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슈하스 편 - 그가 남기고 간 것 =========================================================================
아드리아나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휴일을 보내기 위해 슈하스의 교회를 찾았다. 보호소의 식구들과 함께였다.
실은 지난 주까지만 해도 슈하스가 아닌 테스카에 가게 될 줄만 알았다. 커다란 장식 트리와 밤까지 환히 밝혀진 거리 풍경이 아름답다는 그 도시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언젠가라도 마음먹으면 그 도시에 가볼 기회야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함께 할 기회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사흘 전, ‘불법’ 시설을 철거하라는 명령장이 보호소로 보내져왔었다. 공문 규격을 나타내는 두꺼운 미색 편지 봉투가, 보호소의 우편함 안에 가득 쌓인 크리스마스카드들 속에 태연스럽게도 섞여 있었다.
명령장에는 각 아이들을 보내야 할 시설에 대한 정보와, 전입 및 폐쇄 기한 따위가 적혀 있었다.
“기한이 너무 촉박해요. 이 안에 어떻게 다 정리하라는 거예요?”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닥치니까 막막해지네.”
미네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소와 같이 오전을 보냈다. 그러다 오후가 되어서는 급하게 외출을 했다. 다음날에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미네타는 보호소에 거의 붙어 있지 않고 돌아다녔다.
타 시설로 옮길 수 있도록 지정받지 못한 아이들 때문이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이 시설이 없어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열한 살 미리아 같은 아이가 양친의 술값과 노름빚을 갚기 위해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내가 애들을 다시 버리는 기분이야.”
미네타는 그런 말을 했다. 동감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브 날 밤, 아드리아나는 혼자 방에서 미네타를 기다리다가, 10시가 넘어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보호소로 돌아왔던 미네타가 잘 시간이 지나도 방에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미네타는 혼자 사무실에서 술을 퍼붓고 있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미네타. 절망해서 알코올중독자가 될 셈이에요?”
아드리아나는 얼른 잔을 빼앗았다. 가끔 루이 씨 부부나 마을 사람들과 모여서 식사를 할 적에 한두 잔을 마시는 건 보았어도, 혼자서 병을 비우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 큰일 났다. 어째 지켜봐줄 친척이나 이웃 하나도 없는 애들이 태반이야.”
“미네타, 그만 마셔요.”
미네타가 병을 쥐기에 그것마저 빼앗자, 그녀는 맞은편에 보이는 창가를 응시한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에다 고발해도 틀린 부모들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자식 훈육에 간섭한다고 다들 피곤해할 뿐이지.”
부모의 훈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아드리아나의 마음 속에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아드리아나는 온통 칭찬만 받으며 자랐다. 스스로도 소심한 성격 때문에 사소한 규칙이라도 어기길 두려워했던 탓도 있지만, 그럼에도 잘못을 했을 때 고쳐주거나 제대로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다. 무섭게 혼나는 걸 견딜 자신도 없었지만.
“나도 말이야. 어릴 때 아버지한테 엄청 맞고 자랐어. 내가 동네에서 소문난 말썽꾼이었거든. 집에 빗자루가 남아나질 않았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술을 먹고 이유 없이 때리거나, 날 낳고 집 나간 어머니가 밉다고 나를 미워한 일은 한 번도 없었어. 우리 아버진 심지어 매일 나한테 맛있는 요리도 해줬어.”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서서 듣고 있다가 대각선에 있는 작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미네타의 표정이 조금 불안하게 보였다.
“아버지가 일터에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날이 기억나…. 정말 생생해. 그 해에 헤밀에서 대학에 합격한 것은 나뿐이었지. 입학 허가서를 자랑하려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어. 엄청난 요리를 해주실 게 틀림없었어.”
“미네타….”
“이런 날에는 우리 아버지가 더 보고 싶다…. 내가 이렇게 잘못한 날이면, 아니, 뭔가 잘한 날에도 너무 보고 싶어. 곰처럼 힘도 세고 못하는 게 없는 아버지였는데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을까?”
미네타가 뺨을 기대고 있는 손바닥이 젖어들더니 물방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콧물을 훌쩍이며 울었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먼 것 같아. 우리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어. 혼자서는 더 못하겠어.”
