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3 테스카 편 - 새벽을 지나는 동안 =========================================================================
저녁 7시쯤 일을 마친 아드리아나는 가게를 빠져나와 곧바로 마차를 타고 슈하스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이라 길이 혼잡해서 테스카를 빠져나가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렸다.
‘괜찮을까.’
어둠이 깊어질수록 초조함이 커졌다. 웬디의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다던 말이 귓가를 맴돌아서 일하는 동안에도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다.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길만큼이나 가슴도 답답했다.
‘그래도 의젓하고 똑똑한 아이니까....’
출발한 지 4시간이 지난 뒤, 마차가 슈하스의 교회에 도착했다.
소리를 들은 로레인이 마당 앞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드리, 어서 와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밤늦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웬디는요?”
“같이 기다리겠다고 하기에 데려왔어요. 지금 사무실에 있어요.”
아드리아나는 로레인을 따라서 교회 건물 입구에 있는 작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 한쪽에 앉아서 고개를 꺾고 자는 아이가 보였다. 만나지 못했던 2년 사이에 웬디는 훌쩍 커 있었다. 조금 말랐지만 키가 많이 컸고 소녀티도 물씬 났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허리까지 길게 내려왔다.
아드리아나는 웬디의 한쪽 눈 옆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일부가 노랗게 옅어져 있는 걸 봐서는 며칠은 된 상처 같았다.
“웬디.”
살짝 흔들어 깨우자 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리고 얼굴을 보자마자 입가를 실룩이며 울상을 지었다.
“오드리이.....”
아드리아나는 안겨오는 웬디의 등을 토닥이고 쓸어주었다. 이제 괜찮다고 말하며 한참을 달래준 후에 눈물을 닦아주면서 작게 꾸짖었다.
“무작정 집을 나오면 어떻게 해. 이렇게 다들 걱정시킬 거니?”
“이제 그 집에는 안 갈 거야.”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그만큼 굳은 결심이 보여서, 아드리아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도 말 안 해주고? 교회랑 사람들에게 계속 폐를 끼치면 안 돼.”
“수녀님이 될래. 여기서 공부하고 일도 도울 거야.”
“웬디는 안 돼. 집을 나오기 위해서 수녀님이 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훌륭한 수녀님이 될게. 나도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공부해서 로레인 수녀님처럼 대단한 사람이 될게.”
진지하게 울먹이는 그 말을 듣고, 뒤에서 로레인이 흑흑 눈물을 글썽이며 웃음을 참았다. 아드리아나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무작정은 안 되는 거야. 그보다 왜 집에 들어가기 싫은지 이유를 말해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웬디가 집에 가야 할지 잠시 다른 곳에 쉬어도 될지 같이 생각해봐줄게.”
아드리아나가 말하자 웬디가 흔들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을 보고, 아드리아나가 부드럽게 한 마디를 더 했다.
“웬디, 형제들과 다툰 것 정도로 집을 나오면 안 돼. 같은 부모님에게서 난 형제라도 다투면서 자라기도 해.”
“...할아버지가 자꾸만 엄마를 욕하잖아.”
웬디가 말하더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자꾸 자꾸 욕하잖아. 아빠가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엄마가 아프게 된 건데, 할아버지는 엄마가 미우니까 아빠가 나간 거라고 자꾸 욕한단 말이야. 그랬더니 다른 애들도 똑같이 욕하고....”
웬디가 서러운 얼굴을 하더니 어린애처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울음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이를 조용히 시킬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서, 아이의 젖은 뺨을 손으로 계속 닦아주다가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였다.
“...웬디, 나랑 테스카에서 놀고 온다고 할까?”
“테스카...?”
“응. 우리 집에서 같이 생각해보자. 수녀님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웬디네 할머니한테는 내가 잠깐 돌봐주겠다고 하고.”
“...나 가도 돼?”
웬디가 머뭇머뭇 물었다.
“그럼. 작은 방이긴 하지만 계단이랑 문도 따로 있고 거의 나 혼자 지내는 곳이야. 웬디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도 괜찮아.”
“오드리는 아직도 결혼 안 했어?”
‘아직도’라는 말에 뭔가 조금 울컥했지만, 아드리아나는 입을 조금 삐죽여 보이고 웃었다.
“그래. 아직도 결혼 못 했으니까 나랑 같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먹고 휴가 같이 보내자.”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웬디가 할머니네 집에서 나쁜 일을 겪었다든지 해서 돌려보내기 어려울 것 같은 상황이면, 자신이 잠시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12세가 되는 내년이면 기숙사학교에라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만약 같이 지낼 수 없다고 해도, 이제 반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할머니 댁에서 잘 지내보라고 달래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괜찮겠어요?”
