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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9화 (19/140)

00019  헤밀 편 - 긴 겨울  =========================================================================

“아가씨가 뭘 안다고…. 우리가 애를 학대하기라도 했다는 거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웬디를 데리고 돌아가면, 어르신의 댁에서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있었는지 물어보겠어요.”

되는 대로 쏘아붙이는 아드리아나를 노아가 말렸다.

웬디는 아드리아나의 손을 꼭 쥔 채로 표정 없이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보?”

바깥의 소란을 들은 웬디의 고모할머니가 행주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이미 대강 짐작하고 있었던 듯, 그녀는 누가 왔는지 찬찬히 살피며 남편의 등 뒤에서 발을 멈추었다.

“아 글쎄, 이 사람들이 웬디 어미가 어쩌고 하면서 애를 나중에 다시 데려오라잖아.”

“아….”

로즈가 웬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웬디는 입꼬리를 더욱 늘어뜨리며 아드리아나에게 매달렸다.

“…돌아가고 싶다고 했니? 웬디야?”

웬디의 눈에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뭔가를 겁내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애를 겁주지 말라고 소리를 지려다가, 노아가 팔을 지그시 누르며 다시 정신이 들게 하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웬디 양과 친자매처럼 지내는 아가씨인데, 동생이 이렇게 갑자기 없어진 데다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져 있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어르신.”

“뭐…그럴 수도 있죠….”

로즈가 남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정히… 웬디가 가고 싶다고 하면 당분간은 거기에 있게 하시든지요. 우리는 애를 더 편한 곳에서 지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 것뿐인데….”

“물론 그러시겠지요. 오늘은 저희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늦은 시각에 시끄럽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노아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난 후, 서둘러서 웬디의 짐을 챙겼다. 짐은 웬디가 평소 가까운 곳에 외출할 때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 하나가 다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배웅하는 노부부를 뒤로하고 나오다가, 노아가 문득 돌아보며 말했다.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만, 어르신들께서는 웬디 양을 정식으로 입양하시려는 거지요?”

그의 물음에, 노인이 당혹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더니 성을 내듯 말했다.

“그럼 당연히 호적에 들어야 애가 보호를 받지, 성치도 않은 어미 성을 이어봤자 무슨 득이 되겠소?”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주십시오. 그 뒤에 웬디 양을 데려가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핏줄을 데려가겠다는데 생판 남한테 무슨 도움 받을 일이 있다는 건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노인을 무시하고, 노아는 일행을 챙기며 그 집을 나왔다.

어느덧 날이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웬디가 캄캄한 길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주고, 자신들보다 약간 앞장서서 걷는 노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웬디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오드리…. 나 진짜 따라가도 돼?”

“그럼, 당연하지. 근데 춥지는 않니?”

“쪼금.”

차에 오르자마자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웬디에게 주었다. 노아는 운전석 창문에 턱을 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뒷좌석에 탄 웬디를 돌아보았다.

“어른들이 나쁘게 대하시지는 않았니?”

“아뇨. 별로 그런 건 아닌데…. 할아버지가 조금 무섭지만….”

웬디가 쭈뼛쭈뼛 대답하자, 노아는 알겠다며 미소 지어 보이고서 천천히 차를 돌렸다. 얼굴에는 답답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도로에는 이따금 영지 내로 들어오는 마차 정도가 눈에 띄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번화한 곳이라고 해도 날이 저물고 나면 길에 사람이든 차량이든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우아즈를 빠져나오자 길이 나빠지고 앞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남작령 이상쯤 되는 영지에는 대개 전기가 들어왔지만, 길 위에 빠짐없이 가로등을 세워 놓는 곳은 수도와 테스카 정도였다.

노아는 논과 밭 사이에 깔린 좁은 길에 들어서서부터,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무 말도 없이 목을 빼고 앞에만 집중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요.”

아드리아나가 새까맣게 보이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노아는 대답할 정신도 없어 보였다. 설상가상, 컴컴한 길을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던 차의 앞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드리, 무서워….”

“괜찮아. 이리 와.”

