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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39화 (39/140)

00039  첫 눈  =========================================================================

아드리아나는 남자가 불러준 마차 안에 몸을 싣고 벽에다 머리를 기댔다.

꿈이라면 좋으련만. 만약 이것이 깨어날 수 있는 꿈이라면, 비단 오늘 일뿐만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까지 되돌아가서 깨어나고 싶었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낯선 사람이 보석과 지갑이 든 가방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또 다른 낯선 사람이 차비를 주고 갔다.

돌이켜 보면 지난 삶이 언제나 그랬다. 몇 번이나 끝이다 싶은 절망의 순간이 찾아오고, 그 뒤에는 한 가닥 희망이 나타나서 어떻게든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었다. 다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듯 여겨졌다. 리노아스에서 헤밀로, 헤밀에서 슈하스로, 그리고 이곳 테스카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전부 그러했다.

아드리아나는 손에 쥐고 있던 지폐들을 내려다보았다.

낯선 투스미아인이 주고 간 돈은 마차로 테스카 안을 전부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액수였다. 아드리아나가 가까이에 산다는 것을 몰라서 잔뜩 던져주고 간 것이리라. 마차 삯을 내고 남은 돈으로는 내일의 식재료도 살 수 있을 듯했다. 그러고 나서 월요일이 되면 은행에 맡긴 돈을 찾으면 된다. 남자의 말대로 다시 기부할 몫을 포함해서.

가시지 않은 충격을 가슴속에서 몰아내보려 깊이 숨을 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곧 집에 도착해서 내려야 했기에, 밀려드는 피로함을 참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 했다.

*

“헤밀? 거긴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곳인가요?”

소니아에게 가을의 계획에 대해 알리자, 그녀가 눈을 껌벅거리며 물어왔다. 테스카에서 모르는 장소, 모르는 학부모가 없다고 자부하는 그녀라도 외부 영지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모양이었다.

“헤밀은 슈하스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에요. 마차로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아요.”

“슈하스...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소니아가 기억을 쥐어짜 내려 애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드리아나가 답을 일러줬다.

“우아즈 다음 다음에 있는 곳이에요.”

“아! 우아즈라면 알죠. 나 거기 가본 적도 있어요. 오드리 선생님, 거기까지 가시는 거예요? 서운해요. 이제 여기까지 놀러 오시려면 큰일이네요.”

“그래도 형편이 되면 올게요. 크리스마스 때는 꼭 올 거예요. 저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일하느라고 장식 나무를 보러 못 갔거든요.”

“어머, 그랬어요? 꼭 와요. 우리 집에도 초대할게요. 저 요즘 요리도 다시 배우고 있는데 맛 보여드릴게요.”

소니아가 말하며 의기양양하게 눈을 빛냈다. 아드리아나는 물론 그녀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었다. 건강에 좋다는 재료들을 조합해서 영양가만은 풍부할 듯한, 실험적인 맛의 요리였다.

“그런데 혹시 결혼하시러 가는 거예요? 꼭꼭 감춰놓은 약혼자분이랑?”

소니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영문을 몰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전에 다 들었어요. 교회의 부인 한 분이 그러시던데요? 괜찮은 총각을 소개시켜주려고 물었더니 오드리 선생님이 고향에 약혼자가 있다고 하셨다고.”

“아....”

필시 언젠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맞선 권유를 듣는 것이 불편해서 대충 둘러댔던 말이 교회에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전에 헤밀에서 지내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 시설이 폐쇄되어서 떠나왔다가, 이번에 다시 생긴다고 해서 돌아가려는 거예요.”

“그렇구나. 그럼 약혼자분은 어떻게 해요? 돌아오라고 닦달하지 않아요? 이렇게 예쁜 피앙세가 있으면 옆구리에다 꼭 붙여놓고 싶을 텐데.”

아드리아나는 지금껏 부득이하게 여러 부인들을 속여온 꼴이었지만, 소니아를 속이는 것만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에 자백했다.

“실은 저 약혼한 사람 없어요. 그냥 사람들에게 그런 관심을 받는 게 싫어서....”

그러자 소니아는 소문을 철석 같이 믿고 있었던지 실컷 과장된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왜요? 설마 독신주의예요?”

“특별히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아직 내키지가 않는달지....”

아드리아나는 혼기가 찬 나이에 어린 소녀들이나 할 법한 핑계를 대는 것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겸연쩍었다. 소니아가 가정 내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도 적극 화목한 가정을 이루길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부끄러웠다.

그러나 소니아는 뜻밖에도 다정한 투로 옹호해주었다.

