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슈하스 편 - 어느 휴일(발렌틴) =========================================================================
새벽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 있을 시각이었지만, 오늘은 시끄러운 벨소리에도 잠이 얼른 깨지를 않았다. ‘수면’을 하루 일과로 정해놓고 잠들었던 어제의 기억이 비몽사몽인 이 순간에도 충실하게 기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택에 상주하는 일꾼들은 둘만 남기고 다들 휴가를 보냈으니, 지금쯤 1층에서 자고 있을 펜이 올라와 전화를 받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끊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1층이 아닌 2층으로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안 받았다가는 후환이 생길 인물일 터.
발렌틴은 겨우 몸을 일으키고 응접실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예.”
“메리 크리스마스!”
원래도 명랑한 로레인의 목소리가 여느 때 이상으로 높게 울렸다.
뚝, 하고 발렌틴은 얼떨결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 우두커니 그 앞에 서 있다가, 속으로 다섯 정도를 셌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 오빠!”
발렌틴은 움찔하며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 후로도 로레인의 ‘엄마한테 다-’로 시작하는 까랑까랑한 말소리가 몇 마디 더 이어지기에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말소리가 잠잠해진 뒤에야 수화기를 귀에 댔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안 가.”
“그러지 말고 와 보라니까? 내가 우리 웨버 경 선물도 준비해 놨단 말이야. 어차피 오늘 일하는 사람도 없을걸?”
“손님이 오기로 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오겠다고 약속하지 않고도 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손님? 남자야, 여자야?”
“수녀님 한가하십니까?”
“잉…. 섭섭해.”
로레인의 잔뜩 들뜨고 애교 섞인 목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이상한 휴일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로레인에게서 매일 같이 전화가 와서 약속을 잡지 말라는 닦달을 받았다.
발렌틴은 그냥 일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다만, 이날 자기들의 가족을 집에 놔두고 일을 한다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결과적으로 원치 않아도 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아무튼 발렌틴은 오늘 최소한의 시간만 침대에서 내려올 작정이었다.
“미안한데, 로레인. 오늘은 정말 혼자 쉬고 싶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나직이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떠들어대던 목소리에 공백이 생겼다.
“…그래? 에이…, 그럼 할 수 없네. 푹 쉬다가 혹시 심심해지면 와요. 저녁때까지는 교회에 다들 모여 있을 테니까. 알았지?”
“알았어.”
이윽고 통화를 마친 발렌틴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로아타르에서는 이렇게 늦잠을 자는 날도 꽤 있었다. 아버지의 농장 일만 도우며 생활하던 때에는 겨울마다 얼마든지 게으름을 부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은 로아타르가 아닌 테스카였고 평소처럼 일을 할 수 있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12월 말의 추위 속에서 새로 깐 겨울 이불의 폭신폭신함을 만끽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도 드물게 누리는 사치였으니 말이다.
발렌틴은 금세 도로 잠이 들었다. 얕은 잠에 빠진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뭔가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울적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눈을 뜨고 말았다.
‘오랜만에 쉬려니까 꿈자리까지 뒤숭숭하군.’
발렌틴은 인상을 찌푸리며 베개를 끌어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비가 와서 그런가.’
빗소리가 들렸던 듯도 해 창문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것도 꿈속에서의 착각이었던 건지 날은 오히려 맑아 보였다. 불을 켜지도 않았는데도 방 안이 환했다.
발렌틴은 커튼이 한 겹만 내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
창가로 바짝 다가가자 냉기가 훅 몸으로 스몄다. 커튼을 젖혀서 확인해 보니, 밤사이 눈이 정원 위를 새하얗게 뒤덮고 아직까지도 내리고 있었다.
‘눈까지 내려주는군.’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발렌틴을 제외한 테스카의 모든 이들이 휴일을 즐기기에 딱 좋아 보이는 날이었다. 그저께는 발렌틴의 회사 입구에도 알록달록한 장식 나무가 하나 놓였다. 사장인 베르몬드는 올 크리스마스에는 그 옆에 눈사람도 나란히 세워놓고 싶다며 기대에 부푼 눈을 했었다.
발렌틴은 조금 망설이다가, 창문 위로 커튼을 두 겹 모두 내려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방 안이 수면을 취하기 적절한 정도로 어두워졌다. 누워 있던 자리는 금세 식어있었지만, 이불 속에서 멍하니 웅크리고 있는 동안 서서히 온기가 돌아왔다.
