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테스카 편 - 이방인(발렌틴) =========================================================================
발렌틴은 엊그제 오랜만에 투스미아에 있는 고향에 갔다가, 오늘 오후 늦게야 테스카의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갔던 것은 거의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세 살 터울인 막내 동생 스테판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서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온 친지들에게 '발렌틴은 언제 장가가느냐'고 시달리다 온 만큼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쉬려고 했으나, 그는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굳이 말하자면 쫓겨난 것이다. 동생 부부가 신혼을 아이넨에서 보내겠다며 발렌틴의 집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실컷 마시고 놀고 오시지요, 형님. 이다음에 형님께서 장가가시면 얼마든지 저희 집을 내드리겠습니다. 참, 관광은 신세지지 않고 저희끼리 알아서 잘 할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스테판은 그렇다 쳐도, 신부까지 같이 생글생글 웃으며 초면인 시숙(*남편의 형)을 내쫓는 걸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한 집안의 식구 중 결혼을 하는 이가 있으면 얼마간 집을 비워주는 것이 투스미아의 전통이었다. 근래에는 낡아빠진 멍청한 관습이라고 욕하는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발렌틴은 그에 대해 치를 떠는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억울했던 것은, 외국에까지 와서 분가한 자신이 어째서 식구 대표로 그 일을 당해야 하는가였다. 스테판의 말마따나 억울하면 장가가라는 압박의 하나이겠으나.
“이런 짓은 누가 시킨 건지. 못 본 사이에 애를 다 버려놨군.”
뒷좌석에서 발렌틴이 중얼거리자, 운전석의 펜이 비장하게 말을 받았다.
“바쉬 공작님이라고 백 퍼센트 확신합니다. 설마하니 양친께서 웨버 경께 이리 가혹한 일을 계획하실 리가 없지요. 로레인 아가씨도 요즘은 많이 유해지신 듯하고 말입니다.”
“그 노인네는 잊고 살 만하면 나를 괴롭히긴 하지.”
“신붓감을 데리고 가실 때까지 계속하실 걸요.”
“어쨌거나 로레인이 남편이란 자를 데리고 쳐들어올 일은 없으니, 내 집에서 쫓겨날 일은 또 없겠지.”
발렌틴은 아쉬운 대로 회사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베르몬드가 들러달라고 채근하고 있어서 어차피 내일쯤 가보려던 참이었다.
애주가인 베르몬드는 투스미아산 위스키를 특히 좋아해서, 발렌틴의 손에 들린 위스키 상자를 보더니 반색하며 맞이했다.
“어쩐 일로 술을 다 드십니까?”
“스테판이 장가도 갔고 나는 집에서 쫓겨났으니 술이나 퍼마시려고 하네.”
‘경사도 있었고 밖으로 나온 김에’라는 뜻일 뿐이었다. 또한 남동생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베르몬드는 표정이 근심스러워졌다. 발렌틴은 속으로 뒤늦은 후회를 했다. 손아래동생이 먼저 장가를 간 일로 속상해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실 투스미아에서 오래 산 그로서는 형제간의 서열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아이넨의 지인들이 어떤 식으로 보는지는 잘 알고 있었을망정.
“웨버 경께 하루빨리 더 좋은 일로 술을 받아보고 싶군요.”
“음.... 형제가 마음에 들어하던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니 이 정도면 거의 제일 좋은 일이 아닌가.”
발렌틴의 말에, 베르몬드가 그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괜히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머쓱해졌다.
올해로 만 스물일곱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면 스물여덟이다. 아는 또래 중에는 독신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통은 가정을 꾸리고 벌써 아이 하나, 둘은 가졌을 나이였다.
도시화된 테스카에서 일하는 남자들 중에는 서른 미만의 독신도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본가의 어른들은 ‘다 고자놈들이다.’ 하고 딱 잘랐다.
