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2부] 기로 (발렌틴) =========================================================================
발렌틴은 엊그제 처음으로 선을 보았다. 큰 결심을 하고 투스미아에까지 가서 여자를 만났다. 성직자도 아니면서 가정을 만들지 못한 28세 독신남. 안 봐도 하자 있는 남자라고 낙인이 찍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여자면 따지지 말고 받아들이리라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 결혼은 언제 하냐는 말을 15세 때부터 듣기 시작해서 14년째가 되었다. 이제는 다 지겨워졌고 결혼에 관한 개인적인 이상 따위는 집어치우자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번씩 들었다.
그럼에도 막상 선을 보고 나왔을 때, 주선자에게 뭐라고 전달해야 할지 격렬하게 고민이 되었다.
얼굴은 꽤 예쁜 아가씨였다. 주선자가 공작가의 안주인이었던 만큼 여자의 배경 조건도 최상급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여자랑 결혼하게 되는 것인가. 이 여자를 부인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인가. 모르는 여자 기호 1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여자를 당장 며칠 뒤부터 나의 피앙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 채로 인사가 끝났다. 테스카에서였다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후의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 예의였겠지만, 이곳이 테스카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공작가의 사나운 안주인에게 거절을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 발렌틴이 그렇게 고민한 것은 길게 가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여자 쪽에서 당장 거절의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흐음....”
편하게 되었다고 좋아해야 할지, 우습게도 차인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발렌틴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듯한 긴 회랑의 의자에 앉아서 뻥 뚫린 바깥을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절망적이었다. 처음이었던 이 맞선을 끝으로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작금의 상황은, 태어난 이래로 별다른 고난이 없었던 삶에 들이닥친 커다란 시련 같았다.
“...그래도 고독하게 죽지는 않겠지. 내 무덤은 자네가 지켜줄 테니까.”
발렌틴이 곁에 앉아 있는 펜에게 말하자, 펜이 회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연하이긴 합니다만,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지 않습니까.”
굳이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발렌틴은 펜을 질책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가 금방 시선을 내리깔았다.
펜은 주인의 기분을 개의치 않고 떠들었다.
“여성이 이야기를 하는데 웃지도 않고 빤히 쳐다만 보는 신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이라도 길게 해주시든가요. 주인님은 낙담하실 자격도 없어요.”
“웃음이 안 나오는 걸 어떻게 하라고.”
“웃는 시늉이라도 하셔야죠.”
“그렇게 해서 결혼에 성공해봤자 첫날밤부터 변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 텐데.”
“알게 뭡니까? 그때 가서 물러달라고도 못할 일을.”
발렌틴은 무책임한 소리를 한다고 내뱉으려다 그만두었다. ‘그렇게 따지기만 하고 고지식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지금 이 꼴이 아니냐’고 반박당하면 더 처량해질 것 같았다.
“너무 울적해 마시고 심기일전해서 재도전해 보십시오. 저희한테 하시듯 무난하게만 대하셔도 여자가 마다하지는 않을 겁니다.”
“심기일전까지 해서 처음 보는 여자한테 결혼해달라고 구걸해야 하는 건가.”
“구걸이라니 왜 또 그러십니까....”
펜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난 혼자서도 지난 세월을 잘 살아왔어. 내 부모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착실하게 살아왔단 말이네. 그런데 단지 독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일을 뺏겨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권력 남용도 정도껏 해야지 망할 영감 하나가 횡포를 부려서 남의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울컥 화가 치밀어서 조금 큰소리를 내자, 뒤에서 나타난 영감 본인이 굵게 헛기침을 했다.
“흠. 발렌틴.”
발렌틴은 마지못해 일어서서 눈앞에 나타난 원수를 바라보았다.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삭이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미간을 폈다.
“예, 공작 저하.”
2m를 훌쩍 넘는 거구의 남자, 바쉬 공작이 눈을 깔고 내려다보며 압박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임에도 척추가 빽빽하게 조여진 근육으로 지지되어 곧게 서 있었다. 자타공인 북해 건너에서 온 거인왕의 직계 후손이라고 불리는 루미아 가의 현 수장다운 외모였다.
“어려운 일을 바라는 게 아니네. 브란델 웨버는 열여덟에 그대를 낳았지. 흠결 없는 투스미아의 사내라면 그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걸세. 그런데 그대는 대체 언제까지 그 하인 놈과 둘이서 시시덕대며 살 생각인가? 부끄러운 줄 아시게. 브란델 웨버의 장남이 고추 달린 놈과 결혼할 셈이라는 소리가 나돌고 있어.”
그런 끔찍한... 하고 입이 벌어졌지만, 발렌틴은 말이 통하지 않는 거인과 말다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송구합니다, 저하. 결혼은 여자와 하겠습니다.”
