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테스카 편 - 새벽을 지나는 동안 =========================================================================
아드리아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몸은 어디에 숨겨야 할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당장 남자들이 상반신과 종아리를 허옇게 다 드러낸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 역시 전 안 되겠어요, 에바. 먼저 가야겠어요.”
“네에?”
에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석에서 방황하고 서 있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남자들 역시 당황해했다.
“어... 혹시 우리가 방해했어요?”
아드리아나가 뭐라고 더 사과할 틈도 없이, 에바의 친구가 손으로 물을 튀기며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방해라고 생각 안하도록 신사분들이 재미있게 해주셔야죠.”
그녀의 말에 남자들은 금세 표정을 풀고 미소 지었다.
“헐벗고 신사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좀 그렇긴 한데.”
“전 헐벗었어도 숙녀 대접 받고 싶은데요?”
에바의 친구는 남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말을 걸고 어울렸다. 인어 같다는 둥 칭찬하는 남자들의 말이 싫지 않은 듯 웃으며 같이 농담을 나누었다.
“저희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노세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한 청년이 쭈뼛거리는 아드리아나를 향해 자못 예의 바른 투로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서 다시 뒤돌아 눈동자를 굴렸다.
혼자만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차림새가 남세스럽기는 했어도 다들 물놀이 하러 왔으니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반발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과민반응을 보여서 사람들의 흥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빠져나오고 싶었다. 에바까지 자기를 신경 쓰느라 놀고 싶은 대로 놀지 못하는 듯해 마음이 불편했다.
“에바, 미안해요. 아무래도 전 방해만 될 것 같아요. 가서 저녁 식사 준비나 해놔야겠어요. 다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해하면서도, 아드리아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물 밖으로 나왔다. 억지로 남아있다가는 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제에는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감당도 못하는 상태로 끌려 다니다가 원치 않는 일의 계기를 만드는 건 이제 사양이었다.
다행히 막상 인사를 하니 찌푸리거나 질척거리는 사람 없이 다들 매너 좋게 인사해주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죠. 저녁 맛있게 드세요, 오드리 씨. 가게에서 봐요.”
“저녁 준비라니 남편이 계신가 보네요.”
청년의 중얼거림에 아드리아나는 작게 웃었다. 다른 청년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는 같이 놀아요.”
“남편분도 같이 오세요.”
놀리는 건지 정말 남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몰라도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혼자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굳이 도망쳐 나온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찜찜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 남아있었더라면 더 찜찜한 생각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들이 웃어주든 화를 냈든 자신은 이렇게 나왔어야 했다. 어차피 그들에게서는 곧 잊힐 테고, 아드리아나가 지금 얽매여야 할 곳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휴우....”
건물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으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이따가 웬디와 함께 먹을 저녁 메뉴와 간식거리로 사갈 과자를 생각하며 조금 전의 일은 털어내 버리려 했다.
‘에바에게는 가게에서 다시 사과를 해야지.’
발걸음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잘한 거라고 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더 어릴 적부터 ‘거절’을 할 줄 알았더라면 좋았을 걸, 씁쓸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금방 큰길이 나왔다.
큰길로만 다니는 사람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으로 살 셈이었다. 그렇게 하면 테스카 안에서도 이대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과 ‘자신’을 잊지 말라던 로레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나와 실컷 웃고 즐기다가도 금세 자기 남편을 찾으며 쪼르르 달려가곤 하는 소니아도. 유난 떤다거나 시시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대로도 좋다고 말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집에 돌아와서 방을 정리하고 있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었다. 소니아가 웬디를 데려다주러 온 것이었다.
“오드리 선생님. 나 따뜻한 차 한 잔만 얻어먹어도 돼요?”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책을 보며 굴러다니도록 내버려두고 둘이서 테이블에 앉았다. 어울리지 않을 듯 썩 괜찮게 어울리는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보니 수영장에 갔다 온 이야기도 나왔다.
“아유, 선생님도 참! 남자들이 얼마나 관리에 애썼는지 봐주셨어야죠. 샅샅이 훑어보고 공부도 좀 하고 오시지 왜 그냥 오셨어요?”
“너무 창피했어요. 불편하고....”
“뭐, 테스카 영주 자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말이에요. 별로 눈 보신이 안 되던가요? 그런 곳에 다니는 남자들은 다 자신이 있어서 드나드는 걸 텐데.”
