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기로 =========================================================================
올가을부터 웬디가 테스카의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학부모인 소니아의 추천으로 학교장과 만나서 간단한 테스트를 받은 결과, 어렵지 않게 입학 허가를 받게 된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테스트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대도시인 테스카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명색이 백작령인 우아즈의 학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던 웬디였으니 당연히 합격선에는 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우아즈에 있는 웬디의 고모할머니 집에서도 입학 소식을 반겼다. 학비가 우아즈와 차이가 크지 않아서 그것도 부담해주기로 했다. 테스카의 학교가 기숙사 제도로 운영하고 있는 덕에 그들이 웬디를 직접 데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 어쩌면 달가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기숙사가 참 좋더라. 헤이즐과 같은 방을 쓰게 될 수도 있대. 잘 됐다, 그치?”
아드리아나는 혼자서도 또래에게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해온 웬디가 대견했다. 웬디도 새 학교와 친구들을 보고 온 게 좋았는지 종일 아드리아나를 껴안고 매달렸다.
“근데 우리 오드리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어? 나는 걱정돼. 혼자서도 밥도 잘 먹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겠어?”
“내가 할 말이거든?”
코를 가볍게 쥐어주자, 웬디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 두 달 이후로는 쭉 웬디와 같이 지내면서 이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작은 방 한 칸에 세 들어 사는 처지에 어린 아이까지 책임지면서 살 수 있을지 걱정해주었던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그래도 아직 몇 달 남았으니까.”
“맞아. 오드리가 그 사이에 힘내서 웬디한테 형부도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웃겨.”
아드리아나는 웬디에게 눈을 흘기며 빈 컵들을 들고 일어섰다.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인연을 기대하며 남성과 만나본 일은 없었다. 또 다시 사랑에 빠지고 상처 입게 될 것이 두려웠다. 누구라도 똑같아 보였다. 겨우 조금 나아져가던 때에 노아의 결혼 소식을 접하면서, 남자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불신만 더욱 깊어졌다. 그 때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고 그 고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고독하고 평온한 편이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을에 웬디를 보낼 일을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스산해졌다. 다시는 혼자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외로워지기도 했다.
아드리아나는 어느 한산한 오후 시간에 공중전화를 찾아서 오랜만에 미네타와 통화를 했다. 아르본에서도 시설에서 숙식을 했기 때문에 전화를 하기가 쉬웠다.
“오드리! 나 안 그래도 통화하고 싶었어!”
미네타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자 입가가 느슨해졌다.
“정말이에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요?”
“있고말고! 나 다시 헤밀로 갈 것 같아!”
“헤밀이요?”
미네타는 흥분해서 새 계획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녀의 고향이자 아드리아나와 만나서 생활했던 헤밀에 다시 보호소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지금 공사가 한창이야. 옛날에 우리 있던 자리에 건물을 추가로 짓고 있는데 내년 중에 완공될 거라나 봐. 아르본 백작의 후원으로 여기 분원처럼 생기는 거라서 슈하스 쪽하고도 합의해서 들어가는 거래. 정식으로 운영될 거고 이제 운영비 걱정은 안 해도 돼.”
“잘됐네요, 미네타! 그럼....”
아드리아나는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이미 다른 시설에서 잘 적응하고 있기를 바랐지만, 시설보다 못한 가정으로 돌려보내져야 했던 아이들이 생각났다.
“다 데려와야지. 지금 연락하고 있는 중인데 대부분 학교에도 안 다니고 하다보니까 일일이 찾아가봐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잘됐어요, 정말....”
아드리아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두 손으로 수화기를 감쌌다.
“있잖아요, 미네타. 웬디는 가을부터 테스카에 입학할 거라 같이 못 돌아갈 것 같아요. 아주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시는 기숙사 학교에요.”
“이야, 거기 나도 알지! 대단한데? 오드리가 웬디를 데려가더니 그런 학교에까지 보낸 거야?”