공손하고 짧게 말을 마치자, 공작이 입가를 실룩이며 낮게 한마디 뇌까리고 돌아섰다.
“...고자 같은 놈.”
오랜 시간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가끔은 그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정녕 고자인가, 발렌틴은 먼 산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서 있는 이곳은 건국 이래로 오랫동안 영토 확장과 온갖 전투에 피를 바치며 살아왔던 다혈질 민족의 땅이다. 신중한 사람, 얌전한 사람을 보면 그냥 두지 못하고 들볶는 못된 거인 놈들이 발렌틴의 조상이었다.
발렌틴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결혼하겠다는 의지가 싹 사라졌네. 나는 이대로 혼자 살면서 빌어먹을 영감이 막아놓은 일을 되찾기 위해 싸우겠어.”
“권력이고 돈이고 법이고 공작님께는 아무것도 안 되는데 뭘로 싸우시게요.”
펜이 말하자 발렌틴이 언뜻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둘 중 하나의 피를 보자고 해야겠어. 먼저 힘자랑을 해왔으니 이쪽도 힘으로 하는 수밖에. 나는 인간이 가진 가장 정직한 힘으로 내 일을 되찾아오겠네. 바쉬 공작이 왕년에 무슨 공을 세웠든 지금은 일흔 먹은 꼬부랑 영감탱이에 불과해.”
발렌틴은 15세 때 이후로 쓰지 않았던 ‘영감탱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전의를 불태웠다. 게다가 아까까지 무식하다고 욕하던 전투 민족의 습성이 가장 훌륭한 해결방안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구부러지지 않은 공작의 척추를 약점인 것처럼 말하면서.
바쉬 공작을 만나면 그는 자주 이성을 잃었다. 펜은 주인의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행여 누가 볼세라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웨버 경. 그러지 마시고 그만 이쪽으로 돌아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이넨을 고집하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쪽으로 돌아오시면 혼인 문제도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여기서 정착하겠다고만 하시면 억지로 맞춰주지 않으셔도-.”
“결혼은 안 한다고 했네.”
발렌틴이 펜의 말을 끊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고 조금 전에 지껄인 바보 같은 계획을 실천할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펜이 상기시킨 일에 비하면 혼인 문제는 오히려 단순하기 그지없는 문제였다.
“...여기로 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해.”
공작이 요구하는 일은 천성에 맞지 않았고, 발렌틴은 이미 아이넨을 새로운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 발렌틴의 외모는 남성 평균 신장 2m에 달하는 로아타르의 원주민이 아니라, 부친의 고향인 아이넨 쪽에 가까웠다. 덕분에 그쪽에서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투스미아에서는 외모 때문에 이방인이 된 기분을 종종 느꼈었다.
물론 아이넨에서도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다. 가치관과 성격, 알맹이는 어디까지나 투스미아인의 것이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어디에도 완벽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정착할 곳을 찾아 떠돌다가 겨우 지금의 생활에 이르렀다.
발렌틴은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고 공작의 사저를 나왔다.
지금 이토록 답답한 이유가 바쉬에 오는 게 싫어서인지, 기어이 결혼을 하기 싫어서인지,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자신이 가장 묻고 싶었다.
*
“아직도 안 왔다는데?”
프란체가 이미 끊어진 전화의 수화기를 든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잉, 뭐야. 크리스마스 때도 안 보이더니.”
소파에서 남편을 올려다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소니아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글쎄 연말부터 통 안 보이네. 많이 바쁜가?”
“우리가 귀찮게 할까 봐 도망 다니는 거 아니야?”
“흠. 그럴지도. 왜 당신이 작년에 한 짓이 있잖아. 이맘때쯤이 되면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난다든지 트라우마가 생긴 걸 수도 있지.”
프란체의 말에 소니아가 입술을 샐쭉하게 모으고 눈을 흘겼다.
“나는 그이한테 엄마처럼 생각되고 싶은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무슨 다 큰 사내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거시기 한 번 까보였다고 트라우마씩이나 생기겠어?”
“여보, 거시기라고 하지 마. 다른 남자 거시기 입에 담지도 말라고.”
프란체가 애원하듯 말하자, 소니아가 입가에 부끄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 자기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해.... 자기 때문에 내 마음의 순결이 해쳐지는 기분이야.”
“나도 말하고 나서 보니까 좀 그렇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자기.... 나의 순결한 종달새.”
프란체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소니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앙탈을 부리는 아내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누르며 지분대다가 갑자기 다시 생각난 듯 인상을 썼다.
“그나저나 발렌틴은 정말 안 오려는 건가? 우리 소니아가 곧 애를 낳을 것 같다고 하면 뛰어와 주려나?”