아드리아나는 어땠던가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보질 못했네요.”
“아유, 보셨어야죠!”
“그러게 말이에요. 공부가 될 줄 알았다면 슬쩍 훔쳐보기나 하고 나올 걸 그랬어요.”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말하자, 소니아는 작은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탁 내리치며 ‘아유’하고 거듭 탄식했다. 아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괜찮나 싶어서 슬쩍 돌아보았지만, 웬디와 헤이즐은 뒹굴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전 우리 헤이즐한테 다 가르쳐놔서 괜찮아요.”
소니아가 작게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웬디를 돌아보았다.
웬디는 어떨까. 설마 그 교육을 시켜야 하는 건 아니겠지.
“오드리 선생님.”
“네?”
“제가 보기엔 선생님 코가 석자예요.”
소니아가 말하고는 까르르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새치름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웬디가 덩달아 킥킥 웃는 것을 보고 눈을 흘겼다.
그 뒤 월욜일에는 출근해서 에바와도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드리아나가 조금 걱정되었지만 자기들끼리 잘 놀았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실 줄은 몰랐어요. 가게에서도 보면 남자들을 잘 붙여주지 않으시는 것 같긴 했지만 일터라서 그런가 보다 했거든요. 연인도 없으시면서 왜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냥 내키지가 않아서요.”
“결혼할 나이인데도요?”
“그러게요.”
에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어차피 밖에서 만나고 논 남자들을 남편감으로 삼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왠지 아까워요. 이렇게 예쁘신 걸요. 꼭꼭 감추고 아끼는 동안 젊음도 다 지나가버리잖아요. 순결이란 남편 한 사람만 잠깐 기쁘게 해주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말에서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아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에바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나요? 남자들은 실컷 놀다가 결혼하기 위해 얌전한 여자를 찾는대요. 왕족들은 아직도 부인을 여러 명 두는 사람도 많고요. 그런데도 여자만 순결에 구애받고 즐겁게 살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아드리아나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거기까지를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딱히 얼굴도 모르는 미래의 남편에게 순결을 지키자는 신조로 정숙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순결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예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즐거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만일 자신이 가끔 꾸는 망측한 꿈을 에바가 안다면, 겉으로만 얌전한 척 내숭을 떠는 여자라고 흉을 볼지도 모른다. 아드리아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조그맣게 말했다.
“전 그냥... 잘 놀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저랑 비슷한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테스카에 얌전한 남자가 있을까요?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아니, 있기야 있겠죠? 만날 수 있을까요?”
에바는 아드리아나의 희망을 비웃는 대신, 미간을 좁히고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음... 못 찾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아드리아나가 쓴웃음을 짓자 에바는 ‘거 봐요. 정말 아깝다니까요.’하고 웃었다.
그 후로도 에바에게 몇 번인가 같이 어울리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지만 다시 번번이 사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그녀도 권유하지 않게 되었다.
에바와는 현재의 처지와 환경이 비슷해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었는데 서로 가치관이나 취향이 너무 달랐다. 그래도 성격이 좋고 깊게 관여하려 들지 않고 아드리아나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사람이어서, 좋은 직장 동료로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사실 테스카에 와서 그 정도의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정도도 큰 행운이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시골 영지에서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선과 벽이 있었다. 대신 그만큼 서로 다름을 존중했고 더욱 예의를 지켰다. 리노아스와 슈하스, 테스카,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좀 더 살아본 후에 말할 수 있게 되리라.
아드리아나는 연인이 되고자 다가오는 사람을 전부 뿌리치고 남자들과는 거리를 두고 지냈다. 이렇게 사는 게 잘 맞았다. 찻집에서 일을 하고, 웬디와 남은 하루를 보내고, 소니아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며 보내는 일주일이 편안하게 몸에 배어들었다.
불만을 느끼는 것은 아주 가끔이었다. 에바의 말처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따금 찾아드는 열정적인 꿈은 수위를 높여갔다. 수영장에 갔던 이후에는 꿈속에서 '그'의 알몸이 다가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너무 흐릿해서 꿈속의 아드리아나는 더 잘 보려고 눈에 힘을 주고 안간힘을 썼었다.
