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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26화 (26/140)

00026  테스카 편 - 이방인  =========================================================================

아드리아나가 인사를 하자, 남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서 문을 열어주었다.

호텔 건물 안에도 그와 같이 덩치가 크고 외국인 같은 딱딱한 인상을 한 직원들이 있었다. 같은 나라에서 온 외국인인 듯했다.

‘이시스니까, 투스미아에서 온 사람들인가 봐.’

과연 거인이 세운 왕국의 후손이라고 자부할 만한 생김새였다. 아드리아나가 들어가서 두리번거리자, 복도에 서 있던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리노아스의 하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척척 짐을 들어주고 데스크 직원에게 가서 예약을 확인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방은 5층에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5층이요...?”

직원이 준 열쇠에는 501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멀리 바다도 보이고 전망이 좋답니다, 아가씨.”

직원의 굳은 조각상 같았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부르는 ‘아가씨’에서는, 슈하스가 아닌 리노아스에서 듣던 때와 같은 공손한 느낌이 묻어났다. 어쩐지 클로제 남작의 영애이던 시절로 돌아간 듯,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5층이라니 계단을 왔다 갔다 하려면… 외출할 때마다 힘들겠네.’

테스카 밖에서는 3, 4층짜리 건물들도 그리 흔하게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아드리아나가 본 5층짜리 건물이라면 우아즈 영주인 백작의 성이 유일했다. 층간도 엄청나게 높은 그 성의 까마득한 계단을 직접 올라본 적은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벌써 지친 기분이 되어서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직원이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그의 등에 머리를 부딪쳤다.

“앗..., 죄송해요.”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아가씨.”

직원은 키가 너무 커서, 아드리아나가 바로 뒤를 졸졸 따라오다 부딪치는 것을 못 본 듯했다. 아드리아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올려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자, 그가 당황하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민망해라….’

직원은 계단을 오르지 않고 1층 내의 어떤 방 앞에 멈춰 섰다. 문 대신 커튼이 드리워진, 아무것도 없는 좁은 방이었다.

“타십시오.”

직원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그를 쳐다보다가 얼떨결에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직원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벽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덜컹, 바닥이 흔들렸다.

“어, 엄마야.”

아드리아나는 허둥지둥 돌아서서 벽을 짚고 매달렸다. 땅이 계속 움직였다. 붕 떠서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바닥의 카페트를 쳐다보고 있다가, 물끄러미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지, 지진이 났나 봐요. 땅이 흔들려요.”

“아…. 저, 아가씨. 이것은 승강기입니다. 5층까지 올라가서 내려드릴 겁니다. 미리 설명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직원은 아드리아나를 부축해주며 승강기에서 내린 후에도 연신 사과했다.

“저희 호텔은 대개 잘 아시는 분들이 계속 이용해주시는 편이어서, 초행인 분이 계실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여긴 신기한 게 많이 있군요. 잘 알아보고 올 걸 그랬어요. 이제 괜찮아요.”

아드리아나가 팔딱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미소 지었다. 직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거듭 사과하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실은 제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이 미숙합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여길 잘 아는 분이 예약하라고 해주셔서 오긴 했는데, 잘 모르는 게 많아서….”

아드리아나는 당혹감으로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식히며 직원을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면 대체 로레인은 어떻게 이런 호텔을 알고 소개해준 것인지 놀랄 일이었다. 검소하게 사는 성직자의 신분으로 이런 사치스러운 곳을 안다는 것도 의아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인의 이름으로 예약해서 꽤 높은 할인을 받아 주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 되었고, 호텔의 이름에 끌렸던 것도 있어서 아드리아나는 흔쾌히 이곳을 택했던 것이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프론트로 전화를 걸어주십시오. 테이블 위의 책자를 보시면 이용에 큰 불편은 겪지 않으실 겁니다.”

“책은 읽을 수 있어요. 고마워요.”

직원이 마치 글자는 읽을 줄 아는지 못내 염려하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기에, 아드리아나는 웃으며 안심시켜주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창문과 편안해 보이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작은 방으로 해달래서 골랐어도, 그래도 아드리아나의 리노아스 방보다 컸다. 침대는 두 배쯤 되어 보였다.

