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7 헤밀 편 - 긴 겨울 =========================================================================
그는 반지 위에 두꺼운 돋보기를 대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천으로 감싸서 집어 올리고 이리저리 빛에도 비추어보았다. 그 동안 아드리아나는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키고 서 있었다.
가게 주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희 가게에 오시는 마을 분들은 주로 오래되거나 싫증 난 금제품을 팔러 오시는 경우가 많지요.”
“네….”
의심받고 있는 걸까.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행색이 다이아몬드 반지와 어울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손가락에 맞지도 않게 된 물건이었다.
“팔 수… 없는 건가요?”
“이 다이아몬드는 8캐럿이 넘는군요. 이런 데서 처분하시기에는 아까운 물건입니다. 만든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이아몬드의 값어치 외에도 프리미엄이 붙을 수도 있고요. 도시에서 이런 고급품을 취급하는 곳을 방문하셔서 재감정을 받으시고 값을 받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몇 캐럿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은 잘 몰랐지만, 가게 주인이 도시에 가서 팔아야 더 많은 값을 받을 거라고 일러준다는 것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해를 보더라도 바로 팔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물건을 팔기 위해 도시까지 갈 여유도 없었다.
“그냥 여기서 팔고 싶어요. 주실 수 있는 만큼만 주시면 팔겠어요.”
“저희 같은 작은 가게에서는… 이만한 현금을 준비해두고 있지 않습니다, 아가씨.”
가게 주인이 난처한 듯 말하며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반지가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금액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물건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너무 눈에 띄는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왜 그리 급하게 처분하시려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가게 주인이 목소리를 좀 더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사적인 질문을 받게 된 것에 더욱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반지를 돌려주려고 내밀자, 얼른 그의 팔을 잡아 멈추며 말했다.
“이, 이건 제 것이 확실해요. 전에는 아버지가 부자였기 때문에 이런 걸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먹을 것을….”
횡설수설 하다가 그만 빵을 사야 한다고 말할 뻔했다. 가게 주인의 팔을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아가씨께서는 미네타 씨의 사촌이 아니신가요? 지난번에 그분이 오셨을 때 말씀을 하셨는데 인상이 비슷하셔서….”
“아….”
미네타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 아드리아나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가게 주인도 눈가를 더 느슨하게 하는 듯 보였다.
“역시 아가씨였군요. 보호소 일을 도와주시려고 찾아오셨다 들었습니다. 귀한 댁의 아가씨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시고 어떻게든 해주고 싶어 하는 숭고한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건 아가씨께서 지니고 계시는 게 좋을 걸로 보입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겠으나, 이런 물건은 가볍게 주고받는 게 아니기도 하고요.”
아드리아나는 대답할 말을 잃어버렸다. 가게 주인의 말은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진 것을 하나 팔아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고 싶었을 뿐이다.
“다이아 몇 개를 팔아도, 나아지는 건 오늘 내일의 한 끼뿐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보호소의 다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켜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어쩐지 가게 주인은 미네타의 보호소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그 후 보호소 일꾼들의 안부를 물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네타에게 전해달라며,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몇 봉투 사왔다.
“조만간 월동용품을 좀 챙겨서 놀러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눈이 오면 거기가 미끄럼 타기 좋거든요. 저희 집 꼬마들이 아주 좋아한답니다.”
아드리아나는 반지는 팔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양손에 고기가 든 봉투를 들고 보호소로 돌아왔다.
*
“아니, 오드리! 어디서 돈이 나서 아침부터 고기를 사 왔어?”
“고기? 오늘은 고기반찬이야?”
입구에서 빨랫감을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들이 발견하고 꺄 소리를 질렀다.
“아…, 잠깐 바람 쐬러 나갔다가 받았는데….”
고기를 사 준 보석 가게 주인에 대한 얘기를 하자, 미네타는 금방 눈을 빛내며 아드리아나를 추궁했다.
“근데 오드리가 보석 가게에는 왜 갔는데?”
“어, 그냥…예쁜 보석을 구경하고 싶어서….”
“이런, 거짓말을 하다니. 오드리도 속세인이 다 되었군그래?”
“자꾸 물어보지 마세요.”
“흠….”
미네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조그맣게 물었다.
“혹시 반지 팔러 간 거 아니야?”
“어, 어떻게 아셨어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올려다보자, 미네타가 눈썹을 찡그렸다.
“에휴, 우리 오드리.”
“어떻게 아셨어요? 아저씨가 전화하셨어요?”
“아니야. 다 아는 수가 있지.”
아드리아나가 충격 받은 얼굴로 서 있자, 미네타는 아까운 걸 알려준다는 듯 사실을 말해주었다.
물론 대단한 비결이나 독심술은 아니었다. 아드리아나가 슈하스의 교회에 처음 가서 로레인에게서 반지를 받아 왔던 날, 사무실에 들른 그녀의 치마 주머니에서 커다란 반지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오드리, 여기 엄청 비싸 보이는 반지를 떨어뜨렸어! 하고 말해주려고 방문을 두드렸더니 꼭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 같은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벌벌 떨잖아? 거참, 살다 보면 누구나 다이아몬드 반지 한 번쯤은 훔쳐보고 그러는 건데 모르는 척 해주자 싶어서 주머니에 몰래 넣어줬지.”
“후, 훔친 거 아니에요. 제 거예요.”
“그으래?”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되죠, 미네타.”
“그런가?”
미네타는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입을 내밀고 있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싱글거리기까지 했다.
“괜히 자기 물건 팔아먹지 마. 갑자기 돈 좀 생긴다고 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그런 건 얼마 안 가.”