깨고나서는 웃음만 나왔다. 물론 한 번도 남자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현실의 남자를 생각하면 여전히 거부감만 일었다.
그저 막연한 갈망이었다. 자기 남편에게 배 근육을 만들어주겠다던 소니아처럼 되고 싶은 듯도 했다. 좋은 남편을 만나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무의식 속에는 사뭇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대로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진짜 인연을 놓쳐버렸다는 상상이었다. 노아에게 잘 못해서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상상. 다른 어떤 남자에게도 마음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형체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의 꿈을 꾸는 자신이 불결하고 죄스럽게 느껴졌다.
결국 자신이 그를 버린 것이다. 함부로 이별을 말해서 그가 붙잡을 생각조차 못할 만큼 상처준 것일 수도 있다.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 연락을 끊은 것도, 평소에 아드리아나가 그만큼 힘들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후회와 고통에 시달렸다.
‘모르겠어. 그의 마음을 알고 싶어. 그가 행복한지 알고 싶어.’
그에 대한 미련과 아픔에 갇힌 채로도, 다른 누구라도 좋으니 진정한 반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의 모순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런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회한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생각보다 빨리 일어났다. 아드리아나가 찻집에서 손님이 없는 시간에 잠시 쉬며 신문을 보았을 때였다.
무심코 마을 사람들의 결혼 소식이 실리는 면을 들여다보다가, 윗면에 크게 실린 수도 어느 영애의 소식을 보았다.
‘유망한 변호사 청년과의 열애 끝의 결혼’이라는 문구가 눈에 걸렸다.
노아 휴스턴. 그 이름이 흔치는 않을 터였다. 기사에는 두 사람이 부모의 소개로 알게 되어 1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한다고 되어 있었다.
1년 전이면 아드리아나가 노아와 행복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 단꿈에 젖어 있을 무렵이었다. 또한 그 역시 진실로 아드리아나를 사랑해주었던 때였다. 노아에게 아드리아나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만날 만한 여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럴 사람이 아니야....’
기사는 항상 진실을 적고 있을까? 진실이 아니라면? 이것이 포장이라면? 노아가 부모에 의해 억지로 그 영애와 결혼하게 되었다면?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아직도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사무치게 깨달았다. 결혼 소식을 접한 이 순간에도 그를 잊는 게 옳은 일인지 갈등하는 자신을 느꼈다.
그가 불행한 결혼을 억지로 한 것인지, 아드리아나를 배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단 한 순간이라도 노아가 수도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게을리 한 순간이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꼭꼭 지키고 있어도 아까울 뿐이라는 에바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것이 어떤 악질적인 장난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요동치다가 위로 역류할 것 같았다.
이윽고 손님이 들어왔다. 아드리아나는 이제 미소 지으며 인사하고 주문을 받으러 가야 했다. 머릿속에서는 노아가 수도로 출장을 갔다가 말도 없이 늦게 온 날이 떠올랐다. 사고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감사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마음이었지만,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야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연인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마음을 붙잡지 못한 부족한 자신을 원망했다. 나중에는 누굴 원망해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늘 실망 시켰을 거야. 가고 싶다고 했던 곳에도 같이 가겠다고만 하고 실제로는 많이 못 가주었고... 안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때도 있었고....’
부질없는 후회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일하는 내내 몰아치는 혼란과 모든 일에 대한 후회에 빠져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릴 수 없었다.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냥 주저앉고 싶고 쓰러져 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거리에서 약한 틈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땅의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고 노아와 길이 달라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가야 했다.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방문을 열자 맞이해 주는 웬디의 얼굴이 보였다. 쉽게 현실로 돌아와지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침대에 엎드려서 잠시 쉬려고 누웠다.
“오드리....”
“잠깐만 쉬었다가 밥 차려줄게, 웬디.”
웬디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가와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뒤에서 아드리아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몸이 심하게 떨렸다.
“오드리 왜 그래.... 울지 마아.”
등 뒤에서 웬디가 ‘으앵.’하고 울었다. 아드리아나는 한참 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깨 뒤돌아서 웬디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작게 말하자, 훌쩍이는 웬디의 작은 손이 아드리아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우리 둘이 행복하게 잘 지내자. 웬디.”
============================ 작품 후기 ============================
다음화는 발렌틴 시점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로 들어섭니다.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