“아니에요. 미네타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아드리아나는 그녀의 옆으로 가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혼자서 많은 걸 척척 해내는 굉장한 어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녀 역시 나약한 마음을 감추고 있었나 하고 내심 놀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같이 엉엉 울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알겠어요. 딸을 이렇게 장하게 키우신 걸 보면요.”
“우린 아버진 엄청난 사람이야. 나 같은 거랑은 비교할 수가 없어. 책 읽는 것도 다 아버지가 가르쳐줬어.”
미네타는 아버지의 얘길 하자, 눈물을 훔치며 히죽 히죽 웃었다.
아드리아나는 술병을 치우고 차를 끓였다.
“이거 한 잔만 마시고 자요. 내일 애들 데리고 외출해야 하잖아요.”
“응…. 미안해.”
어쩌면 보호소가 사라지고 의지할 곳을 잃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아드리아나도 미네타도, 따뜻한 집을 잃고 흩어져야 하는 아이들 중 하나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보석들을 떠올렸다가 곧 털어냈다.
보석 열 개를 내놓으면 다섯 개는 하겔 남작이 가져가게 된다. 영지의 법을 따라서 운영을 재개하게 된다고 해도, 전부더 훨씬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편법을 쓰면서 유지해야 했다. 아마도 미네타와 아드리아나로서는 그만큼의 비용을, 그런 생활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을 모두 털어낸 큰돈을 들여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적었다. 아드리아나는 보석 가게 주인이 해주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많은 돈으로도 돌볼 수 있는 한계가 있네요. 미네타가 해온 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에요.”
아드리아나가 어깨를 쓸어주며 말했지만, 미네타는 벌써 테이블 위에 엎어져서 말이 없었다. 깨워도 일어날 기미가 없기에, 아드리아나는 그녀를 겨우 소파 위에 제대로 눕혀놓고 이불을 가져와서 덮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미네타는 그동안 아드리아나와 함께 열심히 짠 스웨터를 아이들에게 예쁘게 입히고 새 신발도 신겨서 외출에 나섰다. 다들 들떠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아드리아나도 함께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얘들아, 오토 아저씨가 오늘 빵 나눠준댔어!”
맏이 뻘인 라이라가 동생들에게 말하며 앞장섰다. 아이들 중에 가장 늦게 들어온 데다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처음 아드리아나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했던 날만 해도 쭈뼛거리고 웬디의 뒤에 숨기 일쑤인 아이였다. 어떻게든 다시 집으로만은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더 궁리해봐야 했다.
“어머, 다들 왔네! 반가워라!”
“선물이에요!”
아이들은 만들어온 과자를 로레인에게 내밀고서 강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로레인은 아드리아나를 보더니 예의 그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귓속말을 했다.
“오드리 양의 목걸이, 제가 잘 빌려서 하고 있어요.”
“하하하.”
거짓말일 게 틀림없었지만, 로레인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아드리아나는 회색 수녀복에다 화려한 보석 목걸이를 한 그녀를 상상하며 웃었다.
“대표기도 같은 거 할 적에 멋있게 걸고 나가면 끝내주겠죠?”
로레인은 일하고 사람들을 대접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런 식으로,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부 인사를 건네고 챙겨주었다.
그녀에게도 술을 마시고 울고 싶은 날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미네타와 로레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한층 커졌다.
아드리아나는 아이들을 실컷 먹이고, 보호소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수준 높은 합창을 들었다. 아이들의 피리소리를 제외하면, 이렇게 연주자가 들려주는 곡을 옆에서 듣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분은 잘 계신가요? 오늘은 안 오시나 보네요.”
미네타가 옆자리의 로레인에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물었다.
로레인이 웃으며 소곤댔다.
“아, 그분 말이에요? 오늘은 집에서 잔대요. 피곤한가 봐요.”
“아쉽네요. 애들한테 인사를 드리게 하고 싶었는데.”
“어유, 인사는요. 그런 거 질색해요.”
