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테스카 편 - 이방인 =========================================================================
‘내가 욕심을 내서 망쳐버렸어.’
자책감이 들었다. 그의 마음이 떠나버렸다고 결론짓고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한 번쯤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지금 아드리아나는 혼자 괴로운 생각을 하는 대신 노아의 집에서, 노아의 곁에서….
‘나는 노아를 사랑해.’
그럼에도 잘하지 못했다. 연인을 대하는 것에,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서툴렀던 아드리아나였기에 돌아보면 언제나 아쉬운 일투성이였다.
노아가 베풀어주는 사랑에 익숙해지고 의존하게 된 자신이, 그것 없이 살 수 없게 된 것 같은 자신이 미워졌다.
‘노아는 괜찮을까?’
참지 못하고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마침 다른 이가 받아서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는 전화가 왔었다고 노아에게 전해주겠노라 했지만, 노아는 회신을 주지 않았다.
괜찮지 않다면, 당장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애정이 남아 있다면, 이렇게 모른 척 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가 원망스럽고 야속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인 것도 같았다. 그가 늦어지던 날, 사고로 노아를 잃었을지 모른다고 두려웠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가 무사하게 돌아온 후의 이별이 훨씬 나았다. 차라리 그의 마음이 변해서, 그가 많이 아파하지 않을 이 이별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가 어딘가에서 행복한 편이 그래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노아가 아드리아나의 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요 근래에 그토록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노아에 대한 불만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그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곁에서 행복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나로는 행복하지 않느냐고 화내도 소용없는 일이다.
전에도 똑같은 불안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오래전, 곁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봐주지 않던 버클리에게서도 그것을 느꼈었다.
노아는 그와 달리 진심으로 아드리아나를 사랑해주었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영원하지는 않았다.
‘변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토록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이 변할 수 있구나….’
사랑하는 일이 슬퍼졌다. 아직도 노아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물 한잔도 목으로 넘길 수 없었고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버거웠지만, 슬픔 속에 침몰한 채로 죽은 듯 지낼 수는 없었다. 일을 해야 했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노아와 함께 여행하기 위해 받아두었던 이틀의 휴가를 방 안에 누워서 지내는 데에 다 써버리고, 다음날 찻집에 출근했다.
“괜찮겠어, 오드리? 좀 더 쉬어도 괜찮아.”
사라는 핼쑥해진 아드리아나를 걱정하며 가게를 쉬도록 했지만, 안 그래도 숙식까지 신세지고 있는데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가게 일을 하며, 손님들에게 미소 지어주고 책을 정리하는 일로 돌아오려고 애써봤지만, 자꾸 정신이 멍해졌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노아가 들어오는 건 아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만나러 매일같이 찾아왔던 노아의 모습은,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노아는 수도로 떠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여전히 헤밀이나 슈하스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을지도 몰라서 그와 마주칠까 봐 두려웠고, 어딜 가도 그와 함께 갔던 곳뿐이어서 온통 그가 떠올라 밖에도 나갈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눈물은 마르지도 않았다. 머리는 이제 끝나버린 게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가슴 속에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어느 휴일, 아드리아나는 침대 위에 하릴없이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가 노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드리. 그렇게 안 먹고 있으면 안 돼. 내가 맛있는 걸 만들어줄 테니까, 뭐가 더 좋은지 말해 봐.”
그는 침대 머리맡에서, 예전에 늘 그랬었던 것처럼 아드리아나의 팔에 머리카락을 비볐다. 침대 옆 바닥에는 둘이 좋아하던 가게에서 사온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노아가 해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요. 그리고 같이 여행을 가고 싶어요. 노아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노아가 미소 지었다.
“금방 만들어줄게. 조금만 기다려.”
그가 일어나서 부엌으로 나갔다. 침대를 짚고 일어나는 그의 팔, 안아주던 몸, 움직이는 모습까지 몇 주 전의 노아 그대로였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가 사온 케이크가 없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으면 약속한 대로 돌아올 것처럼, 아드리아나는 침대 위에서 언제까지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오드리. 식사는 하고 지낸 거야? 많이 아팠어?”
“미네타…. 어떻게 왔어요?”
눈을 떠보니, 미네타가 먹을 것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보호소에 있을 때 가끔 그녀가 끓여주던 수프의 냄새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음식인데도 식욕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보먼 부인한테서 연락이 와서 와 봤어. 오드리가 많이 아픈데 일 때문에 집을 비워야 한다고 걱정하시더라고. 마침 나도 헤밀에 와야지 계속 마음만 먹고 있던 참이라, 얼른 내려와 봤어.”
아드리아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나고 팔이 후들거렸다.
“자, 물.”
미네타가 컵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동안 살 좀 쪘다고 그러더니, 전보다 더 홀쭉해졌잖아.”
아드리아나는 물을 마시며 힘없이 웃었다.
“…미네타가 있으니까 좋네요.”
미네타는 웃음기 없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아르본에 갈래? 여기서 지내는 거 힘들면 말이야.”
그녀는 아드리아나가 노아와 헤어진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보먼 부인이 눈치 채고 알려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노아가 일이 바빠진 이후로는 미네타와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으니, 본인이 알렸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르본에는 갈 수 없어요…. 마주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기서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
“여기서는… 여기에도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노아와의 기억으로 빠져나갈 곳 없이 채워진 슈하스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곳곳이 그와의 추억으로 채워진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아. 그럼 수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수도에는 노아가 있다. 왕실의 시험에도 합격했고 그곳에 대한 얘기를 계속 했으니, 앞으로 그곳에서 일하게 될지 몰랐다. 만약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최소한 자주 그곳을 방문할 것이다. 미네타는 노아와 연락을 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수도 말고… 다른 곳으로 가보려고요.”
