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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23화 (23/140)

00023  슈하스 편 -  그가 남기고 간 것  =========================================================================

아드리아나는 가게 밖의 어둡고 한산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팔을 쭉 뻗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장마로 연일 이어지는 비 때문에 몸이 찌뿌듯했다. 토요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왕래도 없었고 손님도 진즉에 끊겨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마시던 컵을 씻어서 정리해놓고, 잠시 후 가게를 나왔다.

지금 주인 부부는 고향 명절을 보내기 위해 바넬에 가 있었다. 명절 당일인 내일은 가게도 쉬기로 해서, 아드리아나도 오늘은 밖에서 열쇠로 문을 잠그고, 뒷길을 통해 다시 집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휴일을 알리는 나무 팻말은 아드리아나의 한쪽 팔 길이와 높이가 같을 정도로 커다랬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띄어서 손님이 헛걸음하는 일을 줄여줄 터였다.

아드리아나는 나무 팻말을 걸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팔을 위로 뻗었다.

“영차.”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아드리아나 대신인 듯 장난스럽게 기합을 넣었다.

“…노아.”

“째려보지 마요. 내가 걸어줄게.”

노아가 입을 내민 아드리아나를 보고 웃더니, 들고 있던 우산과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네고, 그와 맞바꾸어 팻말을 받아서 못이 박힌 자리에 걸었다.

“노아 씨도 일 지금 끝난 거예요?”

“응. 나 조금만 늦게 왔으면 바람 맞을 뻔 했네.”

“날도 이렇고 손님도 없어서 좀 일찍 닫았어요. 근데 오늘 무슨 날이에요? 웬 케이크?”

아드리아나가 다시 우산과 케이크를 건네주자, 그는 우산만 돌려받았다.

“아무 날도 아닌데, 그냥 우리 집에 가서 같이 먹자고 하려고.”

노아가 말하며 신나는 상상이라도 한 듯 함박미소를 지었다. 가게 주인 부부가 집을 비운다는 것을 알고 이때다 하고 데리러온 게 훤했다. 주인집에서 숙식을 신세지고 있는 아드리아나가, 그들이 집에 있는 동안에 예의상 외박하는 일을 삼갔기 때문이었다.

“빨리 가자, 우리집.”

노아가 재촉했다.

“그럼 잠옷 챙겨갈게요.”

조그맣게 대답하자, 노아는 기뻐하며 아드리아나를 차에 태웠다.

잠옷을 가지러 집에 들렀다가 오는 동안에 그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드리아나가 다시 차에 타자 헤헤 소리 내며 즐거워했다.

노아의 집에 오는 것은 이걸로 세 번째였다. 두 번째 때는 일하러 온 아주머니와 마주쳐서 서로 민망해졌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아주머니에게 알려진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불 피울까?”

비 때문에 옅은 한기와 습기가 느껴졌다. 노아는 벽난로에 불을 넣은 다음, 찻물을 끓이고, 접시를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풀었다.

“딸기는 오드리 줄게.”

그가 딸기가 있는 부분을 잘라서 아드리아나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아드리아나는 딸기를 반으로 잘라서, 크기가 좀 더 큰 쪽을 노아의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한층 더 행복해진 듯 보이는 노아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수도에 찻집이 몇 개 새로 생겼어. 책을 팔지는 않지만, 장식품처럼 몇 권씩 진열해놓는 게 유행인가 봐.”

“책은 봐주지 않으면 불쌍해요.”

“그래서 내가 가서 읽어줬지. 새로운 요리 레시피를 보고 왔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내일 점심으로 만들어줄게.”

노아가 의욕에 찬 눈으로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짚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좋아요. 기대돼요.”

이토록 기다려지고 설레는 것은, 만들어질 요리의 훌륭한 맛 때문만은 아니리라. 아드리아나는 노아가 요리를 맛없게 만들더라도 자신이 똑같이 기대하고 설렜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좀 더 낭만적으로 변했다. 불에 올려둔 주전자가 수증기를 내뿜으며 조그맣게 울기 시작했고, 방 안은 금세 훈훈해졌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찍 침대에 들었다.

이불을 같이 덮고, 아드리아나가 노아에게 안기면 노아는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이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그는 입술로도 와 닿았다.

“오드리는 나중에 다시 보호소 일을 하고 싶어?”