푹신해 보이는 이불 속에 몸을 누이고 잠들어 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밀려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커튼이 걷어진 창을 통해, 잠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멀리 해안선이 보였다. 인적은 거의 없었고, 갈매기들만이 수면 위를 느긋하게 날고 있었다.

“바다다….”

냉기가 느껴지는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찬바람에 오싹 소름이 돋아, 코트를 단단히 여미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높은 곳에 올라오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고 너무 낯설다보니 현실감이 적어서 오히려 겁이 나지 않았다.

내려다보이는 모든 것이 작게 보였다. 자신도 그 안에 속한 작디작은 한 명이었다. 세상의 끝처럼 보이는 광활한 대양을 바라보며, 아드리아나는 한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내가 이렇게 높고 뻥 뚫린 곳에서 바다를 구경하게 되다니….’

잠시 후, 아드리아나는 창을 닫고 시린 팔을 문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벽면이 온통 유리로 된 방에서 잠을 자다니, 몇 년 전만 해도 두려워 떨 일이었다. 지금도 창문이 훤히 드러나 있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했지만 커튼을 내리면 되었고, 아무 때고 전처럼 불안해지지는 않았다.

호텔의 방은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크림색이 많이 쓰인 것도 아늑함을 느끼게 했고, 적은 물건들만 정갈하게 놓여 있다는 점도 아드리아나의 방을 떠올리게 했다. 수건처럼 그때그때 준비해주어야 하는 물건을 챙겨주는 이가 따로 있다는 것도, 리노아스에 있던 때와 같아서 편했다.

조난을 당했던 직후, 스스로 일하며 지내는 것에 금방 익숙해졌던 아드리아나였다. 그래도 역시 다시 편리함을 맛보니 보살핌 받는 삶이 좋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애쓰는 거야. 노아도….’

그도 수도에 드나들면서 이런 숙소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이 좋아진 건지도 모른다. 훌륭한 대접을 받고 지내며, 아드리아나와 서로 돌보아주는 삶이 즐겁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냐. 노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드리아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었던 사람을 두고 옹졸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고 있다가, 또다시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식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훌쩍 밖으로 나왔다.

이미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호텔 안의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근처를 둘러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혼자서 길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행과 함께 걷고 있었다. 어쩐지 자신만 혼자인 것 같아서 의식이 되었지만, 다들 걸음을 바쁘게 재촉하느라 아드리아나에게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낯선 거리에서 고독해지는 대로 또 노아가 생각났다. 추억이 있는 곳에서는 있는 대로, 없는 곳에서는 또 그리운 대로, 얼마간은 그냥 그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일도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그래도, 이번에도 언젠가는 잊게 될 거야.’

작은 상점들이 이어지는 길을 걷다가, 아드리아나는 악기점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다.

그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온 소년 한 명이 바이올린을 고르고 있었다. 소년은 행복한 듯 웃으며, 악기점 주인이 건네주는 바이올린을 받아들고서 활을 당겨보았다.

어머니, 미네타, 보먼 부부, 그리고 또 떠오르려는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털어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아드리아나는 한동안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호텔의 책자에서 본 공중전화는 금방 찾아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사라, 저 잘 도착했어요.”

“오드리! 지금쯤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것 같아서 호텔로 전화해볼까 하고 있던 참이었어. 괜찮아? 춥지는 않아? 여긴 오늘 바람이 참 차네.”

“아, 여기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아드리아나는 사라와 통화를 하며 추웠던 마음이 조금 녹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전화를 끊고 난 후에는 교회에도 전화를 걸어서 로레인에게 전할 안부와 감사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다시 동전을 넣었다.

다이얼을 돌리고,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네, 리노아스 남작관입니다.”

조금 낮아진 듯 들렸지만, 아드리아나가 열일곱이던 헤밀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아드리아나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부인들을 발견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시 얼마간 걷다보니 길 한쪽에 작은 전단들이 붙어 있는 나무판이 보였다. 거기에는 하숙생을 구하는 글, 직원을 구하는 글 등이 붙어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가방에서 펜과 메모지를 꺼내서 관심이 가는 내용들을 베꼈다.