아드리아나는 웬디를 끌어안고 차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차가 갑자기 덜컹, 한쪽 바퀴가 어딘가에 빠진 듯 기울었다.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와락 안겨오는 웬디를 꼭 껴안고, 아드리아나도 같이 소리를 질렀다. 둘 다 겁을 먹고 서로 달라붙어 있다가 노아의 눈치를 살폈다. 차는 후진해서 금방 움푹 파진 곳에서 빠져나왔다.

“미안해요. 비 때문에 미끄러지네요. 길도 잘 안 보이고….”

“어떻게 해요?”

“묵어갈 만한 데도 없을 텐데….”

슈하스의 도로가 나오려면 적어도 30분 이상 달려야 했다. 노아는 운전석 문을 열고 바깥을 잠시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며 차를 뒤로 돌렸다.

“뭔가 보이나 봐줄래요?”

일행은 다시 우아즈로 들어서서 불이 켜진 곳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느릿느릿, 백작의 성이 보였던 시내 입구까지 도착했지만, 건물에는 모두 불이 꺼져 있어서 제대로 분간도 되지 않았다.

큰길을 몇 분 정도 돌아다니다가, 웬디가 불이 켜진 숙소를 발견해냈다. 커다란 미술관 옆에 있는 흐릿한 가로등이 여행객을 위한 숙소의 간판을 드러내고 있었다.

“웬디 양, 시력 엄청 좋은데?”

노아가 내려서 방을 알아보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웬디와 함께  차 안에서 기다렸다. 숙소를 찾아서 안심한 것인지 웬디는 금세 눈을 비비며 어깨를 기댔다.

잠시 후, 노아가 뒷좌석의 창문을 노크했다.

“방이 하나 남았대요. 오드리 씨가 웬디 데려가서 쉬고 와요.”

“휴스턴 씨는요?”

“전 차에서 잘게요. 시트를 눕힐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여자가 둘이고 남자가 하나니, 제가 희생하는 수밖에요. 우리가 동침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노아의 웃음기 섞인 말에 아드리아나는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 어떤 남자와도, 버클리와도 한방에서 잠을 자본 적이 없었고, 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도 원하지 않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었다.

“그치만 밖은 비도 오고 너무 추워요.”

“괜찮아요. 차에는 뚜껑이 있으니까요.”

노아가 오드리가 했었던 말을 따라 했다. 그 이상 같이 방에 들라고 계속 권하는 것도 부끄러워졌다.

아드리아나는 웬디를 깨워서 함께 여관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다. 그것을 보니 다시 노아가 생각이 났지만, 웬디를 한쪽 침대에 눕히고서 다른 침대 위는 자신이 차지했다.

‘휴스턴 씨는 버클리와 굉장히 다르구나. 훨씬 어른 같아. 훨씬 예의도 바르고….’

처음에는 노아가 미네타를 좋아해서 보호소의 일을 잘 도와주고 그녀에 대한 얘기를 하며 잘 웃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겪어 보니 노아는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잘 들어주고 잘 웃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배려해주는 태도를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버클리와의 일 이후로 남자들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버클리가 너무 친절하고 자상해서 쉽게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아만 보더라도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과연 버클리가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 축에 속했는지 하는 것이이다. 아직 많은 사람들과 접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드리아나는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남성 이웃 중에서조차 버클리보다 덜한 신사를 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게 분했다. 하지만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버클리가 진실한 사람이라고, 자신과 모든 걸 나누고 베풀어주는 진실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이었다.

어쩌면 노아가 정말 보기 드물게 좋은 남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정도가 보통의 신사인 것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버클리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원래 그런 아이라고 했어. 천박한 일에 끌리게 되어 있다고….’

아드리아나는 버클리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다가 결국 그와 나누던 행위를 더 적극적으로 원하게 되었던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말했던 그 예언의 내용처럼 정말로 자신의 천한 운명을 타고난 걸까 하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혹시 노아를 자꾸 남자로서 의식하게 되는 것도, 자신에게 그런 본성이 있기 때문인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저 서로의 영혼을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을 바라왔는데. 평생토록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며 오랫동안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바랄 뿐인데.