“네. 할 수 있다면요. 그치만 직접 운영할 자신은 없고 그냥 미네타와 전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은 것 같기도 해요. 적당히 도울 곳이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아드리아나가 말하자, 노아는 대견하다는 듯 어깨를 쓰다듬었다.

“나 돈 많이 벌어야겠다. 같이 여행도 다녀야하고, 오드리가 좋은 일 하는 것도 도와주려면.”

아드리아나는 노아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실은 수도에서 찻집을 하면 어떨까도 생각했었어. 내가 버니까 오드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지만, 만약에 뭔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노아는 언제인가부터, 아드리아나가 함께 있는 미래를 말하게 되었다. 아직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의논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가 자신과 같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저를 부인으로 삼으실 거예요?”

노아가 미소 지은 얼굴로 아드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응. 난 오드리랑 같이 살 거야.”

그가 더욱 꼭 끌어안았다.

아드리아나는 행복한 꿈에 빠져서 그에게 안겨 있다가, 그가 몸을 떼고 자기를 좀 봐달라는 듯 눈을 지그시 감기에, 웃으며 입을 맞춰주었다.

“…잘 자요, 노아.”

노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이 집에 왔을 때에, 두 사람은 지금보다 진한 스킨십도 나누었다. 노아는 침대 위에서 입을 맞추다가 아드리아나의 몸 위로 올라왔었다.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고 싫은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아드리아나는 그를 멈추게 했었다. 아직 그가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뼈아프게 느낀 일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이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약속처럼 되었다.

“…하긴, 식을 올리고 나서 진짜 첫날밤을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그 순간이 서로에게 처음이라는 게, 어쩌면 조금 기쁠 것 같기도 해.”

아드리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노아를 따라서 미소 짓고 있다가, 문득 그의 말뜻을 생각하고 표정을 굳혔다.

처음?

버클리와의 일은?

노아가 말한 처음이 얼마만큼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아무튼 버클리와의 경험이 노아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범위의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아는 지금 자신이 순결한 몸이고, 아드리아나 역시 그러하리라고 믿고 말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슈하스에 와서 새로 보게 된 소설을 통해 ‘첫날밤’에 대해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적어도 그 책에 나와 있는 묘사의 대부분은 자신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버클리가 자신의 안에 씨를 넣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랫동안 혐오감과 공포에 떨기도 했었다. 그와의 입맞춤도 애무도 모두 일방적인 밀어붙임으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시작만 그랬을 뿐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은 그 일을, 전혀 그랬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잊고 지냈다. 언제가 되어야 잊힐까 걱정했던 버클리가 어느새 완전히 잊혀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천하고 더러웠던 자신을 되살려내지 않으려면, 아직 그런 일들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노아가 기다려주기로 한 것에는 안도했지만, 때가 되어 그에게 들키게 될 일이 두려웠다.

‘나는 처녀일까? 이젠 아닌 걸까? 노아가 눈치 채고 배신당했다고 여기면 어떻게 하지.’

그때를 상상하면 두려웠지만, 노아와 깊은 스킨십을 하지 않게 되고 가볍게 웃으며 지내는 날들이 이어지자 그런 걱정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들었다.

이런 나날이 너무 행복했다. 아드리아나는 노아 역시도 이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을 느꼈다.

둘이서 함께 밥을 먹고 서로 안아주고 토닥이며 피로한 하루를 위로하고, 이따금 지금처럼 함께 잠들고 깨어날 수 있는 순간들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몇 년, 몇십 년을 이렇게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듯했다.

아드리아나는 이제 열아홉 살이 되었지만, 노아를 대할 때면 그와 처음 만났던 열일곱 살 그대로인 자신을 느꼈다. 스물여섯이 된 노아 역시, 스물네 살이던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난 아직도 오드리 때문에 떨릴 때가 있어.”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아드리아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사랑과 행복이 떨림과는 다른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긴장하지 않았고 자신과 한몸인 것처럼 느꼈다. 떨린다는 건, 아직 한몸이라고 느끼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괜스레 그에게 눈을 흘겼다.

“그건 제가 남 같다는 뜻인가요? 매일 같이 보고 있는데 뭐에 떨리겠어요?”