수도 외에 일자리가 많은 번화한 곳. 가족 없이 사는 사람도 빌릴 만한 충분한 집이 있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기도 했던 곳.
“…테스카가 좋을 것 같아요.”
아드리아나는 그때까지 떠올리고 있던 도시의 이름을 말했다.
“흠…. 테스카는 너무 복잡하지 않나? 아무튼 천천히 생각해보고, 일단은 뭐 좀 먹자.”
미네타가 수프와 빵을 차려주어서, 아드리아나도 조금은 식사를 했다.
따뜻한 수프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자신이 살아있음이 실감되었다.
‘좋아하지 말걸.’
자신의 결심을 어긴 대가가 이다지도 큰 고통이 되어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잊을 수 있을까.’
버클리를 잊었던 것처럼, 노아도 잊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두 사람과의 시간은 전혀 달랐다. 노아는 거의 완벽한 연인이었다. 사소하게라도 잘못은 대개 아드리아나가 했고, 둘 중에 부족한 사람도 아드리아나였을 것이다.
또다시 자책감이 밀려들자 훌쩍훌쩍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아드리아나는 걱정하는 미네타를 돌려보내고 기운을 내서 자신의 방 안을 정리했다. 며칠 치우지 않고 놔두었던 물건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목욕도 했다.
그동안 정이 든 찻집 안으로도 들어가 보았다. 자신이 멀쩡했더라면 주인 부부가 여행 중이더라도 잘 운영되고 있었을 가게의 문이 닫혀 어두운 채로 남겨져 있었다.
이곳에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다.
손님들에게 향기로운 차를 대접하고, 한가할 때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가 생각났다.
너무 큰 행복을, 다른 모든 걸 잊게 하는 그 커다란 열정을 알기 전에는 이 안에서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건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리노아스에서 쫓겨나던 때의 기억이 반복되는 듯했다.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는 도피를, 이렇게 다시 또 하게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일하는 동안에 차를 만들고 쉬기도 하던 계산대 안쪽 테이블로 갔다. 그곳에 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곧잘 뻗치는 머리를 가라앉히려 손님들 몰래 들여다보던 작은 손거울과 차를 마시던 컵….
색깔만 다른 한 쌍의 컵과 한 쌍의 티스푼이, 늘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노아가 쓰던 물건에조차 여전히 넘칠 것 같은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흘러넘치고 스며들어 마음을 젖게 하고 좀먹는 듯한 아픔 또한.
아드리아나는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다. 그가 직접 골라서 사준 옷들, 장신구, 그의 눈길이라도 닿았던 물건이라면 그 어느 것도 버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도망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짐이 많아서….’
아드리아나는 가게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잠들었다가 몇 번이나 깨어나 어두컴컴한 문밖을 바라보고는 또 다시 얕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주인 부부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아드리아나는 그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슈하스의 교회에 찾아가 로레인을 만난 후, 떠밀려져 억지로 떠나오듯 슈하스를 떠났다.
#테스카 편 - 이방인
11월은 떠나기에 적절한 달은 아니었다.
테스카는 바다 가까이에 있는 도시라 다른 곳에 비해서는 따뜻할 거라고 모두들 말했지만, 곳곳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마른 바람이 휙휙 불어댔고, 딱딱하게 포장된 길 위로는 흙이 전해주는 포근함도 느낄 수 없었다.
추위를 느끼는 이가 아드리아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밍크가 덧대어진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겨울이 되면 얼마나 더 추워지려고….’
헤밀이나 슈하스에서는 쓸 일이 없던 장갑을 곧 꺼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짐은 전부 찻집에 맡겨두고 몸만 먼저 떠나온 터라, 수중에는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속옷 몇 벌이 다였다.
마차가 호텔에 가까워지자, 근처를 지나는 마차나 자동차들과 섞여서 혼잡해졌다. 자동차들은 마차보다 너무 빠르지 않은 속도로 무조건 양보하며 다녔지만, 주차를 하기 위해 말들 사이로 느리게나마 끼어들어올 때면 다들 신경이 예민해지는 듯 보였다.
[테스카에는 호텔이라는 게 있어요. 고급 숙소라서 방값은 좀 비싸지만 임시로 지내는 데에 필요한 건 전부 마련되어 있고, 오드리 양은 특히 거기서 지내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예약을 해둘게요.]
아드리아나는 로레인의 권유대로 돈을 넉넉히 가지고 와서 호텔에 머물 예정이었다. 며칠간 여행하는 기분으로 지내며 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슈하스에 있을 적에, 보먼 부인이 테스카에 있는 지인에게 물어봐서 하숙이나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라 언제까지나 호텔에 돈을 쓰며 기다릴 수는 없을 듯했다.
아드리아나는 마차에 내려 호텔 입구에 서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이시스.
투스미아 왕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이자, 아드리아나가 좋아하는 투스미아 산의 이름이기도 했다. 호텔을 세운 이가 어느 쪽을 생각하고 이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왠지 모를 위로가 되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시스에 와보게 되었다.
아드리아나는 자꾸만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슬픔을 털어내려 애쓰고, 앞으로 머물게 될 낯선 도시와 건물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긴장한 채로, 호텔 입구에 서 있는 제복 입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방을 예약한 오드리라고 해요.”
============================ 작품 후기 ============================
*배경이 완전히 현대는 아닌 만큼 호텔 역시도 그렇습니다. 아이넨 내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테스카로 넘어가다보니 현대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할 텐데, 1800년대 정도 기준으로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