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16화 (16/140)

00016  헤밀 편 - 긴 겨울  =========================================================================

아드리아나는 얼린이 두려웠다. 그는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여유롭고 무감각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빤히 바라보았을 때, 버클리도 불편한 듯 그의 시선을 피했었다.

‘그래도 난 지금 머리 스타일도 바꿨고 살도 많이 빠졌고…. 이름도 다르니까….’

당장 누군가가 아드리아나를 찾아내서 진짜 신분을 밝히며 데려가려 한다면, 아드리아나는 그저 무조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우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낸 가짜 고향과 새 이름으로 생활하고 주변에 녹아들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장 얼린과 마주친다면 그도 속여 넘길 수 있을까? 그에게 붙잡혀서 추궁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 속에 떠올랐다.

[아가씨가 아드리아나 클로제가 아니라고? 이름이 다르다고? 성은 뭐지? 가족은 어디에 있지? 코니스라면 나도 구석구석 알고 있어.]

어쩐지 그는 모르는 게 없을 것만 같았다. 아드리아나는 그 사람에게 한 마디도 제대로 반박하거나 대꾸할 자신이 없었다.

‘어떡해…. 누군가에게 가짜 가족 행세라도 해달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러면 얼린에게 들켜도 피할 수 있을까?’

두려운 상상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차창 밖이 익숙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노아의 자동차가 보호소 마당 안으로 매끄럽게 진입했다. 그는 먼저 운전석에서 내려 아드리아나가 탄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난 후, 짐을 내리기 위해 트렁크로 갔다.

“휴스턴 씨…?”

차 소리를 듣고 마중 나온 미네타가 함께 온 두 사람을 보고 어찌 된 일인지 묻는 눈을 했다.

“안녕하세요, 미네타 선생님. 무슨 일이 생겨서 온 건 아니고, 시내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오드리 양과 우연히 만났어요. 짐을 한 보따리 가지고 계시기에, 지나는 길에 데려다 드리려고 온 겁니다.”

노아가 말하자, 미네타가 짐을 쳐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난 뜨개질감 사올 돈 밖에 안 줬는데, 우리 오드리는 뭘 이렇게 잔뜩 구해온 거야? 데려다 주셔서 고마워요, 휴스턴 씨.”

감사 인사를 하는 미네타를 보고, 노아는 연극을 보던 때처럼 밝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드리아나는 미네타와 함께 노아를 배웅한 후, 방으로 돌아와서 짐을 정리했다. 단골로 들르는 시장 골목에서 가게 주인들이 나눠준 물건들이었다. 헤밀은 원래 주민 인심도 좋은 편이었지만, 아드리아나가 보호소 일을 돕는다고 알려진 이후로는 하나라도 더 베풀어주게 되었다.

“실 색깔 잘 골랐는데? 다 귀엽다. 이건 병아리 같아.”

“애들 스웨터로 만들어서 입히면 정말 그럴 거예요.”

“와, 이건 향초인가? 음. 향기가 좋은데.”

“유리 공방에서 받은 거예요. 연말에 팔려고 시험 삼아 만들어봤대요. 안에 든 종이를 풀면 심지가 있어요. 애들 가까이 가면 위험하니까 사무실이나 우리 방에 놓으라고 하셨어요.”

“오오.”

미네타는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나서, 목도리 만드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잠시 상담하러 온 손님이 있다며 사무실로 떠났다.

아드리아나는 아이보리색 털실을 골라, 방금 배운 목도리 만들기를 시작했다.

‘발각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거야….’

정 안심이 되지 않으면,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보호소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모습은 변할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아드리아나의 존재는 잊힐 것이다.

조용히 앉아서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가 완성되어 가기를 기다리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미네타와 일정을 빡빡히 세우며 떠드는 동안, 불안함은 거의 가라앉았다.

그렇게 겨우 잊어버리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한번 잠을 설쳤다가 다시 눈을 감은 새벽에는 무서운 꿈에 시달렸다.