밖에 나와 있던 로레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무실 안에 있는 웬디에게 코트를 입고 가방을 메도록 준비시켜놓고 먼저 나온 참이었다.
“손이 가는 아이가 아니라서 괜찮을 거예요. 제가 일하는 동안에는 혼자 집을 보게 해야 하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오드리가 아이를 키우기는 힘들 거예요. 몇 살 차이 안 나는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엄마 노릇을 해야 하게 될 텐데 어떻게 하려고요?”
로레인은 아드리아나가 웬디를 당분간 맡으려는 마음을 읽은 듯 그렇게 물었다.
“우리 둘 다 똑같아요. 거기서 거기인걸요.”
아드리아나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둘 다 부모가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고 이제 막 세상을 알 만한 나이부터 대책 없이 혼자 떠돌게 되었다. 같이 지냈던 짧은 기간 동안에 느꼈던 친자매 같은 유대는 2년 만에 얼굴을 본 지금에 와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때의 아드리아나는 열일곱이었고 웬디는 이제 열한 살이다.
게다가 같은 어려움을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짐이 될지 의지가 될지는 쉽사리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리라.
“...다른 아이라면 저도 이런 생각은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웬디랑은 같이 살아봐서 알아요. 괜찮을 것 같아요.”
각오하고 있던 말을 들려주자, 로레인이 작게 어깨를 들썩였다.
“혼자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소녀 가장까지 되려는 것 같아 솔직히 좀 걱정되긴 하네요. 별 도움은 못 되겠지만... 어려움이 있으면 제게도 말해줘요.”
로레인은 사무실에서 봉투를 꺼내와 건네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지만, 사람들이 웬디를 위해 조금씩 걷어준 거라는 말에 아드리아나의 마음대로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타고 왔던 마차로, 아드리아나는 웬디와 함께 테스카로 돌아갔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어서 서로 머리를 기대고 금방 잠이 들었다.
‘내가 돌볼 수 있어.’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친딸인 자신을 그렇게 부유한 환경에서도 어려워하며 가르치고 조심하며 데리고 다녔다.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웬디를 보면 자신의 옛날 모습이 생각났다. 혼자 괴로운 환경에 있는 것을 모르는 척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지금처럼 번다면, 아이 하나를 몇 달 먹이고 재우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웬디. 아침이 되면 나는 일을 하러 가야해. 웬디는 일어나면 샐러드를 만들어서 빵이랑 먹고 책도 보고 쉬어. 아직 집 밖에는 절대로 나가면 안 돼. 난 5시에 돌아올 거야. 알았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미리 단단히 다짐을 받아두고, 아드리아나는 출근하기 전까지 좀 더 잠을 잤다. 푹 자버렸다가 지각할까 봐 깊이 잠들지도 못했지만, 아침부터 계속 긴장한 상태가 이어져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 터라 피로를 느끼지도 못했다.
찻집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5시가 되자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왔다.
웬디는 테이블 앞에 얌전히 앉아서 심각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드리!”
“잘 있었어? 안 심심했어?”
아드리아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서 손을 내밀었다.
“우리 맛있는 거 사러 갔다 오자.”
“신난다!”
웬디는 금방 밝아져서 예전처럼 웃고 떠들었다. 슈하스에서는 괜히 엄살을 부린 게 아니냐고 흘겨봐도 마냥 좋은지 히 웃기만 했다.
“있잖아. 내가 방도 닦고 빨래도 할게. 오드리가 밥도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그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 둬.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테스카에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면제해주는 유명한 기숙사학교도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웬디를 생각했었다.
“웬디는 지금도 1등 해?”
“가끔 2등도 하지만 난 신경 안 써. 할머니는 신경을 많이 쓰지만.”
웬디가 길 한쪽의 선을 밟고 일자로 걸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번화한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도, 아드리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무서워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웬디는 학교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두 사람은 화려한 통나무처럼 장식된 케이크와 과일을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늘 혼자만 다니다가 둘이서 함께 이야기 하며 걷는 기분이 신기했다.
-가족과 함께 하세요.
그 문구에는 여전히 조금 미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혼자일 뻔했던 웬디의 곁에 있어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네. 웬디랑 나랑 같이 크리스마스 보내는 거.”
“진짜네. 다음에는 형부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웬디가 따뜻한 차를 후룩 마시며 히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뺨을 짙게 물들이며 눈썹을 찡그렸다.
“웃겨. 조그만 게 어디서 형부는 배워가지고...”
