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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30화 (30/140)

00030  테스카 편 - 이방인  =========================================================================

“넌 이 호텔에서 살 생각이야?”

입 안에 음식을 가득 넣은 채로 제시카가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방금 감자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생긴 게 부자 같이 생기기는 했는데 일을 구하려는 걸 보면 좋은 처지는 아닌 거 같고. 나랑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아드리아나는 벌써 일주일 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계속 집을 알아보는 중이었지만 그렇게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주거 문제는 아주 신중해야 했다. 일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집도 찾아보고 있어요. 혼자라서 방 한 칸을 빌려야 하는데 마음에 드는 곳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요. 같은 집 안에 남자와 함께 살아야 하거나 밤에 일하는 여성들이 있어서 생활이 서로 불편할 것 같은 곳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집까지 구해야 한다고?”

제시카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때려치우고 그냥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 여긴 너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재미 볼 일이 없어.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제시카는 정말 특이한 여성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도 사람들 눈에 특이하게 보일 거라는 자각이 있었지만, 제시카 또한 다른 의미로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빗질을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풀어 내린 긴 생머리와 큰 키와 넓은 어깨 같은 눈에 띄는 외모도 그랬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 말투였다.

아드리아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무례한 말투를 들어본 일이 없었다. 적어도 여성의 앞에서 그런 말씨를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듯한 그 직설적인 내용이란....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어정쩡한 호의가 아닌 맹목적인 신뢰가 솟아날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를 위험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일까. 제시카가 언행은 무례했지만 그 속은 정의로운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고향에 갈 수 없어서 혼자 있는 거예요. 살다 보면 여기가 제 고향이 되겠죠.”

“그런 날은 안 와. 네가 무슨 수로 이런 데서 사냐.”

그녀가 너무도 거침없이 잘라 말하는 것이 우스워서 아드리아나는 쿡쿡 웃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벌써 네 번째였다. 제시카는 일 때문에 호텔에 와 있다고 말했었지만, 볼 때마다 딱히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드리아나가 밥을 먹으러 가자고 방으로 찾아가 봐도 항상 빈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너 말이야. 어디 시골 영지 같은 데에 찾아가서 점잖은 댁 하녀로 들어가든지 해. 기왕이면 남자가 없는 집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별 수 없고. 불특정 다수에게 굴려지기보다는 소수의 사람에게 굴려지는 게 낫지.”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말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왠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도.

“여기서 지내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해. 아니면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었거나. 넌 둘 다 아니잖아.”

“저도 살면서 적응하고 배우면 돼요. 지난번에 있었던 마을에서도 그랬어요. 저 의외로 할 줄 아는 것도 많이 있어요.”

“머리 예쁘게 빗는 거 아니면 음식을 안 흘리고 깨끗하게 먹기, 뭐 이런 거? 넌 여기서는 그냥 어린애야. 지나가다가 아무한테나 물려갈 수도 있는 수준이지.”

제시카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며 접시를 비웠다. 그리고 한 그릇을 더 주문했다. 아드리아나는 순간 노아를 떠올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아직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그가 생각났지만, 그런대로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으로 2년. 노아를 지난 2년간 만났으니까 또 그만큼만 있으면 잊힐 거야.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컵에 손을 댔다.

제시카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뜨고, 아드리아나는 조금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에게 들은 말 중에 틀린 말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녀처럼은 될 수 없을 터였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제시카라면 힘으로도 자기 몸을 지켜낼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면서, 또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똑똑해져야 해. 공부를 잘 하는 거랑은 달라. 바보처럼 자꾸만 속아넘어가면 안 돼.’

“좋은 오후입니다, 아가씨!”

뒤에서 누군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한껏 멋을 부린 청년이 아드리아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경계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으며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제가 한 눈에 반한 귀여운 여자랑 결혼을 한답니다. 주말에 시내 교회에서 식을 올릴 거예요. 소식이 실려 있으니 보시고 아가씨도 저희를 축하해주세요.”

남자가 눈짓하는 곳을 쳐다보니, 똑같은 신문을 다발로 허리에 낀 채 웃으며 다른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자가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겨우 어깨에 힘을 빼며 미소 지었다.

“아, 축하드려요. 행복하게 사세요.”

“고마워요. 아가씨도 시간이 되시면 꼭 참석해 주세요.”

남자는 활기차게 말하고서 이내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 식당을 나갔다.

아드리아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신문을 펼쳐 보았다. 왕국 내의 주요 혼인 소식이 실리는 지면 한쪽에는 직접 신청해서 광고를 낼 수 있는 면이 있었는데, 방금 본 남녀의 사진과 예식 정보도 그곳에 작게 실려 있었다.

그러다 바로 그 옆 페이지에서, 아드리아나는 또다른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마티아스 스콰이어. 그리고 그의 아내에 관한 기사였다.

‘...결혼을 했어.’

마티아스는 진즉에 새로운 신붓감을 찾아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기사에는 그들이 보금자리를 옮기며 내놓은 대저택의 경매가가 얼마라더라 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하기야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었다. 아드리아나가 그의 신부로 가던 길에 조난당한 후, 마티아스는 금방 다른 여자를 찾아서 결혼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스콰이어 가에서는 이미 훨씬 전에 아드리아나를 쫓지 않고 포기했을 것이다. 애초에 쫓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드리아나의 집에서는 어떨까. 리노아스에 돌아가도 괜찮은 걸까.