“전 한 것도 없는걸요. 자기가 시험 잘 봐서 들어간 것뿐이에요. 우연히 알게 된 좋은 분이 학교에 소개도 해주셨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더욱 다정해진 말투가 들려왔다.
“우리 오드리도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대견하다. 너무 기특해. 난 나 살기 바빠서 아무것도 못해 줬는데....”
그녀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헤헤 하고 작게 웃고 말았다. 막 길을 잃고 찾아온 자신을 받아주고 지켜봐왔던 사람에게서 그런 칭찬을 들으니 가슴이 찡해졌다.
“저기, 미네타. 헤밀로 가시게 되면 저도 가고 싶어요. 저도 뭔가 일을 할 수 없을까요?”
“나야 좋지만, 헤밀보다는 테스카가 더 좋지 않아? 오드리 거기서 잘 지내는 거 아니야?”
“그냥 거기가 다시 생긴다고 하니까 가고 싶어져서요.”
애초에 아드리아나가 헤밀과 슈하스로부터 멀어지려 했던 것은 순전히 노아가 이유였는데, 적어도 이제 그와 마주칠 일은 없어졌다. 그는 헤밀의 집을 아예 처분한 모양이었다. 양친도 오래전에 수도로 이주한 데다, 노아도 일과 결혼을 수도에서 하게 되었으니 굳이 헤밀에 집을 놔둘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물론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노아와의 추억으로 가득한 그곳에 발을 들이기가 겁이 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보내기를 반복하며 혼자 남겨지는 것에도 지쳤다.
테스카는 독신으로 살아가기에 편리한 도시였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일 것 같았다. 다들 현상유지를 하며 살아가기에 빠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편리하고 부족함은 없지만 더 나아질 수는 없는 고독한 삶. 그것을 헤밀에서 정답게 부대끼며 살아가던 때와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노아를 잊어버리고 거기서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거야.’
조금쯤은 오기도 있었다. 굳이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그곳에서 혼자 얼마나 아프게 추억하게 될지 눈에 선한데도.
아드리아나는 일을 쉬는 토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슈하스로 갔다.
마침내 보석을 처분할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그저 불안한 미래를 위한 비상금으로 숨겨놓고 없는 물건처럼 여기며 살아왔었다.
‘앞으로는 미네타랑 요긴하게 쓸 데가 생길 거야. 웬디 겨울옷이랑 공부하는데 필요한 것들도 사주고, 로레인 수녀님께도 교회 후원금으로 좀 드리고... 남은 건 은행에 넣어놔야지.’
그러고 보면, 테스카에 처음 왔을 때 꾸었던 꿈이 벌써 많은 부분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지난달부터는 아드리아나도 은행이라는 곳에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웬디가 학교에 잘 들어갔고, 내년에는 다시 미네타와 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가장 절대적이고 소중했던 행복을 잃은 자리가 여전히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듯 남아서 공허함이 느껴졌지만,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고, 아드리아나는 애써 자신을 격려했다.
그녀는 슈하스에 도착해서 먼저 찻집을 찾았다. 숙식까지 제공해주며 돌봐주었던 보먼 부부를 만나서 안부를 주고받으며 차와 향초 등의 선물을 내놓자, 그들은 아드리아나가 금의환향한 딸 같다며 기뻐했다.
부부과 점심을 함께 먹은 후에는 교회로 향했다. 로레인에게 그간의 소식을 들려주었더니 그녀는 아드리아나가 기대한 만큼 호들갑스럽게 놀라주었다.
그리고 잘 보관하고 있던 보석을 꺼내주었다.
“파신다니 시원섭섭하겠어요, 오드리 양. 그런데 이거 다 한꺼번에 들고 가서 파시지 말고 나눠서 파세요.”
로레인은 보석을 넘겨주며 의미심장한 눈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행여 어둠의 무리들에게 표적이 될까 무서우니 비밀스럽게 하나씩 파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제가 그 바닥에 아는 형제가 없어서 참 안타깝네요. 힘 있는 세력들과 거래를 좀 터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드리아나는 로레인이 심각한 얼굴로 익살 떠는 것을 보며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웃었다.