아드리아나는 눈도 감지 못하는 채로 누워서 아침을 기다렸다.

얼린은 아드리아나를 알고 있으며 버클리까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둘 사이에서 벌어진 낯뜨거운 장면조차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날 그가 보았을, 버클리의 밑에 깔려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숨이 막혔다.

리노아스에서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싶고, 영원히 멀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왜인지 문득, 고향을 잃어버리지 말라던 로레인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고향 같은 건 없어져 버렸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이제야 자신이 고아가 되었다는 현실에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

“물론 우리야 서로 진짜 가족처럼 생각하고 지내지. 오늘도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글씨는 예쁘게 쓰는지 들여다봐 주고, 우리 집 애가 남의 집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라도 맘대로 주워 먹었으면 달려가서 대신 사과도 하고. 하지만 생물학적 친권자, 법적인 보호자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되는 게 사실이니까.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도 우리끼리의 얘기라는 거야. 외부인이 와서 따져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어. 그럼 그걸로 끝이고.”

미네타가 웬디의 머리카락을 묶어주며 장장 설교를 늘어놓았다.

몇 달 전만 해도 한 번에 다 묶어지지 않을 만큼 짧았던 웬디의 머리카락은 이제 어깨 밑으로 내려올 만큼 길었다. 높게 묶어주면 숱 많은 머리카락이 조랑말 꼬랑지처럼 찰랑찰랑 흔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빵순아?”

“하나도 모르겠어.”

“요 맹꽁이가.”

웬디가 미네타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유는, 그 애가 일으킨 작은 말썽 때문이었다.

나흘 전, 우아즈에 산다는 웬디의 고모할머니가 손녀를 며칠 돌봐주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그리하여 웬디는 우아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오게 되었는데, 그 집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하루가 아닌 사흘이 지나서야 마중 나와 달라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미네타와 아드리아나는 그 연락이 올 때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애간장을 졸였다. 웬디와 통화를 마친 순간이 되어서야 각자 안도의 신음을 흘리며 벽과 바닥에 눌어붙었다.

“아무튼 약속을 우습게 아는 맹꽁이는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건 미안해요…. 하루만 더 놀다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거긴 전화기가 학교랑 관공서에만 있대요. 주말이라 다들 쉬어서 전화를 하려면 많은 사람들을 귀찮게 해야 했단 말이야.”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조금 귀찮게 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모르겠니, 빵순아?”

“미네타가 만날 남한테 폐 끼치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그 중심을 잘 조절하는 게 현명한 어른이지.”

“나는 어른 아니거든요?”

결국 미네타가 웬디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쥐어박고야 말았다.

“요게 좀 컸다고 반항하기 시작하네.”

아드리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끼어들었다.

“미네타가 애들 앞에서 이상한 말투를 쓰니까, 애들이 다 따라 하는 거예요.”

“맞아. 나한테도 동그란 빵순이라고 하고 나빴어.”

“에이, 몰라! 내가 너 때문에 못 잔 걸 생각하면…. 한 달 동안 빵은 없을 줄 알아라.”

“아이 참, 미안하다니깐…. 그렇게 나를 걱정했어?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왜 그랬어.”

머리를 다 묶은 웬디가 뒤를 보고 돌아앉으며 미네타를 달래주듯 끌어안았다. 아드리아나는 미소 짓은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식사준비를 도우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남작의 성 앞에서 얼린을 본 후로부터 벌써 2달이 지났다.

외출을 줄이고 더 조심한 덕분인지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은, 아드리아나가 헤밀에 온 첫 1주일간 걸려 있었던 그 이후로 다시 붙지 않았다.

아드리아나를 찾던 이들은 벌써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상황에서 이렇게 살아남았으리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아주 우연히’ 눈썰미 좋은 지인의 눈에 띄는 일만 피하면, 자신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아, 오늘은 진짜 춥다. 장작도 더 패야 하는데 월요일에는 일꾼을 좀 써야겠어. 오랜만에 오토 씨한테 부탁해볼까.”