“아저씨도 그렇게 말했어요….”
“보석 아저씨는 여기 후원자시란 말이야. 형편 다 아시니까 뭐. 그나저나 우리 오드리 덕분에 마음 약한 아저씨가 조만간 또 빵 사 들고 오시겠구먼.”
미네타가 의자 머리 뒤에 팔을 베고 기대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바보처럼 괜한 짓을 하며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다니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놀림 받는 대로 삐죽삐죽 입만 내밀고 있다가, 수업 시간이 되어서야 뭉그적뭉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 덧셈 알려줘. 한 자리 수 덧셈도 웬디 밖에 제대로 하는 애가 없다니까.”
“알겠어요. 지금쯤이면 공부방 따뜻하게 데워졌겠죠?”
“아까부터 애들이 그림 그린다고 거기 몰려 있었으니, 다들 궁둥이로 따뜻하게 만들어 놨을걸.”
“그럼 자리 뺏어서 앉아야지.”
아드리아나는 히히 웃으며 공부방 문을 열고, 누구 자리를 빼앗아 줄까 두리번거렸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얘들아.”
하고 부르자, 아이들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던 종이를 들고 나왔다.
“오드리! 이거 봐요. 내가 오드리 얼굴 그렸어요.”
“정말? 눈도 이렇게 반짝거리고 속눈썹도 이렇게 길게 그려주다니 너무 예쁜데?”
아드리아나는 그림에 정신이 팔린 채로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 없는 바닥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서 인원을 체크하다가, 한 명이 자리에 없음을 깨달았다.
“어, 웬디는 어디 갔어?”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한 아이가 입을 열었다.
“웬디 누나 할머니네 집에 갔어요.”
“또?”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어른들에게서는 들은 말이 없었다. 잠깐 아이들의 그림을 봐주다가, 아무래도 찜찜한 생각이 들어서 몸을 일으켰다.
“나 미네타한테 갔다 올게. 잠깐 너희끼리 그림 좀 더 그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아드리아나는 사무실과 화장실, 창고를 순서대로 뒤진 뒤에 세탁실에서 미네타를 발견했다.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 둘의 도움을 받아서 함께 겨울 이불을 빠는 중이었다.
“웬디 또 할머니 댁에 보내셨어요?”
“아니.”
미네타가 벗어두었던 안경을 집어쓰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거기 갔대?”
“그렇다던데요. 애들이….”
“이놈의 빵순이, 혼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또 미리 말도 안 하고.”
할머니를 따라갔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웬디는 고집이 있어서 가끔 큰 애들처럼 말을 되받아치거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웬만한 사정이 없는 한, 늘 바르게 행동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정말, 혼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말을 안 하고 나간 건 이상해. 자기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서 생각 없이 같은 잘못을 하는 아이가 아닌데.’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웬디의 고모할머니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일반 가정에 전화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녀가 산다는 우아즈는 자전거로 찾아가볼 수 있는 가까운 마을도 아니었다.
‘…아이가 없어지면 이런 마음이 되는구나.’
지난번에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인데도, 밤이 늦도록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달을 같이 지낸 아이에 대해서도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데, 자신을 17년이나 키우고 잃어버린 어머니는 지금 어떨지 가슴이 아파져 왔다.
‘빨리 돌아와, 웬디.’
아드리아나는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4시간이 지나 잠을 깨기 직전에, 리노아스의 저택 어느 방에서 뜬 눈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
*
“얘가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다음날까지도 웬디에게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루이 씨가 직접 우아즈에 다녀오겠다고 나섰지만, 무턱대고 그들 마을을 찾아가서 헤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헤밀처럼 작은 마을이 아니고서야,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웬디의 고모할머니 집’을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 해요. 제가 가 볼까요?”
저녁까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아드리아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감감무소식인 것에 애태우고 있노라니 이제는 웬디가 정말로 고모할머니를 따라간 것인지마저 의심이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말하고 데려갔다면 그분인 건 맞겠지…. 일단 내일 다시 얘기해요.”
미네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오드리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 애한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는 짚이는 일이라도 있는 듯 그렇게 말하고서, 침대에 누워 침잠한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원래도 살이 없는 뺨이 더욱 수척하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보호소에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미네타 선생님. 오드리 씨.”
노아였다.
미네타가 두꺼운 카디건 속에 몸을 웅크린 채로 아드리아나에게 말했다.
“내가 좀 와주시라고 불렀어. 차를 가지고 계시니까…. 미안해요, 휴스턴 씨. 바쁘실 텐데.”
“아닙니다. 이 정도는 도와드려야죠.”
“그럼 오드리를 데리고 갔다 와 주세요. 난 할 일이 많아서 같이 가지는 못할 것 같네요.”
“미네타….”
아드리아나는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미네타를 쳐다보았다. 하루 새 입술이 거칠어지고 아픈 사람 같아 보였다. 잠이 많은 그녀가 요근래 자꾸 잠을 설쳐서 그런 듯했다.
“수고해줘. 웬디가 어떤지… 보고만 와도 되니까. 뭔가 문제가 있으면 휴스턴 씨가 알아서 해주실 거야.”
보고만 오다니 웬디를 데리러 가는 게 아닌가? 아드리아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미네타에게 더 말할 기운도 없어 보여서, 그리고 도와주러 와 준 노아가 기다리고 있어서 그만 몸을 돌렸다.
“혹시 우아즈의 어디인지는 못 들으셨습니까?”
“네, 그냥 그렇게만 들어서…. 근처에 큰 호수랑 학교가 있다고 했어요.”
“그렇군요.”
노아가 지도를 펼치고 잠시 훑어보았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이윽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