“수녀님을 뵈니까 제가 아는 분이 생각나요. 아주 고상한 부인이신데 장난기가 많으시거든요.”
“저런. 혹시 테스카에 계시는 제 친척 언니를 만나신 것은 아닌지.”
로레인이 여전히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듯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귓속말을 하기에, 아드리아나는 ‘설마요’ 하고 또 웃었다.
그녀에게 후원금으로나마 보답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얼마나 뿌듯하고 기쁠까. 또 웬디에게 또래 친구들이 입는 것 같은 예쁜 겨울옷을 입혀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드리아나는 보석을 가방에 잘 담아서 테스카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어깨가 묵직했지만, 그것이 가져다줄 기쁨을 생각하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걸 해줘야지.’
돈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욕심내봤자 지금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행복은 그런 정도의 것들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오랜 시간 마차를 타면서도 피곤한 줄 모르고 이런저런 상상에 빠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는 길이 넓은 은행 앞에서 멈추었다. 보석상이 있는 골목이 그곳에서 멀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서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을 주의하며 큰길을 건넜다. 토요일에는 항상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무렵이라 저녁 시간이 다 되었어도 하늘은 한참 밝았다.
커다란 짐마차가 앞을 지나가기에, 아드리아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기다렸다. 길이 혼잡해지자 여자 한 명이 아드리아나의 어깨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사과하며 쳐다보자, 여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아드리아나를 흘겨보았다. 당황하며 다시 한 번 사과하려던 그때, 반대쪽에서도 누군가 부딪치고 지나갔다.
가방을 메고 있던 쪽이었다.
아드리아나가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팔에 안고 있던 가방이 사라져 있었고, 길 건너에 엄청난 속도로 길을 뛰어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정신이 없어져서 길을 건너려 하자, 여자가 팔을 붙잡았다.
“아가씨, 어딜 가요? 사람하고 부딪쳐 놓고.”
“미, 미안해요. 다시 올게요.”
아드리아나는 허둥지둥 길을 뛰어가서 남자가 몸을 감춘 골목으로 들어갔다. 듬성듬성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은 컴컴한 가게가 몇 개 있을 뿐인 음침한 길이었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바짝 탔다. 대로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바로 몇 발짝 들어간 이 골목에는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골목 입구의 건물들과 벽 틈새 같은 곳에 숨을 만한 곳이 없을까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섬뜩해져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런 곳에서 물건을 찾겠다고 깊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만약 보석을 훔쳐간 남자를 찾는다고 해도 아드리아나의 힘으로 그에게서 도로 빼앗을 수 있을까.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이, 오히려 더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순간적으로 제정신을 잃을 만큼 조급한 순간이었지만, 오래 전에 이 부근의 골목에서 일을 구하겠다고 이상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라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
골목을 나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멀리 공중전화가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테스카의 치안대로 전화를 걸어서 신고했다. 가까이에 있는 순찰 대원을 발견한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뒤늦게 범인을 잡는다고 해도 보석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길 위에 아까 부딪쳤던 여자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수상한 타이밍이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을 밟았다.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뭐에 배신을 당한 건지는 몰라도. 운이 나빴던 것뿐이라고, 단지 보석을 훔쳐간 그 사람 한 명이 나빴을 뿐이라고 생각해 보려 해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계속 괴롭히려 한다는 피해의식이 스멀스멀 솟았다.
그저 사고 없이, 나쁜 일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을 따름인데 그게 이다지도 어려웠다.
우습게도, 팔아버리려던 물건이었음에도 그것이 집안에서 가지고 나온 유일한 재물이었는데 허무하게 증발해버렷다는 게 가슴 아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리노아스와 연결된 과거인 동시에, 재출발할 수 있게 해줄 안전장치처럼 간직해 왔던 존재가 이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는 정말 그때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실감이 되었다. 쓰지도 않던 재물이었건만, 없어지니 당장 앞이 두렵고 캄캄해졌다.
