에, 실은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었던 건지 얼마나 마음을 상했는지 신경이 쓰였다.

“몰라. 대답 안 했는데.”

예상하던 답이 아니어서 반문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로레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드리 양은 웨버 경이 나중에 대답을 들으러 오기로 했다던데요? 남편감을 정하는 일을 겨우 이틀 가지고 어떻게 결정하겠어요.”

“...그래?”

당장 거절은 하지 않았다는 건가. 발렌틴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멍해졌다. 아무래도 주변인들의 반응을 봐서는, 그녀가 ‘뭐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 다 있느냐’고 성을 내며 로레인을 찾아가 거절하고 오는 게 당연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웨버 경, 내가 오드리 양한테 말도 잘 해줬어요. 우리 고향에서는 남자가 확 반해서 여자 손을 덥석 잡고 프로포즈하는 게 아주 훈훈한 로맨스로 여겨진다고. 어른들을 통해서 혼담을 넣으면 용기 없는 남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여자도 많다는 것도 얘기해줬죠.”

로레인은 빚을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애교를 섞어가며 말했다. 발렌틴은 자신을 거절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여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정신을 팔았다.

처음에는 발렌틴도 직접 찾아갔다는 점이 큰 실책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중매라는 중매는 들어보지도 않고 마다했다는 여자다. 게다가 발렌틴에게 있어서 그녀는 ‘잘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몇 가지 힌트만 주면 그녀 또한 발렌틴을 낯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게 될 터였다.

몇 년 전 산속에서 당신을 구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나라고, 또한 그날 테스카의 호텔에서 당신을....

‘아니, 뒤의 것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군. 첫 번째 것도 그렇지. 그런 말을 뭐하러 해.’

낯선 사람이 아니라고 알리고 싶은 한편, 막상 말을 하려니 그것대로 곤란하다. 그녀가 적당히 눈치채주면 좋으련만, 무섭게 생기지도 않은 자신을 보고 벌벌 떨기만 하는 게 안타까웠다.

발렌틴은 로레인과 전화를 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녀가 단번에 승낙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고문의 시작인 것이다. 언제든지 그녀가 다시 로레인을 찾아가 심사숙고한 결과를 알릴 수 있으니.

***

아드리아나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을 나서서 과자점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해가 비치지 않았던 데다, 바람이 너무 시린 탓에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출퇴근하기 힘들지 않나?”

오토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물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선반 위에 있던 담요를 내려주었다.

“자전거를 못 탈 정도인 날은 별로 많지 않은걸요. 길어야 몇 주 가겠죠.”

“음. 풍경이 울리는지 들으면서 조리실에서 쉬지.”

“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아드리아나는 오토를 배웅하고서 테이블 앞에 앉아 담요를 걸쳤다. 오토의 말대로 오븐이 있는 조리실에서 쉬는 게 훨씬 따뜻할 테지만, 오늘은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있고 싶었다. 먹음직스러운 빵과 과자가 잘 보이도록 돈을 들여서 유리로 바꾸어놓은 벽면을 통해, 아드리아나는 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언제쯤 오실까.’

그가 약속했던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어젯밤에는 잠도 설쳤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곧 그와 다시 만나서 새로운 약속을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며칠 전에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짐작이 맞다면 그는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가 아니었고, 예의범절을 모르는 무례한 남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관대함으로 작은 호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의 좋은 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가게 문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풍경이 울릴 때마다, 아드리아나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시계가 오후 3시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의 고동이 높아졌다.

‘오늘은 조금 늦게 오시려나.’

지난번에는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 그가 가게에 왔었다. 지금은 3시 10분이었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계바늘은 기다려주지 않고 움직여서 어느덧 4시를 가리켰다. 아드리아나는 4시 30분에 퇴근할 예정이었다. 문득, 이런 일정을 그도 알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퇴근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옴에 따라, 아드리아나는 앉지도 못하고 서서 가게 안을 우왕좌왕 배회했다. 손님은 계속 오가고 있었지만, 온종일 기다리고 있던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 걸까? 설마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

아드리아나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가능성, 약속을 잊어버렸을 가능성, 심지어 마음을 돌이키고 변심했을 가능성까지 생각했다. 시계가 4시 30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때에는, 어쨌든 그 중 한 가지가 답이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10분을 더 기다렸다. 마음은 20분이든 30분이든 그보다 더 긴 시간이라도 기다리고 싶었다. 그에게서 기다려달라는 전화 한 통이라도 왔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10분인지 한 시간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기다리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두 사람의 마음 안에서 각자 정해져 있고 그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상황도 대비해둬야 했다. 아드리아나는 그를 잊어야 할지도 몰랐다.