‘버클리와의 일 때문에 안 될 거야.... 아버지는 나를 또 어딘가로 시집보내려고 할 거야....’

제시카만 해도 아드리아나 같은 여자애는 시집이나 가는 게 그나마 나을 거라고 말했다. 테스카의 생활이 생각보다 더 녹록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와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마티아스를 보고도 과분한 남자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버지가 골라주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손놓고 있던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아직도 먹고 있네. 새 모이 먹는 것 같다.”

제시카가 돌아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비딱하게 앉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제시카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일이 끝날 때까지.”

“그게 언제인데요?”

“글쎄. 내 고용주 마음이겠지. 며칠 정도라고 했었으니까 뭐.”

제시카가 의자에서 팔을 내리고서 턱을 괴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너도 안 나가고 싶은 거지?”

갑자기 직설적으로 말해오기에, 아드리아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그녀와 헤어지게 되면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너 사람한테 되게 의지하는 타입이구나. 문제 있지 않나?”

아드리아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에 든 음식만 우물거렸다. 이렇게 면박을 받고 창피 당해서 울 것 같은데도 그녀가 싫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구제불능이라고 스스로도 자조했다.

과거에도 만나지 얼마 안 되어서 이렇게 무례한 말을 듣고도 맹목적인 우정을 느꼈던 사람이 있었다. 카리나. 어쩌면 제시카에게서 그녀와 같은 모습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쌀쌀맞은 말도 곧잘 하지만 자신을 보호해주고 생각해주었던 그녀의 모습을.

“...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의지하고 의지받는 게 좋아요. 일방적으로 민폐를 끼치려는 건 아니에요.”

용기 내어서 말했지만 제시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받아쳤다.

“너한테 의지하다니 어떤 지경의 인간이어야 하는 거야? 그건.”

“너무해요....”

입을 삐죽 내밀자 제시카는 면박 주는 것을 그만두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니, 마음은 가상해. 네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냥 심란하다. 누가 데리고 살지 참....”

제시카는 더 얘기하기 귀찮다는 듯 이내 몸을 뒤로 당기고 앉았다.

그녀는 아드리아나가 식사를 하는 동안 맥주를 마시며 예비부부가 놓고 간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아드리아나도 더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이렇게 있는 동안에는 호텔이 낯선 숙소가 아닌 ‘집’처럼 느껴졌다. 이런 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점심을 먹고 나서, 아드리아나는 방에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일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부터 시내 길가에 있는 찻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주 정도 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는 곳이었는데, 아드리아나도 시간과 금전적 여유를 확보하면서 일을 시험해볼 겸 그곳에 출근하게 되었다.

찻집은 아침부터 열고 저녁 7시에 문을 닫았다. 아드리아나는 2시에 출근해서 하루에 5시간을 일했다. 슈하스에서 일하던 찻집과는 딴판이었다. 바로 옆에 은행이 있어서 마차가 많이 서는 위치라 늘 손님이 밀려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힘들었다.

일이 끝난 후에 호텔로 돌아와서 늦은 저녁을 먹고 씻으면 9시가 넘었다. 그러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생각할 틈도 없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장점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렇게 일주일치 급료를 받게 된 날, 제시카가 좋아하는 가게의 맥주와 요리를 대접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었는데 아드리아나가 처음 일을 시작했던 일요일보다 2배는 손님이 많은 것 같았다. 테스카 시내 한 곳으로 왕국 전체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붐빈다는 12월을 몇 주 남겨놓고 벌써부터 혼잡함이 절정이었다.

“오드리 씨. 혹시 오늘만 밤까지 연장해서 일해줄 수 있을까요? 3시간을 더 일해주면 하루치 일당을 더 드릴게요.”

아드리아나는 피곤해서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고 제시카와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정신없이 바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며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루치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유혹도 뿌리치기 어려웠다. 여유 부리며 고급 호텔에 머물고 있지만 가능한 한 돈을 모아두는 게 좋을 터였다. 보석들은 슈하스에서 가지고 나오지도 않은 채였다.

결국 10시를 조금 넘겨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몸은 완전히 지쳤지만 8일치의 보수가 든 두둑한 봉투를 받아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제시카는 자고 있겠다.’

아드리아나는 이따금 지나치는 마차를 조심하며 큰길가로 걸었다. 테스카의 시내에는 가로등 같은 시설도 잘 되어 있었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골목 곳곳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시각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다니는 건 처음이네.’

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가로등 불빛이며 드물게 다니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길을 밝혔다.

아드리아나는 주위를 잘 살피며 15분 거리에 있는 호텔까지 길을 재촉했다. 도로를 건넜을 때 마차가 서기에 잠시 한쪽에 비켜서 기다렸다. 마차 안에서 내린 남자가 뒤따라 내리는 여자의 손을 잡고 내려주는 동안 멈춰 서 있다가, 그 남자가 신문을 돌리던 새신랑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 근방에 사는 부부인가 봐.’

첫 눈에 반해서 결혼한다던 그의 낭만적인 말을 떠올리며 흐뭇한 눈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의 아내가 아니었다.

남자가 얼굴을 가리듯 모자챙을 살짝 내리고서 여자의 손을 잡고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깔깔대며 좁은 골목에서부터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여기까지 비축 끝! 이제 이쪽이 앞서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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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코멘 등 고맙습니다.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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