“그래도요. 앞으로 감사했다고 인사드릴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미네타가 아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러자 로레인이 웃음기를 지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실감되어, 아드리아나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듯 저도 모르게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아는 얼굴이 많이 생겨 있었다.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보호소가 없어지면 미네타는 다른 지역의 시설 일을 도우며 휴식을 갖고 싶다고 했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녀를 따라가도 될지 망설여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미네타가 말한 시설이 있는 지역이 리노아스와 너무 가까웠다. 그곳은 아드리아나의 아버지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나는 여기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열여덟이면 이제 한 사람 몫을 할 어엿한 어른이야.’
*
교회의 축일이 끝난 후에도, 미네타는 일꾼들과 아이들에게 축제 때처럼 맛있는 걸 먹이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남은 겨울의 운영비가 되었을 돈은, 모두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따뜻한 음식을 먹는 데에 쓰였다. 미네타는 비상금을 털어서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사주었다.
“웬디, 할머니네 집에서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야 해. 나랑 미네타한테 편지도 자주 써주고. 누가 괴롭히면 얼른 학교 선생님한테 말하는 거 알지?”
웬디는 결국 우아즈로 가게 되었다. 웬디의 어머니도 아이도 버틸 때까지 버텼지만, 보호소가 없어지게 되고나니 웬디 스스로 다른 시설보다는 할머니 댁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난 잘하고 있을 테니까, 오드리도 씩씩하게 지내야 해. 내가 얼른 커서 연극도 보여주러 올 테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알았지?”
웬디가 말하며, 옷소매로 아드리아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꼭 약속 지켜야 해.”
1월 1일.
헤밀 보호소 17명의 식구들이 1년 만에 다 같이 외출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고작 1주일 뒤인 그날, 그들은 서로 작별을 나누었다.
아드리아나가 고향을 떠나서 헤밀에 정착하게 된 지 석 달 만에 또 한 번 겪는 이별이었다.
#슈하스 편 - 그가 남기고 간 것
삐이이, 주전자가 높고 가느다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졸다가 놀라서 책 속에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 어서 오세….”
혹시나 그사이 손님이 오지는 않았을지 두리번거렸지만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전자를 올렸을 때 확인한 시간으로부터 5분도 지나지 않았다.
‘…옛날엔 어려운 책을 볼 때도 졸아본 적이 없었는데.’
아드리아나는 뺨을 문지르며, 읽고 있던 동화책을 덮었다. 외국어로 된 책이었다. 가게 주인 내외 중에 부인 쪽이 바넬 혼혈이어서 그쪽 언어로 된 책들이 특히 많았다.
지난달부터, 아드리아나는 미네타가 소개해준 슈하스의 작은 찻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가게에서는 여러 왕국들의 책도 함께 팔고 있어서 여러 언어를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종업원으로 원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 지난 달에 주문한 책을 찾으러 왔는데요.”
“어서 오세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아드리아나는 메모지가 끼워진 책들을 살피며, 손님이 말한 제목을 찾았다.
이런 작은 도시에서 책을 사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했지만, 예상 외로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도시가 아니면 어지간한 책을 편하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니, 다들 이쪽으로 몰렸다.
찻집에는 보통 하루 십수 명 안팎정도 되는 손님이 왔다갔는데 그 중 절반은 책 때문에 오는 손님들이었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아져서 바쁠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은 주인 아주머니가 와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가게 안에 꾸며진 작은 화초들과 오래된 장식품들이나, 주인이 좋아해서 틀어놓는 수입 레코드의 곡 등이 좋아서, 손님 없이 무료하게 보내도 시간이 더디게 가는 일도 없었다.
‘미네타가 정말 좋은 곳을 소개해 줬어.’
미네타와는 가끔 통화도 할 수 있었다. 찻집 안에 전화도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게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은 손님이 많지 않지만, 금방 커지고 인기도 더 많아질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아드리아나도 뿌듯해졌다. 이번에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따뜻한 밀크티 한 잔 주세요. 설탕 반, 우유 반으로 부탁 합니다.”
노아가 책 한 권과 지폐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책을 먼저 계산해주며 웃었다.
“그러다 뚱뚱해지시겠어요.”
“아침을 못 먹어서 뱃속이 허해요. 이 정도는 먹어줘야죠.”
“그럼 식사를 하셔야죠.”