잠시 안락함에 잠긴 채로 몸을 뒤척였다. 얇은 잠옷바지 앞이 이불에 스치며 꿈틀하고 부피를 더욱 키웠다. 잠에서 깨기 전부터 이미 뻐근해져 있던 허벅지 안쪽이 조금 전의 묘한 꿈을 꾼 이후로 점점 더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꼼짝 않고 느긋하게 늘어져 있으려던 일정이 새벽부터 틀어지더니 이제는 잠도 다 깨버렸다. 밖이 추워서 몹시 귀찮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문을 열자 예상 밖의 훈훈함이 느껴졌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누군가 벽난로에 불을 지펴주고 간 모양이었다.
발렌틴은 방문을 닫고, 응접실 한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머리 위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피곤한 눈을 감은 채로 벽을 짚고 섰다. 몇 초만에 졸음이 밀려와서 그대로 졸면서 몸을 데웠다.
‘다음 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아이레스에 갔다 와야겠어. 약속 몇 개를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멍한 머릿속에 다음 주 일정을 구겨 넣으며, 물기를 흠뻑 먹은 머리카락을 넘기고 눈을 비볐다.
처음에는 약간 뜨거울 정도로 느껴졌던 물의 온도가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는 레버를 조절해서 수온을 조금 높이고, 따뜻한 물줄기에 자극이 더해진 허리 아래를 움켜쥐었다.
*
물을 끄자마자 으슬으슬 한기가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면서, 다리에 아직 씻어내지 못한 비누 거품이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보았지만 무시하고 대충 몸을 닦아내며 밖으로 나왔다.
“어머나아!”
별안간 들려온 여자 비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벽난로 옆 소파에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여자는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손으로 얼굴 앞을 막고 있었고, 남자는 자기 몸으로 그 앞을 가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발렌틴은 욕설을 내뱉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삼켰다. 들고 있던 수건으로 재빨리 허리를 둘러 가리고서, 옷을 입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작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안 봤어. 어머 세상에…. 아무 것도 못 봤으니까 남자들, 나는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마나님이 장가도 안 간 총각 알몸도 다 보고 횡재했군.”
“안 봤다니까 그러네, 자기는.”
“변태들. 무단 가택 침입자들.”
발렌틴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편안한 태초의 차림으로 보낼 난로 앞에서의 노곤 노곤한 시간이 물 건너 가버렸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응접실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무뢰배 부부 정도를 제외하면.
“발렌틴, 이건 어디로 보나 집안에서 나체로 다닌 자네가 잘못 아닌가. 왜 남의 마누라한테 보여주고 그러는 거야?”
“경찰 안 부르는 걸 고맙게 생각해. 문은 누가 열어줬지?”
옷을 다 입고 나오며 말하자, 소니아가 자기 입 앞에 손을 모으고 응접실 문 밖을 향해 말했다.
“저런. 그렇다고 하네요, 펜 씨.”
“우린 점심 얻어먹어주러 왔단 말이야. 자네가 심심할까 봐. 마사 아주머니랑 펜 밖에 없다며? 밥 먹고 나가서 놀자. 저녁은 내가 살게.”
프란체가 자기 집 거실인 양, 소파에 편하게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말했다. 소니아도 재촉하듯 미소 띤 얼굴로 발렌틴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어제 내가 마사 아주머니한테 말해서 오늘 점심 메뉴는 오리로 예약해 놨거든요.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는데 난 새 요리는 못 만들어서.”
“우리 집 메뉴를 왜 댁들이 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밥은 줄 테니까 먹고 나가서 둘이 놀아요.”
“에이, 둘이서 놀면 식상해요. 20년을 둘이서만 놀았는데. 나이 먹으니까 점점 여럿이서 노는 게 더 재미있어져.”
소니아는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지만, 두 남자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듯 ‘나이 먹으니까’라는 말을 즐겨 썼다.
“오늘 우리 마나님이 교회에서 노래도 부르신다네. 크리스마스만 되면 교회 구경하러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 테스카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네는 편하게 집 앞에서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난 안 좋아. 교회에도 안 갈 거고.”
발렌틴이 말하자, 소니아가 야유하듯 엄청난 콧소리를 냈다.
“혼자 심심하게 집에서 뭐하려고요? 우리 몰래 데이트 하러 가려고?”
“당신도 참, 발렌틴한테 여자가 어디 있어?”
“어머, 몰래 만나고 있을 수도 있지, 자기는 뭘 몰라.”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부부를 보며, 발렌틴은 만약 여자가 생긴다면 반드시 몰래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만은 숨기는 걸로.
“근데 진짜 약속 있어? 아까 나갈 준비 하고 있었던 거 아냐?”
부인이 잘라주는 오리 가슴살을 냉큼 받아먹으며, 프란체가 물었다.