“아냐. 가끔 끌어안기만 해도 떨릴 때가 있어. 당신 몸이 나한테 닿을 때. 뭐라고 하지, 감촉이… 굉장하거든. 그게 의식될 때가 있어.”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확 붉혔다. 노아가 아무렇게나 아부 같은 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진지하게 뭔가를 상상하며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음, 좀 야하게 느껴지는 몸이야.”

노아가 말하며 훔쳐보듯 아드리아나를 쳐다보았다.

“뭐예요, 그런 눈빛은….”

아드리아나는 베개를 끌어안아 몸을 가리고 있다가, 먼저 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도 자야지.”

노아가 책을 내려놓고 침대 옆자리로 기어들어왔다.

“아, 좋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품 안에 껴안고 머리 위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아드리아나도 곧 그를 안아주었다.

이런 밤이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오드리가 일을 쉴 수 있으면 데려가고 싶은데….”

노아는 다음 주에 있을 한 달간의 출장 때문에 내내 미안해하고 마음을 썼다.

“어쩔 수 없죠. 빨리 오세요.”

아드리아나는 그의 일이 불안정해서 자꾸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이 서운했지만, 그의 집에 떳떳하게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미안하기도 해서 그를 조르지 않았다.

노아가 조금 더 안정되기만 하면, 또는 자신이 신원을 확실히 하기 어려운 가게 종업원이 아닌, 제대로 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되면….

그런 날은 조금만 기다리면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노아의 수입이 늘어도 그가 더 여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드리아나가 아무리 성실하게 살며 알뜰하게 돈을 모아봤자, 집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신원이 불확실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었다.

노아가 수도에 가 있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와 만나서 함께 보냈을 여가 시간에는, 찻집 외의 다른 가게 일을 도우며 수입을 늘렸다.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한 다른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머, 처음 보는 아가씨네?”

잡화점에서 정리를 돕고 있던 때였다.

잘 차려입은 부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가게에 들어왔다가 아드리아나를 보더니 흥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새로 오신 주인이신가요?”

“안녕하세요, 부인. 전 월요일에만 여기 일을 돕고 있답니다. 오드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평소에는 찻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드리아나는 정리하던 모자들을 치워놓고 부인을 도와주기 위해 일어섰다. 전통과 격식을 중요시하는 소위 ‘귀한 가문’의 사람들은 찻집에 잘 다니지 않았다. 다과를 즐길 때에는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오드리 양.”

부인은 딸에게 모자를 사주려 한다며 새로 나온 물건 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가 원피스 허리에 두르고 있는 리본에도 관심을 보였다. 가게 물건을 주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 리본도 아주 예쁘네요. 같은 게 있다면 보여주시겠어요? 분홍색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색도 있어요. 꺼내드려 볼게요.”

아드리아나가 물건을 보여주고 계산해주는 동안, 부인은 아드리아나를 자꾸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금을 지불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혹시 아가씨와 약혼한 분이 계신가요?”

“네…?”

“제게 아직 장가 안 간 남동생이 있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눈이 어찌나 높은지 곧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도 마음에 드는 여성을 못 만났다지 뭐예요.”

아드리아나는 난처해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씨 정도면 벌써 약혼하셨겠죠?”

부인이 조금 미안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약혼한 사람은 있어요.”

아드리아나는 부인이 처음 만난 자신의 무엇을 보고 높이 판단해서 ‘아가씨 정도’라고 말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순간 노아를 떠올리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럴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쉬워서 한번 물어본 거예요. 아가씨 인상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부인은 몇 번이나 아쉬운 듯 말하며 가게를 나갔다.

아드리아나는 다시 물건 정리를 시작하며 노아를 생각했다.

‘노아의 부모님도 저 부인처럼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스콰이어 공작 가에서 데려가겠다고 했던 걸 보면, 나도 아주 나쁜 며느리 감은 아닐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 시절의 아드리아나에게는 클로제 남작 가의 영애라는 신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오드리라는 가짜 이름뿐이었다.

“오드리!”

그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노아가 들어왔다. 아드리아나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노아. 잘 다녀왔어요?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찻집에 갔더니 여기 있을 거라고 하잖아. 뭐 하러 쉬는 날까지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당신도 없는데 혼자 쉬는 게 좀 그래서….”

“나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오드리를 우리 집에 데려가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노아. 오늘은 푹 쉬시고 다음에 초대해 주세요.”

“그럼 나 집에서 한숨 자다가 이따 데리러 올게.”

