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테스카 편 - 새벽을 지나는 동안 =========================================================================
주전자가 울기 시작하자, 아드리아나는 뜨거운 손잡이를 행주로 감싸고서 펄펄 끓는 물을 조리대로 가져갔다. 설탕과 꿀을 넣고 찐득하게 숙성한 사과청을 미리 덜어놓은 컵에다 뜨거운 물을 붓자 순식간에 향긋한 사과 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찻잎을 담아둔 거름망에는 바로 물을 붓지 않고 수온이 적당하게 식기를 기다렸다가 잠시 뒤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에바 씨, 창가 테이블의 손님들께 갖다 주세요.”
“어머, 향이 너무 좋아요.”
며칠 전부터 같이 일하게 된 에바가 쟁반을 받아가며 웃었다. 그녀는 아드리아나보다 한 살 어린 시골 영지의 아가씨였다. 테스카에 와서 이런 일을 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다 아드리아나처럼 외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젊은 남자 셋이 가게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왔다. 늘 ‘빨리 빨리.’를 부르짖는 손님들이어서 아드리아나는 그들이 메뉴를 고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테이블로 찾아갔다.
늘 대표로 주문하곤 하는 빼빼 마른 남자가 아드리아나를 올려다보았다.
“홍차 두 잔, 그리고 밀크티를 아주 달콤하게 한 잔 주세요.”
남자가 말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여러 번 윙크했다. 원래 눈이 하도 작아서 감은 눈이나 뜬 눈이나 비슷했다. 한껏 찡그린 얼굴도 우스웠지만, 아드리아나는 본체만체 금방 음료를 갖다드리겠노라고 공손하게 대답하고 조리대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이제 나도 안 먹힌다.’며 푸념하는 목소리와 일행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늘 그런 식으로 다함께 어울리는데서 아무에게나 시시한 농담이나 장난을 하고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불필요하게 다가오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없어서 편한 손님들이었다.
“홍차 한 잔과 오렌지 주스를 두 잔 주십시오.”
이 남자가 방문한 것은 네 번째였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건 처음 보았다. 얼굴도 꽤 얌전한 인상으로 잘생겼고 예의도 바르기에 처음에는 손님으로서 호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가한 가게 안에서 아드리아나와 둘만 있게 되었을 때 부담스럽게 다정해진 말투로 사적인 질문을 하기에 그 후로는 필요한 말 외에는 섞지 않고 있었다.
가깝게 접근해오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시커먼 마음을 가졌으리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숨어 있는 것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가려낼 수 없는 이상,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는 것이 마음 편했다.
“오드리 씨, 퇴근하실 시간이 다 되어가네요.”
“아, 슬슬 정리해야겠어요.”
테스카에 온지도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가게가 1년 중 최고로 바빠진다는 크리스마스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드리아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일했던 찻집에서 아직 근무하고 있었다. 휴가를 다녀와서 일에 복귀하려던 가게 주인의 가족이, 직원을 뽑았다면 계속 쉬고 싶다고 마음을 바꿔서 자리가 생긴 것이었다.
보수도 나쁘지 않았고 돈을 지급하는 일이나 연장 근무를 하는 등에 대해서도 알아서 제때 처리해주는 점이 편해서, 아드리아나도 다른 곳을 알아보는 데에 시간과 체력을 소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일터의 분위기나 손님들도 대체로 안전했고 간단하게나마 점심을 만들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먼저 들어갈게요. 내일 봐요.”
오후 3시 경, 아드리아나는 가게에서 나와 큰길을 걸었다.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은행은 며칠 전부터 앉을 자리도 없이 복잡해져 있었다. 당장 모레부터 나흘이나 문을 닫기 때문에 미리미리 볼일을 해결해두기 위해, 온 시내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도 다음 달부터는 은행에다 돈을 조금씩 모아봐야지.’