“한 시간 있다가 밥 먹을 건데, 아무리 저라도 지금 먹고 또 먹을 자신은 없네요.”
노아는 잔돈과 책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
아드리아나가 홍차를 끓이는 동안, 그는 방금 산 책을 펼치고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몰두했다. 요즘 아가씨들 사이에서 대유행인 로맨스 소설이었다.
노아도 주말마다 이곳에 들렀다. 극장과 멀지 않았고 책이 많은 곳이었으니, 그가 좋아할 만도 했다.
“다들 백작이랑 결혼한단 말이죠. 왜 하필 백작일까요?”
밀크티를 가져다주자, 노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소설 중에 여자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백작이 많은 듯했다.
“음. 후공작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닐까요? 제가 알기로 아이넨 후공작님들은 아무리 젊어도 50대인 걸로 아는데. 백작은 그래도 30대인 분도 계시잖아요.”
“에이. 어차피 환상소설인데 백작보다는 황제쯤 되는 게 좋지 않아요?”
“그런가요?”
아드리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웃다가, 마티아스도 불리기로는 백작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아드리아나가 공작가의 여자가 될 거라고 했었다. 넌 공작가의 여자가 될 거라고, 공작인 남자가 네 남편이 될 거라고 했었다. 어쩌면 그것도 예언 따위에서 나온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마티아스는 공작은 아니었지만, 공작의 아들이었으니 아버지도 그것으로 타협하기로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전 황제보다는 로빈이 좋아요. 꼭 백작이 아니라도요.”
노아와 처음으로 함께 봤었던 연극의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다. 한 여자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했던, 널따란 가슴 한복판에 곰 무늬 털이 수북해서 기겁하게 만들었던 남자 주인공 말이다.
“하하. 로빈은 정말 멋있었죠.”
노아가 흡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즘도 변호사 일을 하며 주말에는 시내를 돌아 다니고 가게에도 들러주었다. 가끔 미네타가 있는 지역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그녀의 안부를 듣고 와서 전해주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찾아주는 것은 아드리아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운 사람들의 안부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책이나 연극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여기에 투스미아어로 된 동화책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동물이 나오는 책이 있으면 사고 싶어서요.”
얼마 후, 젊은 새댁으로 보이는 여자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수줍어하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얼른 일어나서 책장으로 향했다.
“아,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책장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그림책을 찾아내서 보여주자, 여자는 투스미아어를 잘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책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건 말이 주인공이에요. 신화에 나오는, 바다에 사는 말이 육지에 나와서 살게 되는 내용이에요.”
“아, 우리 아기도 말을 좋아하는데.”
“다른 동물도 많이 나와요. 재미있을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일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만약 예정대로 킹스턴 대학에 들어갔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도 좋았겠다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드리 양은 투스미아 어를 아시나 봐요.”
노아가 말했다. 손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조금뿐이에요.”
“멋지네요. 저번에 보니까 바넬어도 하시는 것 같던데. 어쩐지 코니스 출신이시면서 아이넨어를 하도 능숙하게 하셔서 신기하다 했어요. 엄청난 인재셨군요?”
“아니에요. 다 교양으로 조금씩 배운 것뿐이에요.”
‘코니스 출신’이라는 가짜 정보가 거론되자, 아드리아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노아는 그냥 부끄러워서 그러나 보다 하고 넘어갈 터였지만.
잠시 가게 안이 고요해졌다. 노아가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주말에는 쉬시기 힘들죠?”
“아무래도 주말엔 바쁘니까 쉰다고 하기가 미안해요. 주인 분들은 상관없다고 하시지만, 정말 불가피한 날을 위해서 아껴두려고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노아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옆 테이블에서 방금 다른 손님이 남기고 간 흔적을 치우며 겸연쩍게 웃었다.
“내일, 그 불가피한 날로 쳐주시면 안 될까요?”
노아가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행주를 든 채로 테이블 위에 수그리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시작하나요?”
“잘 모르겠어요. 전 미리 조사하고 가지 않으니까요.”
노아가 말했다. 그는 뭔가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대답을 하고서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가, 평소 같지 않게 어딘지 가라앉아 보였다.
그가 곧 말을 이었다.
“저,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