“아가씨, 일을 구하고 있어요?”

곁에 서 있던 여자가 말을 걸었다.

아드리아나는 경계하며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표정으로,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부드럽게 늘리며 웃었다.

“난 저쪽 사거리 뒤에서 가게를 하고 있어요. 바이올렛이라고 부르면 돼요. 우리 도시인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향기로운 음료를 팔지요.”

“네에....”

아드리아나는 여자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고 내려다보았다. 토속 신앙의 여신 이름인 ‘루나’라는 글자가 중앙에 적혀 있고, 그 하단에는 여자의 이름과 연락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향기로운 음료라면 찻집인가? 아니면 술?’

조심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관심 있으면 언제든지 놀러 와요. 고운 아가씨가 일을 하기에는 다른 곳보다 훨씬 나을 거예요. 일도 즐겁고 대우도 좋죠.”

“네, 고맙습니다.”

아드리아나는 여자가 준 명함도 가방에 챙겨 넣고 돌아섰다. 며칠간은 쉬면서 테스카에 적응해 보고, 보먼 부인에게서 일자리를 소개받지 못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일을 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만 호텔로 돌아갈까 하다가, 적어놓은 하숙집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다시 전화기를 찾았다. 그리고 주인이 전화를 받는 곳 두 군데를 찾아가보았다.

한 하숙집은 집안에 장성한 청년이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또 다른 곳은 방을 공동으로 써야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함께 방을 쓸 여성은 낮에 일하러 가서 아침에 돌아오는 사람이라 만나보지 못했다. 생활패턴이 맞지 않아서 서로 힘들지도 몰랐다.

집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드리아나는 근처에 북적이는 과자점에서 저녁으로 먹을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 가지고 호텔로 돌아갔다.

저녁을 먹는 동안 창밖이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아드리아나는 테이블 앞에 혼자 앉아서, 밖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가 유난히 커다랬다. 반쪽을 잘라서 나눠줄 사람이 이제 없으니, 싱싱하고 커다란 딸기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손님이 가득했던 유명한 가게에서 사온 케이크인데도 왠지 목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뭔가를 먹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지금 누군가 의미를 물어오면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아드리아나는 테이블 위를 치우고 커튼을 내렸다. 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두꺼운 천이 내려지자 방 안이 완전히 어둠에 싸였다.

커튼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한줄기 빛에 의지하며 침대를 찾아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부터 슈하스에서 테스카까지 마차를 탔고, 도착한 이후에도 꽤 돌아다녀서 피곤했다. 모든 걸 잊고 잠들어 있는 동안만은, 마음을 쉬게 할 평온이 허락될 터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어 시간 만에 다시 눈이 떠졌다.

꿈속에서 노아가 약속에 오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발견했지만, 모르는 척 해주길 바라며 자꾸 시선을 피했다.

‘제발....’

자는 동안에만이라도 그를 잊고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꿈에서 느꼈던 아픈 감정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부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잘 수 있기를 빌다가, 겨우 다시 잠이 들었다.

어렵사리 초조함이 가라앉고, 잠이 든 것인지 잠이 든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기묘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드리아나는 고요한 어둠속에서 갈매기 소리를 들었다.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금방 다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또 잠시 후, 바닥이 출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승강기는 무섭지 않았다. 괜찮다고 되뇌며,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서 도로 잠에 빠지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툭, 무언가 가슴을 건드렸다.

아드리아나는 그 순간 눈을 반짝 뜨고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옆에 누워 있었다. 가슴에 닿은 것은 그 사람의 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느릿하게 손을 거두었다.

심장이 몸에서 뚝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을 덮은 이불 위로 드러난 두 눈동자가 아드리아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호러 아닙니다ㅡㅜ 지난 화들 곳곳에 힌트가...

*19세기에도 지금과 비슷한 엘리베이터가 있었네요. 되도록 현실의 동시대와 문명 수준 최대치는 맞추려고 하고 있으나, 판타지 패러렐인 만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읽어주시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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