슈하스에도 은행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자기가 가진 재산을 안전한 곳에 따로 맡겨두었다가 써야 할 정도로 풍족한 사람들이 많지도 않았던 데다가, 부유한 이들이라면 보통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과 수단을 자체적으로 갖고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반면 테스카의 사람들을 은행을 많이 이용했다. 다들 언제나 안전함과 편리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또한 각자의 일과 영역이 나눠져서 전문화되는 것을 선호하는 듯했다.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남에게 맡기고, 요리사를 두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식사를 자주 밖에서 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노아에게도 약간 이런 성향이 있었지.’
아드리아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의식을 돌리려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
집으로 향하는 큰길가를 따라서 한참 걷는 동안 잡념이 사라졌다. 이윽고 비탈진 골목으로 들어섰다. 조금만 가면 곧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주변을 신경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길을 걸었다.
이 거리의 어느 골목을 특히 신경 써야 하는지 이제는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술 취한 사람이 놀라게 하는 일이 잦은 곳, 밀회를 즐기는 남녀가 즐겨 찾는 곳, 출퇴근하는 바쁜 사람들로 가득해 어두워져도 덜 무서운 길 따위를 이제는 어느 정도 꿰게 되었다.
“읏, 추워. 창문을 안 닫고 나갔었네.”
집에 도착해서 방문을 열자마자 활짝 열린 창문이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서 얼른 창문을 닫았다.
작고 깨끗한 2층 구석방이었다. 창문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위치였고, 설령 누가 사다리를 댄다고 해도 창문이 작아서 도저히 안으로 침입해올 수 없는 구조여서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해가 잘 들어서 방이 환하고 따뜻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이나 욕실도 늘 깨끗했고, 사라가 소개해준 주인들은 조용하고 점잖은 사람들이었다.
“후.... 얼른 따뜻해져라.”
아드리아나는 겉옷만 벗어놓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벌벌 떨다가 이내 시린 손발이 녹는 것을 느끼고는 베개 위에 얼굴을 비볐다. 비누 냄새가 나는 보송보송한 베개의 감촉에 기분이 좋아졌다.
혼자서 편하게 쉴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근래에 들어 가장 기쁜 일이었다.
노아를 생각하면 여전히 아팠고 죄책감과 후회와 미안함, 원망, 온갖 감정이 밀려들어 이제 막 헤어졌을 때처럼 주체할 수 없이 괴로워지는 때조차 있었다. 그래도 평소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해야 할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따금은 소소한 휴식과 행복도 찾아들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로 괴로워지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게 될 터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아, 그만 씻고 와야지.’
얼었던 몸이 풀리고 나자, 아드리아나는 이불 속에서 계속 게으름 부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목욕을 마친 후에는 며칠 전에 새로 사온 책을 읽다가 일찍 잘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내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일 미리 쉬기로 해서 늦잠을 자도 되었지만, 오전부터 외출할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드리아나는 아침을 만들어 먹고 나서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테스카의 중앙 광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마차를 타지 않아도 40분 정도 걸으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두꺼운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나왔다.
‘지금쯤 다 꾸며놨을까?’
중앙 광장에는 커다란 사철나무가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바로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나무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휴일 당일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오늘이라도 미리 봐두고 싶었다. 헤밀에 있던 때부터 모두와 함께 구경하고 싶었던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장식 나무를.
실은 미네타와 보호소의 아이들 모두와 함께 오고 싶었지만, 뿔뿔이 흩어져버린 아이들을 모아올 날이 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은 그래도 이렇게 원하는 대로 찾아와 볼 수 있으니 나쁜 형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일 오전의 교회는 한적함 속에서 우두커니 아드리아나를 맞이했다.