‘괜찮아. 보호소에서 살게 되면 굶을 일은 없어.’
멍한 얼굴로 걷다가, 길 한쪽에 긴 의자가 보이기에 거기로 가서 앉았다.
눈물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가로수에는 꽃이 가득 피기 시작한 5월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차가운 손을 만지작거리며 체온이 돌아올 때까지 길 위에서 쉬어가려 했다.
화려한 도시의 풍경과 슬슬 밤놀이하러 나오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다. 까닥하면 휩쓸리기도 참 쉬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지 않는 청춘을 웃으며 흥청망청 보내는 것도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한 모습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에바의 말에 환호할 법도 하다고.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술도 좋아하지 않았고 아무 남자와 어울리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만, 제시카의 말처럼 시시하고 얌전한 삶을 아끼는 이들을 바깥에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 듯했다.
헤밀에 가면 이런 한가한 번뇌에 사로잡힐 틈도 없이 바쁘고 보람된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보석이나 큰 돈 같은 게 없어도 지장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어찌되었든 지금은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을지 모를 값나가는 물건을 잃어버린 충격이 커서, 아드리아나는 길게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짚고 기댔다.
“저, 괜찮으십니까?”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에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호텔 이시스에서 보았던 직원들처럼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상당히 좋은 남자여서 흠칫했지만, 호텔 데스크 뒤에서 매일 혼나던 그 신입 직원처럼 정직하고 투박한 분위기가 있어서 이내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사실 인상에서 나타난 유사점이란 단지 그들이 같은 국적의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은 거리에 오가는 이도 많았고 멍해져 있어서 서둘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거라면 바로 옆에 병원이 있으니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뭐하면 병원의 여성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서 모셔가게 해드려도 되고요.”
남자는 이곳 여성의 애로사항에 대해 잘 아는 듯 예의 바르고 신중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만일 아드리아나가 지금 몸이 아픈 거였다면 확실한 해결책이 될 법했다.
아드리아나는 힘들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괜찮다고 사양했다.
하지만 남자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미간을 좁히고 서서 한 번 더 권했다.
“그러시다면 댁으로 모셔드릴까요? 제 차에 타시는 게 불편하시다면 마차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마차를....”
아드리아나는 웬디를 생각하고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은 없었고, 텅 비어 있을 자신의 치마 주머니를 내려다보다가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냥 조금 이따가 알아서 갈게요. 돈을 두고 와서.... 이제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기 주머니를 뒤져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폐 몇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차비 정도는 가지고 다니십시오. 실은 아가씨 한분을 그냥 두고 지나쳤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니 불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아드리아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낯선 타인에게 지폐 몇 장씩 마구 적선하고 다닐 정도의 부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나친 호의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이내 남자가 약간 초조해진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형편이 곤란한 사람들을 위해 매달 얼마씩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가씨의 형편이 별로 곤란하지 않으시다면, 나중에 이 돈을 저 대신 기부해주시면 됩니다. 제 귀가가 늦어지면 주인께 꾸중을 들으니, 얼른 받아주십시오.”
남자는 돈을 아드리아나의 무릎 위에 내려놓고 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을 기력도 정신도 없어서 아드리아나는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가 길을 건너기 전에 은행 앞에 서 있는 빈 마차를 향해 손짓했다.
“저기 아가씨를 댁으로 모셔 주시게.”
이윽고 마차가 아드리아나의 앞으로 왔다.
============================ 작품 후기 ============================
그리고 발렌틴에게 지출결의서가 한 장 제출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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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화에 남주의 무식한 패기 때문에 즐거운 코멘이 많았네요. 헤헿. 앞으로 1,2화 정도의 기로를 끝으로 1부를 마치려고 합니다. 남주와의 연애(?) 중심인 2부도 바로 이어갈 거예요.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