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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8화 (18/140)

00018  헤밀 편 - 긴 겨울  =========================================================================

차는 두 시간쯤을 쉬지 않고 달렸다. 슈하스를 지나서 마을 하나를 더 건너가자, 커다란 회색 성이 보이는 우아즈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었다.

스며들어오는 공기가 한층 시려지는 듯해, 아드리아나는 입고 있던 외투를 바짝 여몄다.

“…웬디네 고모할머니가 처음에 오셨을 때 ‘로즈’라는 이름밖에 듣지를 못했어요. 성과 주소 같은 것까지 확실히 들어둘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훨씬 찾기 쉬웠을 텐데….”

“할 수 없죠. 어쩌면 그분이 일부러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노아가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웬디의 고모할머니라는 사람이 처음 찾아왔을 때 확실하게 대처해놓지 않은 일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미리 신분을 확인해 놓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그래야만 했다.

다만 웬디가 할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릴 적에 잘 해주셨다는 말을 했기에, 아이를 하루 맡기는 것쯤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보내줬었다. 너무 안이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런 식으로 말도 없이 다시 데려갈 줄은 몰랐어요. 미네타였다면 처음부터 주소를 적어놨을 텐데….”

차창 밖으로 혹시 웬디의 모습이 눈에 띄지는 않을까, 아드리아나는 차 안에서조차 한시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오드리 양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노아가 말했다.

“할머님이 직접 와서 데려갔다니 별일 없을 겁니다. 저번에도 노느라 연락이 없었다면서요. 아이니까 금방 또 잊어버리고서 놀고 있을 수도 있겠죠. 혹시나 그 집에서 웬디가 보호소로 돌아가는 걸 싫어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사실 문제라고 할 수 없을 거예요.”

“…친척이 키워주겠다고 했으면 굳이 반대하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식으로 데려갔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노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시민들이 지방의 복지법이 개정되는 걸 들여다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말이죠.”

“네?”

“…아닙니다. 일단은 알즈부터 찾아볼게요.”

노아가 차를 우아즈의 첫 번째 호수로 몰았다.

우아즈는 백작령에 속하는 도시인만큼, 남작령인 슈하스나 리노아스보다 땅이 훨씬 넓었다. 이름이 알려진 호수만 해도 2개가 있었다.

둘이서 그 근처를 뒤지며 ‘로즈 할머니’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헤밀에서 온 노아 휴스턴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에 돌봐주셨던 친척 어르신을 찾아뵈려고 하는데 기억나는 게 우아즈 호숫가에 사신다는 것과 ‘로즈’라는 성함밖에 없어서요.”

두 사람은 알즈 호수 근처에 도착해서 먼저 중년의 부인들이 몰려 있는 회관이나 가게를 찾았다. 노아는 진짜 목적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웬디의 할머니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범위가 너무 넓다는 어려움 외에도, 우아즈의 주민들이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도 아드리아나와 노아를 난처하게 했다.

“여기 분들은 이웃과 교류가 적으신가 봐요.”

“그런 것 같네요. 이래서 찾을 수 있을지….”

첫 번째 호수 근처를 다 뒤지지도 못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다. 두 사람은 근처 식당에서 식사한 후에 다시 웬디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휴스턴 씨는 오늘 일 안 하시는 거예요?.”

조금 미안해서 묻자, 노아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웃었다.

“일이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직 신출내기라서요.”

그는 아드리아나가 자기 몫으로 시킨 가벼운 샐러드 요리를 먹는 동안, 면 요리와 고기 요리를 각각 한 접시씩 다 먹어치웠다.

“보기보다…잘 드시네요.”

“벌면 식비로 거의 다 쓰죠.”

노아가 배를 문지르며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키도 체격도 평균에 가까운 편인 것에 비해 먹성은 옛날 아드리아나의 저택에서 부리던 노동꾼들에 견줄 만했다. 그러고 보면, 가끔 시내에서 마주쳤던 휴일에도, 노아는 혼자서 이 가게 저 가게의 요리를 먹고 연극을 보는 등 쉴 틈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활동량이 아주 많고 먹기도 아주 많이 먹는 사람인가 봐.’