앞치마를 벗어서 개어놓고 두꺼운 겨울 코트를 걸쳤다. 조금 전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추위가 몸을 뻣뻣하게 굳게 했다. 가게 안은 벌써 다 정리둔 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몇 개 남은 과자들을 가방 안에 챙기고서 테이블 위에 있던 열쇠를 집어들었다.

조금 꿈지럭대고 있는 사이에 문이 열리는 건 아닐까, 몇 분만 더 기다리면 그가 들어오는 게 아닐까, 가게 불을 끈 후에도 잠시 그 옆에 서 있다가 하릴없이 몸을 돌렸다.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바로 어디선가 자동차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조금 떨어진 길의 빈터 골목 앞에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운전석에서 돌아나온 남자가 아드리아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머릿속이 정신 없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그맣게 묻자 그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했다.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소만.”

“네. 그렇지만....”

“언제 끝나시는지 몰라 조금 기다렸소. 저번에는 방해를 해서 미안했소.”

“아....”

아드리아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그가 열쇠 쥔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얼른 가게 문을 잠갔다.

“오드리 양, 오늘 일정이 더 남은 게 아니라면,”

남자가 뒤에서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저녁을 같이 먹고 싶소.”

아드리아나는 열쇠를 가방에 넣으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내 대답을 예상하고 있는 걸까. 그것과 상관 없이 묻고 있는 걸까. 물론 헛되이 추측하고 재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는 부질없는 감정 소모가 될 뿐이다.

“좋아요. 이제 들어가서 쉬려던 참이에요.”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가서 리무진의 조수석에 탔다. 안전벨트를 매고나서 그를 쳐다보며 미소 짓자, 어딘지 살짝 언짢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거두며 핸들을 돌렸다.

“잘 지내셨나요?”

그가 했던 것처럼 안부를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 편하지는 않았소.”

아드리아나는 왠지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농담을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솔직했던 것 뿐인 말에 자신이 웃어버린 것 같아서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과 태도가 너무 달랐다. 호감이 있는 여자 앞에서 웃어주지도 않는 남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러고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만 했지 호감이 있다는 말을 들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아드리아나에게 잘 보여야 할 입장임은 분명한데도.

‘창피해.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들뜨고 좋아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이 사람이....’

답답하게 이어졌던 어색한 침묵은, 차가 시내를 벗어났을 때에야 풀어졌다.

“미안하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소. 나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당신을 생각해왔던 터라 옆에 있으면 떠오르는 건 너무 많은데, 입을 열었다가 실수라도 해서 울릴까 두렵소.”

그러고 나서 또 침묵이 이어졌다. 그는 그가 설명한 이유로, 아드리아나는 아드리아나대로 방금 들은 말을 생각하며 두근대느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제 방에 오셨어요. 그렇죠?”

얼굴은 보지 못했어도 그가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 상당히 흐려져 있는 기억이었지만, 테스카에서 접점이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보니 로빈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를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웨버 경이셨어요?”

그는 떨떠름해하는 표정으로 앞만 쳐다보다가 슬쩍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아나가 반가움과 신기함에 작게 소리 내서 웃자,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기억력이 그리 대단하실 줄은 몰랐소. 난 어제 일도 잘 잊어버리는 편이라.”

어색했던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미소만 새어 나왔다. 아드리아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끌어안고 배시시 웃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케이크랑 샴페인이 정말 맛있어요.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누워 지내느라 경황이 없었어요.”

뒷부분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고 후회하면서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는 느리게 차 앞을 건너가는 짐 마차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답을 먼저 들어도 되겠소?”

이내 그가 운전대를 놓고 조수석을 향해 몸을 약간 돌렸다.

아드리아나는 마르기 시작하는 입술을 적셨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일인데도 망설여졌다. 좋아요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생각 없이 가벼운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 결혼할게요 라고 말하자니 결혼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새삼스럽고 거창하게 들려서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내 아내가 되겠다는 뜻인가?”

그가 대신 말로 확인해주었다. 다소 조급하게 튀어나온 그의 말투에, 아드리아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배워야 할 게 아주 많아요. 부족한 게 너무나 많아서 걱정이 되지만, 괜찮으시다면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배울게요.”

내심 여러가지를 걱정하며 쭈뼛대자, 그가 확고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소. 난 당신이 내 마음에 드는 아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 역시도....”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다가 문득 차의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어를 넣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천히 얘기하지. 일단 서둘러서 집으로 가야겠소. 저녁이 너무 늦어지면 당신 배가 고플 테니.”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삐걱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집이요...?”

차가 슈하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길을 보며 대답했다.

“내 집.”

============================ 작품 후기 ============================

이제부터 우리 집(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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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 고맙습니다. 하악.. 평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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