“뭐어….”
발렌틴은 모호하게 말을 흐리고 입으로 음식만 날랐다. 어중간한 시간에 욕실에서 나온 것 때문에 약속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더 푹 잘 자려고 따뜻한 물로 씻었다고 가르쳐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하여간 일 생각하지 말고 같이 놀아요. 알았죠?”
소니아가 거듭 다짐을 받았다. 발렌틴은 슬슬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보니까 약속한 사람이 하나 더 있다든지.”
“어머, 무슨 말씀이에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하겠다고 굳게 약속 했잖아요. 우리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졌나 봐.”
소니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프란체가 부인을 거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아가씨를 섭외할 필요도 없지. 저녁 때 교회에 가면 약혼 안한 아가씨들이 바글바글 나와 있을 텐데. 내 짝은 어디에 있나 아가씨들도 눈에 불을 켜고 있을걸.”
하여간 약속에 말도 없이 여자를 불러서 맞선을 보게 하는 사람들이니,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거기에다 외출하기 귀찮았던 이유도 있던 터라 발렌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프란체가 금방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네도 그만 튕기고 어떻게 좀 해 봐. 일만 하고 선도 안 본다고 하면 어떻게 아가씨를 만날 수 있겠나.”
“안 만나도 되네.”
“장가는 가야 할 거 아니야.”
“갈 때 되면 가겠지.”
이번에는 소니아가 다시 야유를 퍼부었다.
“아니, 아가씨들이 있는 자리에 끼는 것도 아니고 선도 안 본다고 그러는 사람을 누가 무슨 수로 데려가요? 발렌틴, 여자한테 큰 상처 받은 적 있는 거 아니야?”
“있어요.”
발렌틴이 나직이 대답하자, 소니아가 흠칫하며 한발 물러났다. 그녀는 ‘그래요?’하고 부드럽게 말하더니, 그 후로는 얌전히 오리고기 자르는 일에 전념했다.
시끄럽던 부부가 조용해지자 한결 식사가 편해져서, 발렌틴은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식사 후에 차를 마시고 일어나자마자, 프란체가 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갈 거지? 자네도 같이 갈 거지?”
“뭐 하러 자꾸 날 데리고 다니려고 그래. 내가 자네 자식도 아니고.”
“자식이랑 다를 게 뭔가. 우리 발렌틴을 챙겨줄 부인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끼리 놀아도 마음이 안 놓일 것 같아.”
“내 부인은 내가 알아서 만들 테니, 오늘은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게.”
발렌틴이 말하자, 프란체가 갑작스럽게 활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거, 자네 입으로 부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리 좋구먼. 그래, 어서 힘내서 부인을 만들어 오라고.”
그가 너무도 해맑게 기뻐하니, 이제는 잔소리한다고 불평할 생각도 사라졌다. 발렌틴은 알겠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차가 세워진 곳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조수석에 오르기 전, 소니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따 저녁 때 교회에 오시든지 어디든 바람도 쐬고 와요. 종일 주무시기만 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로레인도 똑같은 말을 하던데.”
“그랬어요? 어우, 우리 교회가 더 볼 것도 많고 좋은데. 뭐, 가짜 엄마가 여동생을 이길 수 있나.”
소니아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같이 웃어주고 나니, 프란체가 곧 기어를 넣었다. 자동차가 출발하는 걸 보고나서, 발렌틴은 집 안으로 들어와 응접실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대고 앉았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시계는 벌써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소니아와 이야기하다가 큰 의미 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저녁때는 로레인을 보러가는 것으로 정해진 기분이었다.
슈하스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안팎이었다.
*
“이러면 결국 내가 로레인의 말대로 해주는 것 같잖아.”
먼저 차에서 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중얼거리자, 펜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렇게라도 뵙고 안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아가씨께서 오지에서 근무하시느라 생사만 겨우 확인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정말이지 로레인의 보스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찌나 무자비한지, 전화도 우편국도 없는 오지로 가서 반년에 한 번씩 통화를 하던 때도 있었다. 심지어 앞으로도 몇 년에 한 번씩은 지역을 바꿔서 발령을 낼 것이고, 언제 또 오지 행이 될지 몰랐다.
“그런데 선물 안 사 오셔서 어떻게 합니까?”
“로레인은 어차피 현금을 더 좋아해.”
“그래도 여자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닐 텐데….”
펜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발렌틴이 괜찮다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려던 때, 안에서 눈에 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직자며 부하들에 둘러싸여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는 슈하스의 영주인 하겔이었다.