노아는 그렇게 약속하고 나가며 아드리아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드리아나는 문 앞까지 나가서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난 후,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노아가 조금 전의 부인과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는 질투가 많았다. 전에도 아드리아나가 찻집에서 젊은 남자 손님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들은 일로 다툰 적이 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는 노아의 사교적인 성격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뜻밖인 발견이었다.

“사내가 부인들 마냥 찻집에 드나들 일이 뭐가 있어? 오드리한테 흑심을 품고 있는 거라고.”

“노아도 계속 여기에 다녔었잖아요.”

“나도 흑심을 품고 그런 거지.”

“그게 뭐예요. 다른 데도 다니신다면서요?”

“지금은 오드리 때문에 찻집 자체에 관심이 생겨서 그런 거야. 그 남자한테 또 선물 같은 거 받을 거야? 웃어줄 거야?”

“아이 참, 그때 받은 건 마을 기념일이라고 가게마다 다 나눠주신 거라잖아요. 그리고 손님 앞에서 친절하게 대해야지 인상 쓰고 대해요?”

“그래서 또 받을 거냐고. 같이 얘기하면서 웃을 거냐고.”

노아는 끈질기게 매달려서 다짐을 받아내고도 기분이 안 좋은 듯 오랫동안 삐쳐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질투하고 토라진 말을 하는 게 귀여워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그가 진심으로 불쾌해 하고 마음에 담아 둔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서, 스스로의 행동을 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아드리아나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나 노아에게 흠을 잡히지 않도록 필요 이상 신경을 쓰려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다. 조금 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약혼했는지 물어오는 일에조차, 자신이 뭔가 행실을 가볍게 해서 쉽게 보인 건 아닐까 신경을 쓰게 되었기에.

“이번에 간 사무실은 정말 좋았어. 왕실 소속이라서 성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데, 다들 고위 귀족이 된 것처럼 대우하더라고. 이번 일이 잘되면 나중에 거기서 일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럼 복지는 물론이고 수입도 몇 배가 될 거야.”

노아가 들떠서 얘기했다. 그는 이번에 수도에서 왕실 소속 변호사의 일을 돕고 왔는데 거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아드리아나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다소 흥분한 투로 얘기했다.

아드리아나는 지금까지 그에게서 수입에 특별히 부족함을 느낀다는 말을 못 들었던 터라 조금 갸웃해졌다. 둘이서 함께 시장 구경을 하고 기껏해야 조금 비싼 요리를 먹으러 다니면서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워해왔었기에, 그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소속이 되면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길 것이다. 그곳에 상주하며 왕실의 종처럼 부려지는 것은 다반사라고 들었다.

“왕실의 사무실에 들어가고 싶어요, 노아?”

“쉬운 일은 아니야.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인맥이 없이는 잘 뽑지도 않거든. 하지만 환경이 정말 좋으니까.”

“노아도 작은 도시가 좋다고 했었잖아요. 수도에서는 보호소 일을 하거나 찻집도 꾸리기 어려울 거예요.”

“뭔가 결정 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해본 말이야.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수입이 많아지면 우리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는 지금도 행복해요. 당신만 있으면요.”

아드리아나가 말하자, 노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수도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그날 밤, 아드리아나는 그의 곁에 누워 있다가 살며시 그의 가슴을 쓰다듬어보았다. 그렇게 하면 노아는 촉촉해진 눈으로 입을 맞춰주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후에는 기대와 번민으로 가득 차서 아드리아나의 안색을 살폈었다. 아드리아나도 으레 조금쯤은 더 허락해주고 싶어져서, 그 뒤 가벼운 애무를 즐기기도 했다.

“노아….”

“응.”

노아가 아드리아나에게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잠시 안아주다가 이불을 끌어올렸다.

“…잘 자요, 노아.”

“응.”

노아는 원래부터 잠들기 전에 인사를 잘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점에, 아드리아나는 요즘에서야 새삼스럽게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욕심이 너무 많아졌어. 노아가 워낙 잘 해주니까….’

이른 새벽, 아드리아나는 잠을 깼다가, 노아가 벌써 침대를 내려가 창가의 달빛에 의지해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정말로 목표를 바꾸기로 한 걸까. 어찌되었든 꿈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그에게, 같이 침대에서 게으름이나 부리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히히 고맙습니다.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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