“아, 내년에는 오드리한테 좋은 남편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웬디가 말하더니 컵을 내려놓고 작은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아드리아나는 무릎을 끌어 모으고 앉아서, 고개를 기울이고 웬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장 자신의 일로 힘들어서 기도하고 싶은 다른 일도 많을 텐데, 둘이 예전처럼 함께 있는 것에 신이 나서 금방 다 잊고 있는 것 좀 보라고 미소가 새어나왔다.
“...뭐라고 기도했어?”
나직이 묻자, 웬디가 입 앞에 집게손가락을 대고 속삭였다.
“엄청 멋있고 잘생긴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
“...그게 좋은 남편감이야?”
“그럼?”
“웬디는 남자 보는 눈이 생기려면 아직 멀었구나....”
“알았어. 제대로 해줄게.”
웬디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아드리아나가 다시금 묻자, 웬디는 쑥스러워하면서 대답했다.
“오드리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
또 놀려줄 수 있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아드리아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괜스레 부끄러워지고 마음이 흔들렸다. 고맙다고 웬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미소 지었다.
태어나고 자라서 언젠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건 누구나 갖는 당연한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세상에서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꿈인 것만 같았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와 맞이하는 세 번째 겨울이 저물고 있었다.
***
우아즈의 병원으로 편지를 보내주자, 웬디의 모친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약간의 돈을 넣어왔다. 그것을 받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 돈으로 웬디에게 따뜻한 옷을 사주고 그림을 그릴 도화지도 사줄 수 있었다. 웬디에게도 어머니가 사주는 것이라고 특별히 더 기뻤을 것이다.
새로운 해에도 생활은 비슷했다. 일주일에 5일은 찻집에 일하러 다니고, 아침과 저녁을 웬디와 함께 먹었다. 주말에는 둘이서 가까운 공원으로 가서 자전거도 타는 등 외출도 하기 시작했는데 누구도 극장에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다 자란 웬디가 연극표를 사와서 내밀기 전에는, 둘 중에 누구도 그 말을 꺼내지 않을 터이다.
“오드리, 기타가 있어.”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길에 악기점을 지나다가 웬디가 가게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드리는 기타 없어?”
“응. 별로 칠 시간도 없고.”
일하는 날에는 낮 시간에 집을 비웠고, 주말에도 늦잠을 자고 집안일을 하느라 바빴다. 잠깐 몇 시간 혼자서 뚱땅거리고 위안 삼기 위해서 악기를 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예쁘다. 저 바이올린은 엄청 커.”
“그건 비올라야.”
웬디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유리벽에 달라붙어서 입을 벌리고 악기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게의 여주인이 웃으며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와서 구경해도 된답니다, 아가씨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동생이 처음 보는 악기를 신기해 해서....”
“괜찮아요. 이놈들을 보고 좋다고 말해주면 나도 기분이 좋지요. 우리 남편이랑 아주버님들이 만드신 것도 있어요.”
“와.... 정말요?”
아드리아나는 가끔 주인 부부가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들의 것인 듯한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가 많았다. 때로는 꼬마들이 와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기도 했다.
웬디는 쪼르르 여주인을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전 기타가 마음에 들어요. 예뻐요. 이 커다란 것도 멋있네요.”
“그건 첼로란다.”
가게 안을 구경하면서 눈을 빛내는 웬디를 보며 가게 주인도 흐뭇해했다. 그녀가 악기의 소리를 들려주면, 웬디는 입버릇인 ‘대단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오드리는 기타를 칠 수 있어요. 아주 잘 쳐요.”
“어머, 그러니?”
“잘 치는 건 아니야.”
아드리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웬디에게 말했다. 리노아스에 있을 때 가장 잘했던 것은 첼로였다. 게다가 헤밀에서 아이들에게 기타를 쳐주던 그 때 이후로 악기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몇 년이나 쉬어서 이젠 얼마나 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돈을 벌면 오드리에게 기타를 사줄 거야.”
“나한테 사줄 게 너무 많은 거 아니야?”
“헤헤.”
문득,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클래식 기타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들려줄래요? 기타를 연주하는 아가씨라니 내가 오늘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났네요.”
그 말에 아드리아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뺨을 붉혔다.
“안 쳐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감안하고 들을게요. 부탁해요.”
"부탁해요."
웬디가 금방 여주인의 말을 따라하며 손을 모았다.
머뭇머뭇 기타를 바라보고 서 있자, 주인이 쉬운 미뉴에트 제목을 하나 부르며 쳐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받았다.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아서 부드러워진 손가락 끝에 나일론 줄이 박혀들었다. 아팠지만 그런대로 지판을 누를 수 있었다. 코드를 두어 개 짚어보며 튜닝을 확인하고, 가게 주인이 주문한 미뉴에트를 연주했다. 어렵지 않은 곡이어서 들을 만은 하게 된 것더 같았다.