아드리아나는 교회 안의 긴 의자 구석에 앉아서 멍하니 앞좌석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예배도 없고 사람도 없는 이런 시간에 와서 앉아 있다 가곤 했다. 종교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곳에 오면 좋아하는 몇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다 나름대로 의미 깊은 희망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로레인 수녀, 가슴 설레며 처음으로 이곳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헤밀에서의 추억, 그리고 또 다른 은인인 어떤 남성의 존재나 그밖에도 제시카가 말해준 이상한 관리자로서의 기능이라든지가 이곳 테스카 교회에 느끼는 이미지였다.
그래서 한 번은 예배 중일 때에도 온 적이 있었다. 성직자 옷을 입은 남성들을 훔쳐보며 나를 구해준 사람은 과연 어느 분일까, 하고 혼자 망상에 잠겼었다. 사실 로레인은 그가 ‘테스카에 계신 분’이라고만 말했지 테스카의 성직자라고는 말한 적이 없었다. 아무튼 당시에 그녀와 함께 성지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경위를 보면 교회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왠지 로레인 수녀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져서 직접 묻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와서 감사의 마음을 느끼는 게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저 낯설고 힘들었던 이 땅 어딘가에, 어느 날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살아있게 해준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뭉클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 감상에 매달려야 할 정도로 괴로웠던 순간도, 이제는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아드리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 밖으로 나오다가 마주친 사람을 보고 수줍게 미소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이곳을 찾아왔던 날, 두렵고 울적한 기분으로 휴게실에 멍하게 앉아 있던 아드리아나를 발견하고 들어와서 난로를 켜주고 나갔던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추우셨지요?]
나눠본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지만, 그걸로 부족할 이유가 없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사무실 쪽에는 드나드는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이 시기에는 교회에 새로 등록을 하거나 돈을 내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골목에서 불륜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했던 남자와 아내도 있었다. 교회에서 그들을 보는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제시카의 말대로라면, 남자가 저지른 일을 이곳에 고발하면 그는 꼴좋게 망신을 당하고 알거지 신세가 될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외도 상대가 함께 크게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조금 속이 후련해지다가 곧 공허해졌다. 그렇게 위자료를 많이 받고 혼자가 된 아내도 속이 후련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그런 남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신 쪽이 나은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아내 쪽이 훨씬 행복하게 보였지만, 남자가 있음에 때로는 더 행복하고 때로는 더 크게 불행할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지금 거의 완벽하게 혼자라는 것을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막막했던 것은 잠시뿐이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는 동시에 걱정해야할 누군가도 곁에 없는 것이다.
“어....”
광장 입구에 들어선 아드리아나는 순간 당혹감에 멈춰 섰다. 커다란 나무는 온통 초록색인 본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망연자실하게 높다란 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남자아이들이 근처를 빙글빙글 돌며 쳐다보았다.
“내일 되면 멋있어질 거예요.”
한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서 불도 켤 거예요. 밤에 보면 엄청 멋있어요.”
그 말대로 아드리아나는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나무에 전구를 달아 불을 밝히다니 얼마나 사치스러운 광경일까. 시골 영지에는 어두컴컴한 밤길을 밝힐 가로등도 놓지 못하는 곳이 많은데. 하지만 왕국 내에 단 한 곳 이런 곳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날이 아닌 특별한 날의 꿈을 꾸고, 평범보다 조금 못한 날들을 살아가는 동안 아드리아나가 위로로 삼았던 작은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늘쯤 꾸며놓을 줄 알았는데....”
“맞아요. 저녁 때 아저씨들이 와서 일을 할 거예요. 금방 다 장식해놓고 마지막에 불을 켜보거든요. 우리도 그때 와서 구경할 거예요.”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해가 지면 집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설령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외출한다고 해도, 이렇게 먼 곳까지 오는 건 무리였다. 안전 문제도 있었지만, 내일부터 이어질 강도 높은 노동량을 생각해서라도 체력을 아껴둬야 했다.
광장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또 내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노아와도 이 휴일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왜 와보지 않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멀리 외출을 할 때에는 거의 수도에 갔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도 자연스럽게 수도로 향했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에 겨워서, 다른 계획이나 서운함을 떠올릴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저, 아가씨. 교회에 자주 오시는 분이시죠?”