“...웨버 경께서는 아이넨의 여성은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베르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딱히 뭐라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말없이 바라만 보자, 그가 머무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투스미아의 여성이나, 혹은 코니스의 여성은 어떠십니까? 사실 코니스 쪽은 아주 좋지요. 이국의 남성을 만나려는 대범한 여성이 드물다는 게 문제겠습니다만, 잘 아는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면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는 서로 알고 지내게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발렌틴의 혼사 문제를 재촉하지 않는 유일한 측근이었다. 바로 이 순간 전까지는.
“솔직히... 그만 아내를 맞으셔야 할 듯합니다.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쓸데없이 뒷말을 들으시는 것도, 혼자 지내시는 것도 요즘은 걱정이 많이 됩니다.”
괜히 술잔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온통 걱정시키고 다니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만 같았다. 그다지 작정하고 독신인 것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발렌틴은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쓴웃음으로 대신했다.
“처량 맞구먼, 노총각 신세.”
회사를 나와서 차가 출발하자마자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펜이 훗, 소리 내서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난 호텔 앞에다 내려놓고 자네는 놀러가 봐도 좋아.”
웃으려면 웃으라고 내버려두고, 발렌틴은 가죽 시트에 깊이 몸을 묻었다.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몇 잔 마셨더니 졸리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이미 늦은 시각이기도 했다. 오늘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에 곯아떨어져서 내일 낮까지 처박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억지로 눈을 뜨고 버텼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1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어서, 데스크에는 직원이 한 명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총지배인의 조카가 곧 일을 시작할 거라는 말을 들은 듯도 했다.
“발렌틴 웨버. 7시쯤에 전화를 했소.”
이름을 말하자, 청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긴장되었다. 그는 약간 허둥대며 명단을 뒤졌다.
발렌틴은 초면인 사람에게 상냥하게 웃어줄 만한 비위는 없었지만,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나름대로의 친절을 발휘했다.
“다른 건 됐으니 열쇠만 내놓게.”
그러나 직원은 독촉한다고 받아들인 듯, 허겁지겁 열쇠 하나를 꺼내서 데스크 위에 올려놓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여기 있습니다, 웨버 경.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발렌틴은 열쇠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고 승강기로 향했다.
501호. 퀸 사이즈 침대 하나가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작은 방이었으나, 바다가 보이는 쪽이었고, 복도 구석에 있어 위치가 좋았다. 잠만 실컷 자고 바로 떠날 터라 창밖을 볼 틈이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
조용히 열쇠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의 불빛으로 방 안이 희미하게 보였을 뿐, 무슨 일로 커튼을 다 내려놓은 건지 온통 암흑이었다.
잠깐 벽으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찾다가, 그냥 대충 길을 더듬으며 침대를 찾았다.
그리고 침대 바깥쪽에 걸터앉아서 겉옷을 벗었다. 넥타이를 풀며 작게 한숨을 내쉬자, 숨결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겨우 두 잔을 마셨고, 그 후에 마신 차의 양이 훨씬 많았는데도 술독에 빠졌다 나온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씻겠다고 욕실을 찾았다가는 씻다가 알몸으로 자빠져서 영영 못 깨어날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렌틴은 벗어낸 겉옷과 넥타이를 테이블이 있음직한 위치에 던져놓고서, 셔츠 앞 단추를 몇 개 풀어낸 뒤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 바깥쪽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가, 어딘가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몸을 침대 안쪽으로 조금 옮기며 웅크리자, 왠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손에 말아 쥐고 있던 이불을 놓고, 팔을 옆에다 편하게 내려놓았다.
그 순간, 손등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발렌틴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불을 거의 머리까지 끌어올리고서 눈만 내놓고 누워 있는 사람이 보였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혼자 평온하게 잠들어야 할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눈동자라니. 베개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나 덩치를 봐서는 여자인 것 같았다.
발렌틴은 이불 속에서 상대방에게 닿아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그리고 잠시 서로 숨죽인 채 쳐다보고 있다가, 상대방이 꿈틀꿈틀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기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놀란 듯, 여자가 더욱 뒤로 물러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눈이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봐요, 그만-.”
뒤로 물러나면 위험하다고 말해주려 했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침대는 높이가 꽤 되었다.
“이런 젠장.”