“하긴.... 본인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낯선 곳에 와서까지 채근당하면 싫죠. 저도 프란체를 만나고 눈에 확 씌어서 금방 결혼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제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녀는 잠시 조용히 회상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치켜뜨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나중에라도 관심 있으시면 중매를 해 드리려고 했는데 헤밀로 가버리시면 소용없겠네요. 여기서 결혼하고 사시면 우리 더 자주 만나고 친해질 수 있었을 텐데. 아잉, 서운해.”

소니아의 그 말에는 조금 혹하기도 했다.

테스카를 떠나면 그녀가 많이 그리워질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결혼해서 살게 되면 그녀의 말처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비록 지금은 서로 사는 환경과 생활수준의 차이가 심해서 아드리아나 스스로 그녀와는 어느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적어도 소니아 본인은 아드리아나에게 선을 긋지 않고 잘 대해주었다.

“크리스마스 때는 놀러올게요. 그때쯤이면 헤이즐의 동생도 볼 수 있겠죠?”

“갓 태어나서 응애 응애하고 있을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소니아와 똑 닮은 딸 헤이즐의 다정하고 애교스러운 얼굴을 생각하며 웃었다.

돌아올 겨울, 테스카 광장의 장식 나무를 보기로 자신에게 했던 약속 위에다 이렇게 소니아와의 약속을 더했다.

그동안 지내왔던 마을을 떠나올 때에는 늘 도망치듯이 나오게 됐었지만, 그럼에도 각각 두고 온 미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번 테스카에서는 도망치거나 쫓겨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언제든 찾아와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보석을 잃어버린 일은 뼈아픈 사건이었지만, 노아를 잃었던 때만큼은 아니어서 극복하기도 그보다는 쉬울 듯했다. 치안대에서는 보석이 처분되기 전에 찾아내지 못하면 어려울 거라고 했다. 범인들은 보석을 숨겨뒀다가 시간을 두고 처분할 가능성이 높고, 그 후에 일반에서 발견하게 된다 해도 소유권을 두고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차라리 보석을 아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혹시나 언젠가 다시 돌아와 주지 않을까, 부질없는 기다림으로 고통 받는 일에는 진저리가 났다.

‘그나저나 내가 이사를 가버려서 제시카가 날 못 찾으면 어떻게 하지?’

이 역시 덧없는 기다림일까. 아드리아나는 곧 다시 만날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떠났던 제시카를 생각했다. 그녀와 재회하고, 쪽지에 남겨주었던 그녀의 애칭으로 불러줄 그 순간을 상상했다.

‘보석까지 잃어버렸다고 하면 얼마나 한심하다고 할지.’

하지만 조심할 수 있는 건 다 조심했는데, 하고 아드리아나는 곁에 있지도 않은 제시카에게 속으로 변명을 했다.

가을까지 넉넉한 시간을 갖고 계획을 세워서 하나하나 천천히 정리했다. 몇 달이나마 은행에 모아왔던 돈은 새로운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원래 보석을 팔아 쓰려던 일에 사용했다. 턱없이 줄어둔 자금이었지만, 나름대로 살뜰하게 나누어 쓸 수 있었다.

로레인이 요즘 열심히 기도한다는 일에 후원금을 보내고, 소니아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곡들의 레코드를, 웬디에게는 입학식 때 입을 수 있도록 어른스러워 보이는 가을 코트와 새 신발과 예쁜 털모자가 달린 겨울 코트까지 한 벌을 사주었다.

웬디는 선물들을 받으며, 아드리아나가 이제 못 볼 것처럼 군다고 삐죽삐죽 울었다.

“울지 마. 웬디는 주말에도 기숙사에서 그림을 배우기로 했다며? 나 자주 놀러올 거지만, 웬디가 너무 바빠서 보기 힘들까 봐 미리 사주는 거란 말이야. 나중에 웬디가 졸업하면 또 나랑 같이 살아주면 되잖아.”

“힝. 오드리... 그때까지도 노처녀로 살 거야?”

웬디가 코를 훌쩍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노처녀 아니야.”

코를 쥐어주자, 웬디는 이번에는 코맹맹이 소리로 울었다.

테스카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아드리아나는 소니아 부부의 차를 타고 함께 웬디의 새로운 학교에 갔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돌아와, 테스카의 방을 비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테스카는 아드리아나의 마음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헤밀에 있던 때부터 그토록 동경하며 와보고 싶어했던 도시였다.

‘그러고 보니 정작 보고 싶어 했던 나무랑 바닷가는 별로 구경하지도 못했네.’

바보 같이 허둥대면서도 나름 열심히 일하며 지냈던 나날을 뒤로 하고 아드리아나는 헤밀로 가는 마차를 탔다.