그가 맞은편에 있는 발렌틴을 보더니, 찌를 것 같은 뾰족한 코끝을 넓히며 미소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웨버 경께서 슈하스에는 어쩐 일로 다 오셨소?”
“안녕하십니까, 하겔 남작님.”
발렌틴은 하겔이 내민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하겔이 금방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 경께서도 슈하스에 후원을 하고 계시니 이런 날 와보지 않으실 수 없었겠군요.”
교회는 영지의 재산이 아니었으며 영주에게 아주 적은 세금만을 내고 있었는데, 하겔은 마치 자신의 영지의 후원자를 맞이하듯 말하며 발렌틴을 환대했다.
사실 그가 발렌틴의 부모를 알고 있으며 조부에 대해서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능구렁이처럼 숨기며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 발렌틴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오늘 즐거운 날을 맞이해서 나도 성의껏 기부금을 내볼까 하고 왔는데 우리 웨버 경께서 나타나시니 내가 참 무안해지는구려. 하하.”
발렌틴은 하겔이 자신에 대해 크게 떠드는 것이 불편해 못 견딜 지경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남작에게 면박을 주거나 자리를 피하기도 난처했다. 하겔이 여러 사업에 직접 손을 대고 있어서 거래하는 일이 많았으니 더욱 그러했다.
“거창한 후원을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 오늘은 그저 아는 분 안부 차 잠시 들른 것입니다. 혹시 일정이 괜찮으시다면, 다음 달 내로 성으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경께서 찾아주시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혹시 지인분과는 저녁 약속을 하셨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마침 잘됐군요. 오랜만에 친척을 만나서 저녁이나 하려던 참이었는데 같이 하시면 어떻겠소? 안 그래도 언젠가 경께 소개해야지 싶었는데 이것도 인연이 아닌지.”
하겔이 반색하며 곁에 있던 청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청년이 먼저 발렌틴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매끄러워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을 보아하니 섬나라 바넬의 피를 물려받은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곱상한 느낌을 주는 피부와 얼굴선에 반해, 분위기는 어딘지 어둡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이쪽은 얼린 경이오. 내 외삼촌의 장남이지. 나중에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을 테니 자작님이 될 겁니다.”
하겔이 만면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얼린이 차분한 눈으로 입술 끝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얼린 다이어입니다. 남작님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웨버 경을 존경하게 되어서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금방 기회가 되다니 기쁘군요.”
그의 말투는, 그 말이 문장에 담긴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발렌틴은 얼린과 악수를 나누며, 혹시 하겔이 그에게 자신의 가문에 대해 흘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인 분은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웨버 경?”
하겔이 물었다.
그는 발렌틴이 이제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찰나였다는 것을 잊은 듯 보였다. 그들을 따라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을 하기는 아까웠다.
“아닙니다, 지금 막 뭘 좀 전해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다녀 오시지요.”
하겔은 마음대로 약속을 정하고서, 일행들과 바깥으로 나갔다.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 된 건가.’
발렌틴은 안으로 걸음을 옮겨, 성가대의 합창이 들려오는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 안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여서 음식을 나누며 합창을 듣고 있었다. 로레인은 금방 눈에 띄었다. 눈도 동그랗고 얼굴도 동그란 키 작은 수녀 하나가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아이들 수발을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발렌틴은 잠시 입구에 선 채로, 로레인과 그녀가 챙겨주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네타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보호소의 아이들인 듯했다.
아무튼 그냥 보기에는 즐거워 보였다. 발렌틴이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다른 노처녀들처럼 오라비 살림이나 챙겨주는 게 부모님 마음을 더 편하게 해드렸을 텐데 말이지.”
발렌틴이 말하자, 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나가지. 바빠 보이는데 봉투는 사무실에 전해주고 가야겠어.”
발렌틴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합창을 듣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다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로레인의 곁에서 꼬마 아이를 안고 앉아 있던 여자가 문득 옆을 돌아보아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 처음 보는 아가씨가 분명한데도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꽤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목구비에, 빛이 닿는 부분이 거의 백금발로 보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의 조합이 독특해서, 만약 과거에 만난 적이 있다면 잊지 않았을 인상이었음에도.
“웨버 경, 헬레나 수녀님이 계시네요. 저분께 전해드릴까요?”
펜이 바깥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러면 그분을 귀찮게 하는 게 되니까….”
발렌틴은 아직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내 부인을 데려오라는 말을 듣다가 온 탓일지도 몰랐고, 어쩌면 아침에 묘한 꿈을 꾸고 발정이라도 한 것인지 몰랐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거두고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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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이미지 보호차원에서라도 저 별은 없앨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