발렌틴은 침대를 돌아서 여자가 떨어진 쪽으로 가보았다.
여자는 몸을 만 이불을 꼭 움켜쥔 채, 그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흐....윽....”
성대가 굳어버린 듯, 마비된 것 같은 흐느낌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다가 말았다.
“괜찮소? 어디 좀 봐요.”
발렌틴이 다급하게 물으며 어깨를 안고, 혹시 피라도 나지 않았을지 바닥을 살펴봤지만 컴컴해서 보이는 게 없었다. 두꺼운 겨울 이불로 돌돌 말려 있어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떨어질 때 엄청난 소리가 났으니 아프긴 꽤 아팠을 것이다.
“흐흑....”
여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불 속에서 작게 울기 시작했다.
“아, 이런... 미안하오. 괜찮소?”
여자가 도망치지도 못하고 굳어서 서럽게 울기에, 발렌틴은 저도 모르게 태도를 낮추고 죄인처럼 그녀를 달랬다. 그러다 이내 그것이 효과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 자다가 봉변을 당한 여자가 침입자에게서 무슨 위로를 받겠는가.
“미안하오. 착오가 있었소. 당장 나갈 테니 울지 마시오. 가서 직원을 불러주겠소.”
발렌틴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방을 나왔다. 어둠 속에서 서두르느라 테이블에 팔꿈치를 부딪치고 혈압이 확 올랐지만, 겁먹은 여자가 들을까 봐 차마 욕설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문을 닫고 나와서,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쳐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1층에 내리자마자 객실 지배인의 모습이 보이기에 501호에 가달라고 일렀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발렌틴을 쳐다보며, 옆걸음질로 승강기로 향했다.
“웨버 경,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 오신 거예요?”
“아무튼 가보시오. 내가 여자를 침대에서 떨어뜨렸소.”
“예에?”
복도를 조금 돌아가자 데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열쇠를 내주었던 직원이 그대로 지키고 서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전 발렌틴이 본의 아니게 겁을 주고 온 그 아가씨 못지 않게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자비심이 발휘되지 않았다.
발렌틴은 데스크 앞으로 가자마자 직원의 멱살을 잡고, 바깥의 손님에게 보이지 않을 구석으로 끌고 갔다. 떨고 있는 그 청년보다는 아마도 자신 쪽이 더 식은땀을 흘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미아가 이런 식으로 날 감방으로 보내라고 하던가?”
“예에? 웨, 웨버 경. 무, 무슨 말씀이신지....”
“방에 여자가 있었어.”
“그, 그야....”
“그야?”
“저, 일행분이 아니신지....”
직원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약자명에 두 분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직원이 데스크로 가서 명단을 보여주었다.
어제 날짜로 된 예약자 중에 발렌틴의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아래에 새로 추가한 듯한 이름이 있었다. '오드리' 라는 여성의 이름이었다.
“...이건 어제 날짜고, 아까 내가 오늘 저녁에 전화했다고 했잖나.”
발렌틴은 힘이 쭉 빠져서 데스크에 팔을 짚고 서서 크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여자와 이런 식으로 쓸모없이 얽혀야 하는지 자신의 운명에 울화가 치밀었다.
곧 객실 지배인이 돌아와서 직원과 발렌틴에게 확인을 해주었다.
“죄송합니다. 며칠 전에 가족 분께서 대신 예약을 하셨던 듯한데, 따로 예약이 있었던 걸 직원이 미처 확인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녀가 슬쩍 흘려보낸 따가운 눈길을 받은 청년은 더욱 사색이 되어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발렌틴은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좋아. 나는 됐다고 치지.”
아무래도 예의 그 총지배인의 조카란 건 이 청년인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회장으로부터 이어진 혈연 특혜가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었다.
“아니, 웨버 이 사람이 여긴 웬일인가!”
때마침 생각하고 있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발렌틴은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총지배인인 루미아가 장난스럽게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를 하고서,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다가왔다.
“자네는 왔으면 내 얼굴부터 보러 와야지, 왜 여기서 우리 직원을 쥐 잡듯이 잡고 있나? 응? 우리 직원이 귀엽지 않은가?”