가을의 향기로 물든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을 남녀가 섞인,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 골목마저 멀찍이에서 바라보니 그저 도시가 품고 있는 일부로서 애처롭게 보였다.

멀리 해안이 보이는 도로로 나오자, 이윽고 건물들 사이로 솟은 이시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그때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까, 신입 직원은 듬직한 일꾼이 되었을까, 친절했던 여성 직원과 거인 같았던 총지배인은... 방 열쇠를 잘못 받아서 아드리아나가 자고 있던 침대에 들었다가 곤혹을 치렀던 그 남성은...

코끝에 와 닿고 있던 바다의 냄새가 차차 멀어졌다.

이번 이별은 이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두려워하고 또 사랑했던 도시의 끝을 벗어난 후 아드리아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수중에 유일하게 남은 리노아스의 물건인 다이아몬드 반지와, 힘내라는 말이 적힌 제시카의 쪽지가 든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헤밀 편 - 첫 눈

“저 다녀올게요, 미네타.”

“오드리 지금 나가는 거야? 잘 다녀와.”

아드리아나는 마당 한쪽에 가지런히 늘어선 자전거들 중에 제일 눈에 띄는 자신의 새 자전거를 꺼내서 입구까지 끌고 갔다. 건물 공사를 하느라 보호소의 직원들이며 인부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울타리 밖까지 온통 번잡스러웠다.

자전거를 타고 완만한 비탈길을 내려가, 슈하스로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얼마 안 있으면 겨울옷을 꺼내서 꽁꽁 무장하고서 자전거를 타야 할 터였다.

아드리아나는 헤밀에 와서 두 달째 ‘오토와 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일을 하러 나가고 그밖에도 가게에서 요청할 때 더 출근하는 일이 있었다. 보호소는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이어서 공사와 준비 작업밖에 할 일이 없었는데, 여자 일꾼은 굳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거절당해서 나름대로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여자들 중에서도 남자 못지않은 체력을 자랑하는 미네타와 데비 부인은 도움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르본에서 온 여자 직원 한 명과 아드리아나는 기존에 사용하던 건물을 청소하고 꾸미는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탈진해 쓰러지기 일쑤였다.

예전보다는 훨씬 노동에 익숙해졌고 체력도 좋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평생을 노력한들 미네타의 체력과 어깨를 견주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토 씨.”

과자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커다란 상체를 내밀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오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바람이 꽤 추워졌어요. 올해는 눈이 많이 올까요?”

“헤밀은 눈이 별로 안 오지. 눈사람 빵을 만들고 싶은데.”

오토가 근엄한 얼굴로 까만 수염을 실룩이며 말했다. 눈이 내려야만 눈사람 빵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아드리아나는 속으로 웃으며 오토에게서 앞치마를 건네받았다.

“오늘은 초코빵을 늦게 만들어서 아직 다 안 식었네.”

오토가 철판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잊지 말고 있다가 빵이 식으면 판매용 바구니에 채워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알겠어요. 가게 잘 보고 있을게요.”

“음.”

오토가 다시금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가게를 나갔다. 점원용 테이블로 들어가자 한쪽에 깨끗하게 포장되어 놓인 샐러드와 샌드위치가 보였다. 샐러드 중앙에 예쁘게 올려놓은 베리류 열매들과 화려한 샌드위치 속을 보아하니 슈의 솜씨인 듯했다.

“잘 먹겠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아침 식사를 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노라면 금세 식욕이 생겼다. 아드리아나는 점심까지 기다리지 않고 샐러드를 덮은 종이 포장을 뜯었다.

‘오토와 슈’의 직원이 되면 급여 외에도 이런 맛있는 특혜가 같이 주어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꽤 높다는 소문이 있었다. 운 좋게 아드리아나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헤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마침 가게 문 앞에다 직원을 구한다는 종이를 붙이고 있던 슈를 발견하고서 자리를 선점한 덕이었다.

또 한 가지, 노아의 결혼소식이 크게 알려진 덕분에 누구도 아드리아나의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점도 다행이었다.

만약에 누군가에게서 ‘왜 그때 그 청년이랑은 같이 안 와?’라든지 하는 말을 듣게 된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해질 것 같았다.

이렇게 새로운 시간으로, 새로운 추억으로 덮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헤밀이나 슈하스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노아가 아닌 새로 생긴 다른 추억을 생각할 수 있게 되리라.

아드리아나는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틈틈이 편지를 썼다. 웬디에게, 소니아에게, 에바에게, 그리고 카리나와 어머니에게도. 그 일부는 퇴근할 때 우편함에 넣을 것이고, 일부는 아드리아나의 방에 쌓이게 될 것이다.