“자기도 참. 무슨 산파도 아니고 내가 애를 낳는데 발렌틴이 왜 뛰어와? 프란체 자기가 낳을 것 같다고 하면 몰라도.”
“음. 안 오면 연을 끊는다고 했는데 좀 너무하는군.”
“올 때 되면 오겠지, 뭐. 자기야, 나 요즘 열심히 기타 연습하고 있는데 들어볼래?”
“오, 좋지.”
프란체가 미리부터 박수를 치며 설레발을 쳤다. 소니아는 이제 익히게 된 곡의 앞 소절을 몇 마디 뚱땅거려보고서 기대하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때, 어때?”
“자기 천재 아니야? 내가 듣기에 감성으로 따지자면 테스카 영주님네 연주자들보다 훨씬 훌륭한 것 같아. 언제 이렇게 잘하게 됐지?”
“후후후. 내 음악적 재능이야 말로 다 못 하지.”
“그러게나 말이야. 아무튼 이번에는 오래 가네. 뭐든 항상 레슨 한두 번만 받으면 그만둔다고 하더니.”
“그건 옛날 교사들이 내 음악적 감각을 이해를 못 해줘서 그런 거야.”
“음. 어렵지. 당신 건 범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감각이거든.”
“아잉. 난 우리 자기만 이해해주면 돼.”
부부는 다 큰 딸아이를 가진 13년차 부부들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애정행각의 범위를 곧잘 넘어섰다.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어서, 창가에 서 있던 발렌틴은 친구 부부의 임신 소식에 가져온 선물들을 문밖에다 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우리 종달새는 이제 노래만 잘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기타 연주 실력까지 갖게 되었군. 다음엔 또 뭘 잘 할 셈이야?”
“나, 밥 빼고는 다 잘하지 않아?”
“그럼. 그 중에서도 최고는 밤에 알 수 있지.”
“아잉, 몰라! 부끄러워!”
“하하하.”
결국 참지 못하고, 발렌틴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관 앞에다 짐들을 내려놓았다. 펜은 부부에게 인사했고, 발렌틴은 인사 대신 작게 넋두리를 했다.
“사람을 불러 놓고 좋은 걸 보여주는군.”
“오, 자네 왔나?”
“발렌틴! 잘 왔어요. 내 덕분에 귀 호강하게 될 줄 알아요. 잠깐 나 수프 좀 데워놓고 올게요.”
소니아가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가자, 발렌틴이 인상을 찌푸렸다.
“연을 끊겠다더니 또 무슨 이상한 걸 먹이려고.”
“이번엔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아. 자넨 내일도 일 하나?”
“월요일에 멀리 볼 일이 있어서 내일 오후에 출발하려고 하네만.”
“그럼 들어와서 같이 딱 한 잔만 하지.”
“됐어. 둘이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난 그만 가보겠네.”
“에이. 소니아가 술을 못 마시게 되어서 자네가 옆에서 시늉이라도 해줘야 한단 말일세. 우리 둘째를 제대로 축하 해줘야지.”
이 부부의 둘만 놀면 재미없다는 말에는 어디까지 어울려줘야 하는지 항상 어려웠다. 다만 전화를 열 통 가까이 했다는 보고와, 가득 차려진 상을 봐서는 도망가기 틀린 듯 보였다.
용건이 달리 또 있다는 사실은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발렌틴, 이번에는 진짜 꼭 만나봤으면 하는 아가씨가 있어요.”
소니아의 말에 발렌틴은 물이 든 잔으로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밥 먹는 동안 말하지 않고 봐주느라 얼마나 몸이 달아있을지 알만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놓치기 아까운 괜찮은 아가씨예요. 내가 아무한테도 선을 보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왔어요.”
“그래. 나도 아는 분들의 따님인데 나이가 좀 어리기는 하지만 괜찮을 거야. 그쪽에서도 자네라고 하면 좋아할 테고.”
발렌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소개할 아가씨의 가문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아가씨가 얼마나 참하고 예쁜 아가씨인지, 소니아는 증거가 될 만한 정황들을 곁들여서 열심히 설명하고서 반응을 기다렸다.
“...제가 언제 시간을 내면 됩니까?”
소니아는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것처럼 눈을 깜박이며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걸 보니 부러워져서.”
발렌틴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다시 물이 든 컵을 들었다. 그 한 잔으로는 갈증이 다 가시지 않는 듯해, 그 뒤 곧바로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 작품 후기 ============================
늦게부터 쓰느라 정신이 없네요@[email protected] 생각보다 길게 써져서 앞부분 먼저 올립니다. 내일 수정하고 뒷부분도 다음화로 마저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