미네타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신기했다.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노아와 달리 미네타는 밖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먹는 일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휴스턴 씨는 미네타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아아.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둘 다 헤밀이 고향이거든요. 제가 한 학년 위였는데 학생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서로 다 알고 지냈죠.”

조금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두 사람이 보호소의 일 때문에 최근 알게 된 서먹서먹한 사이일 것으로 생각했고, 나이도 노아가 훨씬 연하일 줄 알았다.

하기야 외모를 보고 판단한대로 그가 20대 초반이라면 아무리 빨리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도 벌써 변호사 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 미네타 선생님이랑 별로 안 친해 보이죠? 사실은 그때도 안 친했거든요.”

노아가 홀짝홀짝 물컵을 비우며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이렇게 대했어요. 그런데 오드리 씨는 미네타 선생님이 특별히 예뻐하시는 것 같아요. 그분은 보호소 애들한테나 장난치고 괄괄하게 하시지, 본인 친척들한테도 별로 친근하게 대하지 않으시던데요.”

“그건 저를 애들하고 동급으로 보시기 때문이에요.”

아드리아나가 얼마 전 미네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미네타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웬디보다도 밖에 내놓기 걱정스럽대요.”

“하하. 그런가요? 하긴 자기보다 어리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일 때도 있죠.”

“그래도요. 제가 웬디보다 8살이나 많은데.”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동안 잡담을 나누며 기분을 너무 가라앉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둘 다 웬디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빨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초조했고 찾을 일이 막막했지만, 안달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럼 좀 더 돌아볼까요?”

“네.”

조금만 더, 한 군데만 더 하고 돌아다닌 것이 1시간쯤 지났다. 이후로는 또 다른 호수 쪽을 찾아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

아드리아나는 차 문을 닫고서, 시린 손을 코트 안쪽으로 끼워 넣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정말 겨울 같아요.”

“그러게요. 내년에는 난방 장치가 딸린 자동차가 수입될 거라던데, 좀 기다릴 걸 그랬나 봐요.”

“와, 차 안에 난로가 생기는 건가요?”

“그런 셈이겠죠?”

노아가 웃으며 아드리아나에게 담요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차창 너머의 하늘을 불안한 듯 올려다보았다.

“흐려지는데….”

그가 중얼거리며 핸들을 돌리고, 조금 급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두 번째 호수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였다.

그곳은 첫 번째 호수보다 크기가 작았던 만큼 근처 마을의 가구 수도 더 적었지만, 탐문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때가 저녁식사 준비 시간이었고 하늘이 흐려진 탓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람들의 태도도 더 무뚝뚝했다.

“그런 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거리에 드물게 사람이 보여도, 질문을 하면 그런 식의 짧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함에 아드리아나의 마음에도 초조함이 더해졌다.

“가게들도 다 벌써 닫았고….”

두 사람은 호수 주변을 서성이다가 그곳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찾아가 보았다.

학교는 일찌감치 수업이 끝나서 당직 남자가 혼자 건물 안을 지키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더라면, 운이 좋으면 웬디와 같이 놀았다던 그 아이들을 찾아볼 수도 있었건만 이미 알즈에서 시간을 지체한 터라 그 점이 아쉬웠다.

“꼬마 둘이 있는 집이라고 해도… 한두 집이 아니니까 말이지요.”

“알려주실 수 있는 만큼이라도 부탁하겠습니다.”

노아가 사정을 말하며 부탁하자, 당직은 선뜻 학생 명단을 가져와주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명단을 넘겼다.

“에…봅시다. 꼬마 둘 있는 집이라….”

그는 아이가 둘 있는 집을 추려내더니, 그 주소를 적어서 노아에게 건네주었다. 열 군데가 조금 넘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다 돌아볼 수 있겠어요.”

노아는 다시 서둘러서 차를 출발시켰다.

아드리아나는 그와 함께 명단에 적힌 집을 순서대로 찾아다니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를 찾고 있다고 말하고 로즈라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6번째 집에 도착해서, 노아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였다.