미네타가 창고에서 남은 장작을 한쪽으로 잘 쌓고 마른 장작 부스러기를 쓸어 담아 모으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산적처럼 생긴 빵집 주인아저씨를 떠올리며 웃었다.

“오토 씨가 웬 장작을요?”

“그 사람 가게 지키는 거 질색하거든. 다른 일을 하면 가게를 안 지켜도 되니까 두말 않고 달려온다고.”

“왠지 오토 씨가 도끼 든 모습이 너무 잘 상상 돼요. 하하.”

보호소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갔다. 지금까지 슈하스 시의 직원이라는 사람들이 두 번 다녀간 적이 있었지만, 범칙금을 명목으로 돈을 조금 물게 하고서 순순히 돌아갔다. 미네타는 그들이 이렇게 주기적으로 찾아올 때마다 그냥 세금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군말 없이 돈을 내준다고 했다.

“미네타, 메로가 이번 주는 자기랑 같이 빵 사러 갈 차례인데 안 가준다고 삐쳤어요.”

“삐쳐도 할 수 없어. 앞으로 간식 사러 나가는 건 한 달에 한 번만 할 거야.”

“우리 형편이 그렇게 어려워졌어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겨울에는 생활비가 늘어나니까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줄이는 게 좋지. 의복비나 식비, 난방비 모두 올라가거든.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고.”

“아…. 그런 게 있군요.”

근래 들어서 특별히 형편이 나빠진 것은 아니고 매년 이맘때쯤이면 슬슬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보호소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미네타는 단 것을 찾는 아이들에게 아쉬운 대로 노란 고구마를 구워서 쥐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전처럼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게 해줄 수는 없게 되었다.

‘…반지를 팔면 먹을 걸 많이 살 수 있을까?’

드레스와 함께 보관해 둔 다이아몬드 반지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남겨진 귀중품 중에서 하나만을 고른다면 그것을 지니고 싶어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다른 장신구보다 가볍고 눈에 덜 띌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잠시 후, 아드리아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들어가서 드레스가 담긴 상자를 열고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반지를 들여다보다가, 스콰이어 가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처럼 왼쪽 약지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보았다. 너무 헐렁했다.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무거운 부분이 빙글 기울며 새끼손가락에 힘없이 걸쳐졌다. 누가 봐도 그 반지가 아드리아나의 것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이런 것보단 먹는 게 더 중요해.’

아드리아나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보호소를 나와, 슈하스에 있는 보석 가게를 찾았다.

창밖에서 슬쩍 들여다보니, 회색 머리카락과 수염을 단정하게 정리한 중년의 남자가 진열대의 유리를 닦고 있었다. 이제 막 문을 연 모양이었다. 손님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저기….”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불렀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치 훔친 물건을 처분하러 온 듯,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가게 주인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편안한 인상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어쩐지 그가 자신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 반지를 팔고 싶은데요. 얼마나 주실 수 있나요?”

그동안 노동도 많이 해보았고 혼자 시장에서 물건도 사 보았다. 하지만 뭔가를 팔아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팔고 돈을 요구하는 거래라는 것은 어쩐지 몹시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첫 도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지를 가져오셨습니까?”

“아, 네. 여기에….”

“봐도 될까요?”

아드리아나가 반지를 찾는 동안, 가게 주인은 진열대 위에 도톰한 벨벳 천을 펼쳐놓은 후, 알이 작고 두꺼운 돋보기를 하나 꺼냈다. 아드리아나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조심조심 천 위에 올려놓았다.

가게 주인은 반지를 보더니 멈칫하고 먼저 맨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아가씨의 것인가요?”

아드리아나는 그가 의심하는 걸까 두려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으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거예요.”

“그렇군요. 귀한 물건 같은데 파셔도 괜찮으신지요.”

“네….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가게 주인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돋보기를 들어올렸다.

0