예쁜 편지지를 보면, 옛 연인이 귀여운 편지지를 받고 행복하게 웃어주던 때를 떠올리고 마는 자신도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초조해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미칠 것처럼 괴로워지는 순간은 없어졌다. 언제 갑자기 또 되살아나지 않을까 무서워하면서도 이대로 완전히 낫게 될 거라고 기대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12월이 되자 보호소의 새 건물들이 거의 완성된 형태를 드러냈다. 솜씨 좋은 일꾼들이 동산 위의 풍경을 해치지 않는 고즈넉한 분위기로도 제법 편리한 시설들을 만들어주었다.

“이 정도 1층짜리 건물이야 간단하죠. 우린 백작님의 성도 지어봤는 걸요.”

일꾼의 우두머리인  남자가 코 밑에 묻은 거뭇한 먼지를 슥 닦으며 자랑스레 말하고는 했다.

아드리아나는 기쁜 일들이 생길 때마다 희망에 부풀었다가 또 잃게 되는 게 아닐까 가슴을 졸였다. 더는 헤매지 않고 정착해서 평온한 삶을 갖게 해달라고, 졸라서 될 일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어, 오드리 양.”

교회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 아드리아나를 발견하고 로레인이 미간을 좁혔다.

“이런 시간에 교회에는 웬일로....”

로레인의 눈동자가 의문으로 덜덜 흔들리는 듯 보였다. 영지민이 예배 시간에 교회에 와서 좀 앉아 있다고 해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아드리아나는 창피해서 주변을 흘끔거렸다.

“그냥 오늘은 와보고 싶었어요. 아무나 와도 된다고 하셔서....”

“그야 어쩔 수 없죠. 여긴 문을 항상 열어둬야 하니까. 휴.”

로레인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기왕 온 김에 오랜만에 차나 같이 마셔달라고 붙들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녀에게 보석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난당했을 때부터 잃어버렸을 수 있을 물건을 애써 지켜주었던 로레인을 실망시키기 싫었다.

“오드리 양은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계시네요. 웬디 일도 그렇고, 아직 여성이 혼자서 앞가림하기는 어려운 세상인데 말이에요.”

“그런가요? 아직도 어수룩하고 실수만 하는 것 같아요.”

수줍어하며 미소 짓자, 로레인이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계속 자라야 하는걸요. 중간에 완성되는 건 몸뿐이겠죠. 전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가씨들이 다른 식의 타협을 하는 걸 보아왔어요. 그들의 선택에 때해 제가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너무 변하지 않으셨으면 했던 제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오드리 양의 모습을 뵈니 기쁜 게 사실이에요.”

로레인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더욱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전 오드리 양이 지금처럼 여유를 갖고 천천히 성실하게 행복을 쌓아가셨으면 좋겠어요. 더 좋은 일도 생기길 바라고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항상 그런 걸 바랐는데 잘 안 됐어요.”

“에이. 이제 스무 살이잖아요?”

“스물 하나예요.”

아드리아나는 로레인과 이야기를 하고 나오며, 이번에는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느꼈다. 아니, 크게 달라지지 않고 꾸준한 하루가 이어지리라고. 제자리를 찾게 된 보호소처럼, 그곳에서 시작했던 아드리아나의 두 번째 인생도 제자리를 찾게 되리라고.

악몽 같은 불행은 그만 끝날 때도 되었다. 이제는 평화기가 올 때도 되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던 21세의 겨울. 아직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던 그때, 아드리아나의 평화로운 시간을 깨는 사건이 또다시 찾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악몽이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해몽도 못 할 이상야릇한 꿈 정도로 말해야할까.

“손님, 거스름돈을 두고 가셨어요!”

빵 값으로 지폐를 내밀고서 잔돈도 받아가지 않은 손님을 붙잡으려고 계산대 앞으로 뛰어나오려던 때, 과자점의 문이 다시 열리고 손님이 돌아왔다.

“저, 여기....”

아드리아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내민 거스름돈 위에 무언가가 놓였다.

듣기 좋았던 울림의 낮은 목소리로, 손님이 입을 열었다.

“조금 급작스러울 거라고 생각하오만, 시간이 없으니 이대로 전하고 가겠소.”

아드리아나는 벨벳 천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손이 심하게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 손을 쥐고 꼭 붙들며 떨림을 멈춰보려 애썼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회색 눈동자가 바로 가까이에서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 작품 후기 ============================

더는 못 기다려(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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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40화네요. 로판인데 40화를 로맨스 없이 기다리시며 격려 해주신 분들께 새삼 감사 드립니다ㅜ_ㅜ 읽어주시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밤 되세요.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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