‘나는 더 신중해져야 해.’

노아를 좋아하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지만, 아드리아나가 기대해왔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영혼이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와 행복해질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버클리에게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인, 내 것이 아니라는 거리감이 그에게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처음부터 그가 미네타를 좋아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아냐,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면 안 돼.’

어쨌든 내색하지 않고 있으면, 그러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갈 터였다. 머지않아 그에게 연인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런 관심이 식을 수도 있고, 더 운이 좋으면 아드리아나에게 진짜 운명이 나타나줄지도 몰랐다.

‘아무나 금방 좋아하게 되면 안 돼. 그럼 후회하게 될 거야. 나는 내 사람을 기다려야 해.’

어딘가에 자신의 운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곧 열여덟이 될 성인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남녀가 어떤 조건을 두고 짝을 골라 결혼해야하는지도 대강은 알았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어릴 적부터 그를 느껴왔다. 꿈속에서는 더욱 선명해졌다. 깨어나면 그 안에서의 모든 게 안개처럼 흐릿해졌지만, 어딘가에 그가 존재하고 자신이 그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바람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휴스턴 씨는 괜찮을까.’

빗소리가 멎지 않는 것에 다시 그가 생각났다. 아드리아나는 방 한구석에 여분으로 놓여 있는 이불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내려갔다.

“저기, 이거라도 덮으세요.”

차 문을 두드리자, 운전석에서 담요를 끌어안은 채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있던 노아가 아드리아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벌써 주무셨나 봐요.”

“아… 네. 금방 자죠?”

그가 겸연쩍은 듯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쓱쓱 빗어 내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불을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그럼 잘 자요.”

노아가 나른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웃어주며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노아에게 작은 도움을 줌으로써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아진 탓도 있었지만, 그를 좋아하게 될까 봐 느껴지던 초조함이 가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웬디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뉘이고,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잔잔한 빗소리를 들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단 한 가지라도 힌트가 주어져서 내게 꼭 맞는 완벽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모두가 다 그렇다면 아무도 아픈 일은 겪지 않아도 될 텐데.’

아드리아나는 그날 새벽, 오랜만에 이시스를 찾았다. 헤밀에 온 후로는 아무리 바라고 바라도 나타나주지 않았던 꿈이었다.

꿈속의 이상향은 여전히 흰 눈에 덮인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아드리아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가 나타나 아드리아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리고 이전에는 한 번도 생기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언제나 안개처럼 흐릿했던 그가 생생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와서 아드리아나에게로 팔을 뻗고 몸을 끌어안았다. 전에는 아드리아나가 아무리 그렇게 하기를 원했어도, 어렴풋하기만 한 감각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방해했었다. 그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과 서로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거의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그 움직임과 감촉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생생했다.

그의 따뜻한 가슴에서 심장소리가 쿵쿵 들려왔다. 손을 뻗으면 그의 몸이 만져졌다. 두터운 목 뒤를 감싸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나는 이 사람을 만날 거야.’

그를 향한 애정과 갈망이 뭉클하게 솟아났다.

‘얼굴을 봐야 해.’

그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듣고, 사는 곳을 물어보고, 이 순간을 깨어날 때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 그를 찾아가리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나는 분명히 그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느꼈다.

마치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아드리아나는 두 손을 내밀어서 그의 뺨을 감쌌다. 그도 아드리아나의 손 위로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을 겹쳤다.

“…이름을 말해줘요.”

그는 다정한 손길로 아드리아나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를 닦아냈다.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아드리아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전부 꿈이기 때문이리라. 그에게는 목소리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라는 사람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이번에는 아드리아나를 마주 안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뛰는 심장 소리를 선명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눈이 떠진 것은 그 직후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드리아나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쿵, 쿵, 심장 소리가 아직도 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는 어슴푸레한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본 적이 없는지도 몰랐다.

꿈의 여운 탓인지, 밖으로 나가면 가까운 곳에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것과 분명히 달랐던 그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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