담장 안으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아드리아나가, 거기서 웬디를 발견했다.

“웬디!”

창문을 등지고 놓인 소파 위에, 웬디가 쪼그린 채로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어두운 금발 머리카락은 묶지 않고 조금 흐트러져서 어깨를 살짝 덮고 있었다.

이제 막 저녁식사가 끝난 직후인 듯, 다른 아이들은 디저트 과자를 들고 뛰어다니고 있었고, 어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휴스턴 씨, 여기 있어요. 웬디가….”

대문에는 와튼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웬디 고모할머니의 성일 것이 틀림없었다.

노아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시오?”

이윽고 풍채 좋은 노인이 현관을 열고 슬리퍼를 끌며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웬디가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 밖에 서 있는 아드리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웬디는 벌떡 일어나서 소파에서 내려왔다.

“오드리!”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노인과 문틈을 비집고 뛰쳐나온 웬디가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말도 안 하고 나오면 어떻게 해? 걱정했잖아.”

아드리아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자, 웬디는 입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흐이잉, 울기 시작했다.

노인이 인상을 쓰며 헛기침을 하더니 쌀쌀맞게 물었다.

“댁들은 누구시오?”

“저희는….”

아드리아나는 자신들에게 웬디를 보호할 권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자신 없게 말끝을 흐렸다.

노아가 남자에게 명함을 건넸다.

“저는 웬디 양의 어머니께 부탁을 받아서 대신 이웃에게 맡긴 사람입니다. 변호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노인이 낮고 긴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리고 미심쩍어하는 듯한 눈으로 노아를 훑어보았다.

아드리아나도 처음 듣는 말이어서 노아를 쳐다보았다.

“웬디의 어미가…?”

노인의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 묻어났다. 노아는 동요 없는 얼굴로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거긴 불법 보호시설이지 않소?”

“보호시설과 비슷하지요. 그 이웃분께서 워낙 봉사에 관심이 많으셔서 아이들을 보살피기에 편리한 구조로 살림을 꾸리고 계십니다. 물론 동네 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만, 서로 돕는 시골 마을의 정 아니겠습니까? 불법이라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아무튼 웬디 어미도 이제 치료를 받기로 해서 우아즈의 훌륭한 시설에 입원 수속을 밟고 있소이다. 안됐지만, 어미라고 해서 그쪽이 뭘 결정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란 걸 선생도 잘 아실 거요. 친척인 우리가 키워준다고 하면 오히려 고마워하지 않겠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웬디의 어머니와 말씀을 나눠 본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보시오, 선생.”

노아가 웬디의 손을 잡고 발길을 돌리려하자, 노인의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웬디는 아드리아나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고, 아드리아나는 웬디의 떨리는 몸을 꼭 붙들었다.

“다 늙은 노인네들을 번거롭게 하는 게 아니오. 아무렴 어미가 애를 생면부지의 남한테 맡겨놓고 마음이 편하겠소? 우리는 웬디의 가족이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 고아원 같은 데서 불행한 아이들끼리 어울리면서 크는 게 애한테 얼마나 안 좋은데 굳이 거기 있게 하려는 거요?”

“그런 말씀은….”

아드리아나가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거기 있는 아무도 불행하게 지내지 않아요. 보세요, 웬디도 돌아가고 싶어 하잖아요. 여기 있는 게 더 좋다면 왜 돌아가려고 하겠어요?”

“아니, 어디 젊은 아가씨가….”

“혹시 웬디에게 보호소로 전화도 못 하게 하신 거 아닌가요? 데려가신다고 말씀하셨으면 무조건 반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왜 애를 말도 없이 납치하듯 데려가신 거죠? 머리카락 빗어줄 사람도 안 계시는지 웬디만 엉망이고, 안에서도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걸 다 봤어요.”

아드리아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마구 쏟아내다가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산소가 부족해진 것처럼 어깨가 들썩였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대들어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활발한 웬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눅이 들어 있는 걸 보니, 뭐라도 대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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