“귀여워만 하지 말고 교육을 제대로 시키게.”
“허, 왜 또 언짢아지셨어. 우리 막내가 실수라도 했나?”
“루미아 놈들이 다 그렇지.”
“...큰 사고로구먼. ‘루미아 놈들’ 나오는 걸 보니.”
그는 겸연쩍은 듯 쩝 입맛을 다시더니, 금세 다시 얼굴이 환해져서 자기 사무실로 가자고 꼬드겨왔다. 여유만 되면 카드 게임이나 체스 따위를 하자고 달려드는 남자였다.
“딱 한 판만 하자고. 자네가 이기면 숙박비는 내가 내는 걸로, 어떤가?”
“오늘 숙박비는 당연히 자네가 내야할 거야. 난 잠이나 자겠네.”
발렌틴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데스크 위로 척 손을 내밀었다. 청년이 아직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멍하니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열쇠. 이번엔 사람 없는 방으로 주게.”
청년이 앗, 하고 다시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방의 아가씨를 놀라게 한 걸 사과하고 싶네만.”
발렌틴은 세 명의 직원들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여자 지배인을 향해 말했다.
그녀가 송구해하던 표정을 싹 지우고 눈을 빛냈다.
“마침 근사한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보내드리면 어떨까요?”
“알아서 해주게.”
같이 봉변을 당한 입장에 바가지까지 쓰게 될 것이 뻔했지만, 발렌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
다음날 아침, 그는 호텔 내의 식당에서 루미아와 아침을 먹다가, 입구에서 눈에 익은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구석 자리로 들어가는 그 여자의 모습을, 그는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의 색이 전보다 옅어져 있었고, 몸도 전보다 마른 듯했지만, 그녀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바로 어제 그런 식으로 부딪치기 이전에, 분명히 더 오래 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저 여자였나.’
미간을 좁힌 채 뚫어져라 대각선 구석 자리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루미아가 발렌틴의 시선을 좇아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빚쟁이라도 봤나?”
“아무것도 아니야.”
발렌틴은 식사를 하며 루미아와 이야기하던 중, 결국 머릿속에서 여자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재작년인가, 크리스마스 때 슈하스의 교회에서 보았던 여자였다.
다시 여자가 앉아 있는 자리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혼자 얌전히 식사를 하면서도, 이따금 불안해 보이는 시선으로 산만하게 주위를 흘끔거렸다.
‘뭐지. 쫓기는 초식동물도 아니고....’
저번에 봤을 때도 저런 인상이었던가, 갸웃해졌다. 오래 전의 기억이라 왜곡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때는 지금만큼 초췌하거나 불안해보이지 않았었다.
아무튼 잠시나마 넋을 빼놓았던 여자였다.
그리고 로레인으로 하여금 오빠의 이름을 사용하게 할 만한 지인일 터였다.
발렌틴은 가만히 그녀를 관찰하고 있다가, 펜이 호텔로 찾아와서 합류하자 금방 몸을 일으키고 그곳을 나왔다.
“마다하스에는 1시까지 가기로 하셨는데, 어디 들르실 겁니까?”
“집으로 가지.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두고 온 것도 있고....”
발렌틴은 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리다가, 펜에게 물었다.
“제스는 요즘 뭐하고 지내나?”
“치안대 시험을 친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또 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가.”
망설임이 담긴 눈으로 차창 밖을 보고 있다가, 다시 오드리라는 이름의 여자를 떠올렸다. 슈하스에서 보았던 그녀의 옅은 장밋빛 뺨과 빛나는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그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겁먹은 짐승 같은 수척한 모습을.
간밤에 발렌틴에게 당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극심한 변화였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외면하지 못할 책임감이 마음을 괴롭혔다.
“펜. 제스에게 연락해서, 며칠 정도 일할 생각 없냐고 물어봐주게.”
============================ 작품 후기 ============================
선,추,코,평 고맙습니다. 드디어 몇 편 더 올리고 내일이면 일반 연재분과 순서 역전할 듯하네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