“흐음....”
“헤헤. 멋있다.”
가게 주인과 웬디가 나란히 앉아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만 손을 놓았다. 그러자 언제부터 열려 있었는지, 문틈에서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부인 한 명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가씨, 반달 알아요? 우리 찰스의 노래를 연주해 줘요. 혹시 반달 몰라요?”
부인이 앞뒤 없이 막무가내로 애원하듯 말하는 모습에 황당해져서 바라보고 앉아 있자, 그녀의 뒤에서 일행인 듯한 다른 부인이 등을 떠밀었다. 앞의 부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통행에 방해가 되니 들어가시죠, 아너슨 부인.”
“아가씨, 반달 몰라요?”
아너슨 부인이라고 불린 젊은 부인은 떠밀려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서도 굴하지 않고 아드리아나만 쳐다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아너슨 부인. 레빙턴 부인.”
가게 주인과 잘 아는 사람들인 듯 그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젊은 부인은 금세 도로 아드리아나에게 관심을 돌리며 한탄했다.
“글쎄, 우리 사장님도 그 노래를 모르신다는 거예요. 아잉, 어쩜 아직도 우리 차알스가 나오는 연극을 안 본 사람이 다 있을 수가 있어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아드리아나가 노아와 함께 보았던 연극이 틀림없었다. 찰스란 로빈 역할을 맡은 남자 배우의 이름이었다.
“제가 레코드를 가져와서 들려드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말이에요. 아가씨, 아가씨는 그 노래 알죠? 아아, 나의 제비꽃. 오, 나의 깜찍스러운 연인이여, 오늘밤 반달 아래서 만납시다!”
젊은 부인은 노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 음정도 박자도 제멋대로였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아너슨 부인, 노래를 마음대로 바꾸시네요. 그런 형편없는 가사가 어디에 있어요?”
“쉿, 레빙턴 부인. 실은 제가 우리 찰스 배 근육을 찾아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노래를 잘 기억하지 못했답니다.”
“지금 그 말 아너슨 씨한테 일러도 되나요? 부끄러우니까 부디 어디 가셔서 테스카 교회의 성가대 대원이라고 하지는 마세요.”
“몰라요. 안 그래도 우리 프란체가 요즘 나 때문에 배 근육 만든다고 애환이 많아요. 벌써 누군가 이른 모양이에요. 난 부담 안 주려고 입 꾹 다물고 있었는데.”
부인들은 아너슨 부인의 남편에게 배 근육이 생기면 함께 수영장에 가서 눈호강을 하자느니, 남편이 맥주를 좋아해서 틀렸다느니 하며 주변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수다를 떠들어댔다. 그러다 갑자기 다시 아드리아나를 붙잡고 말했다.
“반달을 들려주세요. 제발 모르신다고는 말아요, 아가씨.”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표정이나 억양이 너무 웃겨서 몸을 떨었다. 가게 주인도 웬디도 기대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카리나에게 들려주려고 피아노로 연주해본 적은 있었다. 애초에 첼로 협주곡이었으므로 클래식 기타의 아르페지오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몇 년 만에 기타를 쳤다가 잠시 쉬고 다시 현을 짚자 손끝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어머나....”
연주를 시작하자 부인들의 수다가 멎었다. 반달을 들려달라고 조르던 부인도 ‘아, 이 노래예요.’ 하고 한마디 했을 뿐 연주가 끝날 때까지 꿈쩍 않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아드리아나가 부끄러워하며 기타를 내려놓은 순간, 그녀가 덥석 손을 잡았다.
“아, 나도 그렇게 연주하고 싶어요. 제게도 가르쳐 주시겠어요?”
“네?”
아드리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너슨 부인의 밝고 또렷한 눈빛은 시선은 피하거나 고개를 가로젓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가르쳐 주세요. 나는 소니아라고 해요. 교회의 광장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아요. 테스카의 부인들치고 날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수 있죠. 이름이 뭐예요?”
그녀의 거창한 자기소개에 아드리아나는 몇 박자 뒤에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는 오드리예요. 얘는 웬디고, 저희는 은행 근처 마을에 살아요.”
“좋아요, 오드리 선생님.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직 하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소니아가 웃으며 맞잡은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 작품 후기 ============================
발랄한 캐릭터가 좋은 것 같아요. 슬슬 좀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인가요? 다음 챕터쯤이면 만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