케이크 가게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고상하게 차려 입은 부인 한 명이 말을 걸었다. 한 번쯤, 지나는 길에 마주치며 눈인사를 한 적이 있는 듯했다.
딱히 교회에 다니는 것은 아니어서 조금 난처해하면서도 미소 지으며 인사하자, 부인은 반가워하며 자기소개를 하더니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약혼 상대가 있으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게에서도, 집주인에게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평판 좋은 귀족가의 아들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에 약혼자가 있어요.”
사실대로 혼자라고 말했다가 몇 번이고 만나보라고 권유해오는 사람도 있었기에, 아드리아나는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독신으로 살려는 고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아직 채 잊지도 못한 사람이 마음속에 있었고 진짜 인연이 찾아와 줄 거라는 희망이 여물기에는 아직 일렀다.
아드리아나는 주인집에 선물해줄 케이크 하나와 혼자서 먹을 케이크를 들고 걸었다.
-가족과 함께 하세요.
연말의 축제와 새해를 맞이하여 테스카 곳곳에 걸린 그 문구도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테스카이기 때문에 저런 이상한 문구가 걸리는 것이다. 보통의 영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있지 않을 일이 흔치 않았다. 리노아스에서는 가족과 함께 식사하지 않는 끼니의 횟수가 일 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 말이,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시리게 와닿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봐요. 방이 춥지는 않나요?”
“네,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한델 부인.”
가정부와 함께 장을 보고 오는 듯 짐을 잔뜩 든 집주인과 현관에서 마주쳐, 아드리아나는 케이크를 전해준 후에 방으로 올라갔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낳아준 가족에게는 돌아갈 수 없다. 앞으로 보금자리가 될 가족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은 해보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던 꿈속의 완벽한 교감상대 역시, 아드리아나가 아직 어려서 꾸었던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데 만날 수 없을 것 같고,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아드리아나의 안에 생겨난 이런 모순은 정서적인 데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낮에는 결벽하고 금욕적인 생활로 육체를 지키고 있는 반면, 밤에는 타버릴 것 같은 열로 혼자 앓았다. 아니, 꿈속의 일에 불과하니 그것을 육체의 문제라고 말하기에는 모호한 영역일 수도 있다.
잠자리에 누워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가도,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꿈을 꾸었다. 아드리아나는 꿈속의 그에게 매달려서 그가 어떻게든 해주기를 속으로 애원했다. 현실에서는 그 누구를 상대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건만.
그의 몸을 원하고, 그가 열을 달래주기를 바라며,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채워지고 싶은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마치 그래본 적이 있는 것처럼 구체적인 과정과 초래될 고통과 환희를 모두 상상해내고 있었다.
허벅지를 벌리고 그를 끌어안으며 어서 그가 그 다음을 해주기를 바랐다.
‘미쳤어. 망측한 장면을 많이 봐서 그런가 봐.’
가끔 날이 어두워진 후에 퇴근할 때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애정행각을 하는 이들을 보았다. 대개는 은밀한 시선을 나누거나 얼굴과 손, 팔 같은 곳을 슬쩍 쓰다듬는 정도였지만, 더러는 입을 맞추거나 여성 쪽의 스커트를 걷어붙이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싫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처음으로 크게 충격을 주었던 불륜 연인 정도로 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드리아나가 방 안을 지키고 있는 밤 시간마다 안전하지 않은 다른 구역에서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을 생각하면 뺨이 뜨거워졌다.
‘...더러워.’
하지만 꿈속에서는 자신도 그들과 똑같아졌다.
어쨌든 꿈속의 그 역시 실재하는 남편이나 약혼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욕정하고 안기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가 되었다. 버클리의 것을 보고 몸서리쳤던 때와 달리, 그의 것을 찾으려 손으로 허공을 더듬었었다.
‘창피해. 왜 자꾸만 불결한 생각이 드는 거지?’
아드리아나는 이불속에서 눈을 질끈 감으며 베개를 머리 밑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이런 생각을 해버렸으니, 지금 눈을 감으면 또 그를 찾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정말로 싫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랑 같은 것은 오가지 않았다. 단지 보자마자 그에게 매달릴 뿐이었다. 억지로 몸을 열려던 버클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는데도, 지금 이 순간은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고통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며 남자를 재촉했다. 자신의 위에 있을 그에게서 아무런 냄새도 감촉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 괴로웠다.
그의 영혼이 늘 자신과 함께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육체는 그렇지 못했다. 그 둘 모두를 채우고 이어져 있고 싶었다.
희미하게 그의 체온과 체취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금세 숨이 가빠졌다. 저번보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버둥대고 있는 동안 그의 일부가 허벅지 사이에 살짝 닿았다. 뱃속이 조여들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마음은 더욱 조급해지고 갈증이 커져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해석은 되지 않았다. 그는 점점 흐려지고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눈을 뜨고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벼운 혐오감과 자책감이 밀려들었지만 잠기운이 달아날 때쯤이면 함께 물러나는 감정이었다.
“으으....”
몸이 영 삐걱거렸다. 잠을 잘못 잤나 하다가 곧 달손님이 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방 정리를 하고 세수를 한 후 심란한 마음으로 출근 준비를 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흘은 가게에서도 고생을 해야 할 터인데.
아드리아나는 몸이 힘들어서 나태해지려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일찍 집을 나왔다. 그리고 가게에 가는 길에 은행 앞의 공중전화에 들렀다. 이 시간쯤 전화하면 로레인이 직접 전화를 받을 때가 많아서 편했다.
“로레인, 잘 지내셨어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시라고 전화해봤어요.”
“오드리!”
로레인의 목소리에서 뭔가 곧 칭얼거릴 듯한 콧소리가 났다.
“있죠, 어제 웬디가 여기에 찾아왔어요. 다짜고짜 수녀가 되겠다는 거예요.”
“네에?”
“집에는 죽어도 안 들어가겠대요. 고모할머니 댁에 산다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말을 안 해요. 오드리를 찾기에 전화가 오면 알려주겠다고는 했는데....”
“지금 옆에 있어요?”
“아니, 지금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잘 아는 분께 잠깐 맡겼어요. 근데 저기....”
로레인은 뭔가가 곤란한 듯 자꾸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작게 말을 이었다.
“얼굴에 멍이 들어서 왔는데 그 댁의 어른들이 그런 건 아니라고 해요. 혹시 몰라서 의원에게 보였지만 특별히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니라고 했어요.”
아드리아나는 숨을 삼켰다. 수화기를 붙든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손바닥에 땀이 나서 그렇게하지 않으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저녁에 제가 갈게요.”
웬디와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슈하스를 떠나게 되었다고 알려준 뒤 이사 와서 아직 새 주소를 주지 못했다. 주고받은 편지에 안 좋은 내용이 적혀 있던 적은 없었다. 웬디는 언제나 학교에서 칭찬 받는 일들, 아드리아나와 나중에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많이 써주었다.
‘웬디....’
아드리아나는 로레인과 약속을 잡은 후에 전화를 끊었다. 마차를 예약해놓고 저녁에 일이 끝나자마자 출발하면, 내일 새벽 전에 돌아올 수 있을 터였다.
============================ 작품 후기 ============================
하루 쉬어서 빵빵하게 왔습니다. 부끄러운 후기에 격려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고 다시 코멘 주신 독자님께도요ㅜㅜ 쿠폰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둘이 잘된 후의 분량도 넉넉합니다. 둘이 애틋 달달해지는 장면들을 쓰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거라서요.uu 손발 펴실 틈이 없을 테니 잼잼(죔죔)을 많이 해두세용.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